이 글은 지난 가을, 작가 신경숙님이 쓴 글입니다.
글이 좀 길지만 참 음미할만한 글이라고 생각되어 퍼다 두었던 글을 오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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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으로 외출할 일이 있어 집 앞에서 택시를 탔다.
바람이 많은 날이었다.
뒷자리에 앉아 무심히 바람이 일렁이는 거리를 내다보는데
바람이 한 번 지나갈 적마다 거리의 은행잎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택시가 청와대 길을 돌아 나올 적엔 차창으로 낙엽들이 우수수 날려왔다.
썰렁한 11월의 거리, 나는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고 있었다.
묵묵히 운전만 하던 기사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우수수 지는 낙엽을 내다보는 나를 향해 그런다.

" 나이가 드니 가을이 싫어집니다."
나는  "아,네..."  하고 웃으며 그 때야 택시 기사를 바라봤다.
쉰은 넘어 보이는 분이었다.
뒷머리가 희끗했다.

나이가 드니 가을이 싫어집니다.
고단해 보이는 얼굴탓이었는가?
그닥 나이가 들지 않은 나도 갑자기 가을이 싫어지고 스산해져 입이 다물어지고 자꾸만 손바닥만 비비게 되었다.
약간 추운 마음으로 손바닥을 비비고 있으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으로 사는 걸까?
무슨 힘으로 이 막막하고 불안한 마음들을 달래고 버티고 견디는 걸까.
10대 땐 20대가 되면, 20대 땐 30대가 되면
막막하고 불안한 마음이 치유되리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든든한 것이 생겨서 아슬아슬하고 추운 마음,
늘 등짝에 멍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마음을 거두어 가 주리라,
그렇게 부질없이 세월을 믿었다.

바람이 일렁이는 썰렁한 거리를 외면하느라고
가방 뒤에 꽂아 가지고 다니던 계간지를 꺼내 펼친 페이지에
실려 있는 시 한편이 다시 가슴 어디를 마구 헤집어 놓는다.

1. 안녕히 가세요
   곧 따라가겠지요
   몸은 비에 젖은 땅에 묻고
   영혼은 안 보이는 길 떠나네
   나보다 몇 살 위의 代子님
   자주 만난 날들이 맑은 무지개 같애
   공중에 어리는 가벼운 길 떠나면서
   퍼붓는 빗속에 남는 이름들
   안녕히 가세요, 희미하게
   가는 길 지우면서 비가 울고 있네

2  침묵만 남기고 돌아선 자리
    어두운 회한의 냄새를 지운다
    누구의 잘못을 가려 무엇하랴
    남은 시간의 사면이 다 어두워
    돌이켜 찾아도 보이지 않는,
    이 곳에 처음부터 있었는지 없었는지
    생활에 젖은 옷이 흰 빛으로 마른다
    마른 옷 날개 되어 머리 위로 떠오른다
    인연은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지?
    그대 편안한 얼굴로 돌아선다
    욕심을 털어버린 도시의 중심에서
    편안한 빈혈의 얼굴이 돌아선다       - 마종기, 이별 -

시를 다 읽은 내 가슴에 툭, 떨어져 있는 한 구절.
'인연은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지?'

얼마전 십여 년 동안 가까이 지내던 선배와 심야 통화를 하다가
나는 그에게 엄청나게 생떼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선배가 뭘 어째서가 아니었다.

그 날 나는 잊히지 않는 옛일로 인해 종일 마음이 뒤숭숭해 있었던 참이었다.
이제는 다 지나갔다고 괜찮다고 여기고 있던 일들이 돌연 거슬러 올라와
마음을 불안하게 흔들어 대는 일이 나에겐 종종 발생한다.
그럴 때면 대체로 외출할 일을 취소하고
그저 집에서 빨래를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비디오를 보는 일로
마음을 달래곤 했는데 그 날은 그것으로도 뒤숭숭한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선배는 다른 사람이 못 보는 내 내면을 다 일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나는 가끔 그에게 당최 말도 안되는 생떼를 쓰게 된다.

그는 늘 그런 나를 연민스럽게 바라보며
'니가 나 아니면 누구한테 이러겠느냐'  며 봐 넘겨 주곤 했었다.

전혀 괜찮지 않은 일도 괜찮다고,
괜찮다고, 하며 참아 주었고,
내가 어떤 미혹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면
엄하게 꾸중을 해 다시 돌아오게도 했고,
내가 자괴심에 빠져 있으면 그저 옆에서 지치지도 않고
내가 세상에 어떻게 소용되는 사람인가를 누누히 말해 주곤 했다.

그런데 그 날 나는 수화기 저편의 선배가 말을 잇지 못할 만큼
그의 심중을 건드려 놓았다.
사적인 일이니 소소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처음부터 내 말은 앞 뒤가 맞지 않았고
그렇게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도 내겐 그 선배뿐이었다.

말이 말을 낳고 또 말이 말을 낳고...
어느 말을 하는 순간, 나도 깨달았다.
내가 선배라도 더는 못 참겠구나.
어쩐 사람이 어쩐다고...

통화를 마칠 때 나는 선배에게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까지 말하고 있었다.
인생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나는 그에게 그런 식으로 떼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먼저 전화해서
'그래 마음은 가라앉았는가?'
하고 물어 봐 주던 선배였는데...이번엔 벌써 일주일째 소식이 없다.
내가 해도해도 너무했던 것이다.

내 잘못을 너무도 잘 아는 탓으로 차마 전화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 내 마음 속으로
화두처럼 떨어지는 시 한 구절.

'인연은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지?'
이렇게 또 다시 한 해가 간다고 생각하니 형언키 어렵게 마음이 흔들린다.

밤에 문득 잠이 깨서 그저 가만히 누워 날을 새는 날도 있고,
바깥에서 복잡한일을 하고 있다가 다 없던 일로 해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자 버리기도 하고 그런다.
세월이 지났지만 아무런 평화를 얻고 있지 못하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세월에 기댔을까.
시간이 지나면 마음의 평화를 얻으리라, 생각했을까.
20대의 어느 대목에선가는 20대가 참 길다고 생각했고,
어떤 격정에 휩싸이다 결국 자학에 빠질 때는 편안해지리란 이유로
어서 나이를 먹었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그 때 그랬다.

서른이 되면,
혹은 마흔이 되면 수습할 길 없는 좌절감에서는 빠져 나오지 않겠는가.
살아가는 가치 기준도 생기고 이리저리 헤메는 마음도 안정이 되지 않겠는가.
그 때쯤이면 어느 소용돌이에도 휘말리지 않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지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언제나 새로운 생김새의 불안과 막막함이 가로 놓여 있다.
나아지기는 커녕 이제는 무슨 일을 시작해서 실패를 하면
그 실패의 영향이 내내 앞으로의 인생에 상처로 작용하게 될 것 같아
살얼음판을 딛는 것 같은 조심스러움까지 동반한 막막함,

그 때문인가. 운신의 폭은 점점 더 좁아지고,
등짝에 멍이 든것 같은 마음 시림은 더해진다.
어쩌면 인간이란 본래 어느 구석이 그렇게 비어 있고,
평생을 늘 그 빈 곳에 대한 결핍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선배와의 불화속에서 요즘 내가 느끼는 것은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근원적인 결핍을 지니고서도 사람이 사랑과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것은
사람 옆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

그런데 이기심으로 집착으로 무성의로 늘 사람을 잃어버리며 지낸다.
실제로 어떤 현상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만이 죽음은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속에서도 죽음은 수도 없이 이루어진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던 탓으로 내 곁에서 사라지게 했던 사람들.
한때 서로 살아가는 이유를 깊이 공유했으나
무엇 때문인가로 서로를 저버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관계의 죽음에 의한 아픔이나 상실로 인해
사람은 외로워지고 쓸쓸해지고 황폐해지는 건 아닌지.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신뢰.
서로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사람이 주변에
둘만 있어도 살아가는 일은 덜 막막하고 덜 불안할 것이다.

마음 평화롭게 살아가는 힘은 서른이 되면,
혹은 마흔이 되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 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내 아픔과 기쁨을 자기 아픔과 기쁨처럼 생각해 주고,
앞뒤가 안 맞는 애기도 들어주며,
있는 듯 없는 듯 늘 함께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행복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라는 생각도,

언제나 인연은 한 번밖에 오지 않는가도 생각하며 살았더라면,
그랬다면 지난날 내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덜 줬을 것이다.

결국 이별할 수 밖에 없는 관계였다 해도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시의 한 구절처럼 우리가 자주 만난 날들은
맑은 무지개 같았다고 말할 수 있게 이별했을 것이다.

진작 인연은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