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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한화의 김승연 회장이 깡패를 동원해 폭력적으로 아들의 복수를 한 사실이 밝혀져 사회의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이 때 그는 아마도 수억의 돈을 썼을 것이다.

물론 수억이라고는 하지만 그에게는 푼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승연이라는 인간은 아주 젊었을 때부터 방자한 행동으로 유명했다.

그 때 사람들은 김승연이라는 개인의 품성 때문에 이런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고 믿었다. 과연 그럴까? 의문을 가지고 이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은이(전도연)는 이혼녀다. 그녀는 마치 백치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식당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유아교육과를 나왔다는 장점 때문에 최상류 층에

속하는 부자집 하녀로 들어간다.

주인은 완벽한 남자 훈(이정재)이다. 군살 하나 없는 근육질의 몸을 유지하고 있고

취미 이상의 훌륭한 피아노 실력을 갖추고 있으며,

모든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세련된 매너가 몸에 배어 있다.

안 주인은 쌍둥이를 임신 중인 해라(서우)다. 그녀 역시 완벽한 미모와 매너를 갖춘 세련된

여자다. 그 외에 집안일을 총괄하는 고참 하녀 병식(윤여정)이 있다.


가족들은 새로 들어 온 하녀 은이를 친절하게 대해 준다. 반말 쓰는 적도 없고

그야말로 한 가족처럼 생각하게 될 정도로 살갑다. 병식의 친절한 지도에 따라

서민과는 전혀 다른 부자 집 일을 익혀 나간다.


어느 날 은이는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 은이는 훈과 관계를 갖게

된다. 배가 남산만큼 부른 부인과의 섹스가 만족치 않은 탓도 있으리라. 워낙

심성이 고운 은이는 이 사건을 그저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완벽한

남자의 몸에 적응해 나간다. 문제는 이 관계와 은이의 임신 사실이 병식에게

들통 나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번진다. 해라의 어머니에게 용돈을 받으며

집안 정보를 제공하는 병식이 이를 고해 바쳤기 때문이다. 해라 엄마의 교활한

잔꾀가 일을 크게 만들고 마지막 비극을 향해 줄달음친다.


평소에는 교양 있는 매너가 몸에 배인 훈의 천민성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낱낱이 드러난다. 은이는 비록 하녀 일을 하고 있지만 하인의식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주인들과 자신이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주인들의 친절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훈과의 관계도 그저

내가 좋아서 그런가 보다 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독립적 인간이다.


그런데 일이 터지게 되니까 훈의 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훈은 은이를

동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자기 부인과 장모조차도 그에게는

하녀나 다름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 평범한 남편이나 사위가 아니라 지배자

였다. 자신을 빼 놓고는 모두 하인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은이에게 이런 관계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은이가 나름대로 복수를 결심한 동기가 되겠다.


나는 훈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재벌들을 많이 보아 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재벌들은 자기들을 스스로 소외시켜 가고 있었다. 김승연 사건도

나는 독특한 그의 캐릭터에서 그 원인을 찾지 않는다. 오랜 전부터 재벌들은
그런
방식으로 주위와의 갈등을 해결해 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조용기

목사의 아들이 거액의 위자료를 요구하는 탤런트 출신의 부인을 김승연과

똑같은 방식으로 깡패를 동원해서 해결한 사건은 유명하다. 그 방식은 재벌들
사이에서는
신기하지도 않은 상식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부인까지도 하녀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훈과 조용기 목사의
아들의 예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아마 촘스키라고 생각되는데(?) 미래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을 한 적이

있다. 미래의 빅브라더는 누구냐. 정치가냐? 군인이냐? 아니라는 것이다.
미래의
빅브라더는 재벌이라는 것이다. 정치가는 사라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재벌은
대대로 이어가는 것이며, 권력을 손에 쥔 정치가도 재벌의 노예일 뿐
이라고
하였다. 위에 말한 여러 가지는 촘스키의 예언이 허언이 아님을 보여
준다.
  모든 사람은 똑같은 인권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보편적 진실은 이제
수정돼야 할지도
모른다.


김기영 감독의 원작은 개인의 욕망에 초점을 맞춘 영화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갈등의 원인을 사회적 관계의 틀에서 찾아냈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다 의미

심장한 영화로 만들었다. 칸이 이 영화를 수상작으로 선정할지의 여부도 이런

포인트가 서양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달려 있다고 본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연출도, 촬영도, 연기도 모두 최상급의 수준이다. 물론

재미도 있다. 임상수는 ‘오래된 정원’ ‘바람난 가족’ ‘그 때 그사람’ 등을 만든

감독이다. 모두 다 좋은 영화들이다. 칸이 주목할 만 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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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든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시가 죽어가는 시대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이긴 하지만

아직도 시를 쓰는 사람도 있고 시를 읽는 사람도 있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같은 의미로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영화를 만드는 일은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걸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냥 영화가 아니라 이창동 감독의 실존적 고뇌가 담긴

자기고백서다.


이 영화에 시 선생님으로 김용택 시인이 나온다. 선생님,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당신이 산

인생 속에서 아름다웠던 순간을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학생들은 모두 자기의 인생에서 아름다웠던 순간을 기억해내려고 했다.

아, 그러나 학생들은 아름다웠던 순간이란 보잘 것 없고 자신의 인생이

슬픔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란 무릇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우리의 인생이 아름다우냐? 지금 사는 우리의 시대가

정녕 아름다우냐? 지금처럼 그저 돈만 추구하는, 향락만 추구하는,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들로만 가득 찬 이런 세상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냐?

사랑도 박제가 되어 버린, 상품이 되어 버린 이런 세상,

지금처럼 타인에게 대한 최소한의 배려, 사랑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야말로

최소한의 배려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이런 세상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냐?

타인과의 최소한의 소통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이 각박한 세상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냐? 진정한 소통도 없이 헛웃음만 날리는 가식적인 세상, 철갑

갑옷을 입은 채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그런 사람의 가슴에도 체온이

있다는 것이냐.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냐.


미자는 66세의 할머니다. 외동딸이 하나 있는데 아이만 하나 덜렁 남기고 이혼

했다. 중3인 아니는 할머니에게 맡기고 돈 번다고 대처에 나가 있다. 그렇다고

미자에게 돈을 부쳐주는 것도 아니다. 미자는 고독한 노인 돌보는 도우미를 하며

손자와 함께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거기다 요즘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병원에 가 보니 알츠하이머 초기란다. 별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다.


미자는 원래 꿈을 먹고 사는 타입의 사람이다. 조금 비현실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쥐뿔도 없으면서 옷은 화사하게

입고 꿈꾸듯 사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미자가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학생시절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은 기억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원에서 하는 시

강좌를 듣게 된다. 선생님은 김용택 시인. 강좌가 끝나는 날 시 한 편을

완성해야 한다는 숙제를 받는다. 시를 쓴다는 고행이 시작된다.


한편, 그 마을에 자살사건이 발생한다. 중3 여학생이 강에 투신한 것이다.

아네스라는 천주교 본명을 가진 학생이다. 그 사건이 미자의 생활에 끼어든다.

사건은 적수공권인 미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다. 사람들은 아네스의 죽음에는

관심도 없다. 다만 그 죽음이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처리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마음 여린 미자에게 이런 현실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통 속에서도 미자는 시를 쓴다. 아름다운 시와 현실의 고통-

아, 시란 도대체 무엇인가.


영화는 미자의 시를 쓰는 과정과 아네스 사건의 진행과정이 병치(倂置)되며

진행된다. 이러한 병치는 시란 무엇인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나타낸다. 현실의 고통 속에서 시는 아름다움만을 표현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시를 처음 써 보는 미자에게는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또한 시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자는 시가 결코 아름다움만을 억지로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깨닫는다. 시는 생활이요 삶 그 자체다.


마지막에 미자는 시를 완성한다. 그리고 어디론가 잠적한다. 미자가 완성한 시는

이런 것이다.



"아네스의 노래"


그곳은 얼마나 적막할까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좋아하는 음악 들려올까요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해야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이제 어둠이 오면

촛불이 켜지고 누군가 기도해줄까요


하지만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하리


마음 깊이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시란 아름다움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 속에서 느끼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에 꼭 필요한 것이다. 비록 세상이 거지

발싸개처럼 누추할지라도 그것은 사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위안이 아닐까.

이창동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감히 말한다. 이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우리는 위안을 받을 수 있다.

감동이라는 말 이외에 이 영화를 표현할 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