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 게시판담당 : 윤순영
글 수 714
.
| ||||||
|
2008.01.31 12:03:38 (*.14.200.69)
예술기행
로댕 미술관 로댕관
김화영 / 고려대 교수· 불문학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주불 한국 대사관은 파리의 북쪽 17지구의 빌리에 대로변에 있었다. 악명 높은 동백림 사건의 기억 때문인지 건물의 인상이 음산했었다. 그후 매우 다행스럽게도 대사관은 파리의 유서 깊은 지역으로 옮겨 앉게 되었다. 세느강 좌안의 이른바 『포브르 셍 제르맹』 거리에 당당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20세기 중엽 실존주의 작가들 때문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곳이 『셍 제르멩 데 프레』 거리요, 그곳의 카페 『되 마고』, 『플로르』 등이지만 그 지역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셍 제르멩 데 프레』 수도원이 있었다 하여 그 이름이 그렇게 전해내려 온 것이다. 『포브르셍 제르멩』이라면 바로 그 수도원이 있는 중심지 근방의 변두리 동네란 뜻이다. 이 동네가 크게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다.
당대의 귀족들과 부호들이 이 지역에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기 시작하면서 이곳의 면모는 전혀 달라졌다. 특히 거대한 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대문들부터가 행인들의 시선을 압도했다. 육중한 대문이 열리면 마차가 당도하는 넓은 뜰이 나타나고 뜰의 저 안쪽에 주인이 거처하는 건물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건물들 뒤쪽으로는 광대한 숲을 이루는 정원이 펼쳐진다. 이렇게 지어진 저택들의 문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파손되거나 굳게 닫혀버렸다. 그리고 소유주가 프랑스 정부나 외국대사관으로 바뀌었다. 포부르 셍 제르멩 거리가 다시금 황금시대를 맞는 것은 19세기 초엽, 왕정복고시대였다. 18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발자크의 『인간희극』에는 바로 이 거리의 대저택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유명한 소설 『고리오 영감』에서 시골의 몰락한 귀족가문의 아들 으젠 드 라스티냐크가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하여 찾아가는 먼 친척, 당시 파리의 귀족 사교계를 주름잡는 귀부인 드보쎄앙의 저택도 바로 포부르 셍 제르멩 구역의 그르넬 거리에 있다. 오늘날 주불 한국 대사관은 바로 그 그르넬 거리 12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드 보쎄앙 부인이 몽트리보 장군에게 실연한 슬픔을 못 이겨 노르망디로 은퇴하기 직전 그 장려하고도 서글픈 고별 무도회를 열었던 바로 그 저택을 대한민국 정부가 구입한 것일까 ? 그러나 보쎄앙 저택은 소설 속의 집일뿐이다.
이 동네의 자자한 명성도 루이 필립의 7월 왕조, 그리고 특히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과 더불어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세인들의 관심은 점차 샹젤리제 거리로 옮아갔다.
그러나 아직도 이 지역에 프랑스 정부의 청사들과 외국대사관이 밀집해 있다는 것은 바로 18세기와 왕정복고시대의 영화를 간접적으로 증언한다. 이 모든 기관들은 바로 광대한 대지 위에 대문, 뜰, 건물, 정원의 기본적 골격을 갖춘 옛날의 대저택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르넬 거리에만 해도 교육성, 보훈처, 공업성, 스위스 대사관이 등이 있다. 특히 이 거리의 명물로는 한국대사관 정문과 마주보는 프랑스 지리원 건물이다. 1722년에는 지어진 이 저택은 「느와르무티에 관」이었고, 20세기 초엽에는 프랑스군 총사령부였었다. 포슈 장군은 여기서 운명했다.
파리 한국대사관에 볼일이 있어 들르게 되는 여행자는 잠시 마음의 여유를 얻어 바로 이와 같은 동네의 유서 깊은 역사와 내력을 상기하면서 대사관의 대문과 뜰 현관과 건물, 그리고 다행히 기회가 주어진다면 건물 뒤쪽으로 펼쳐진 드넓은 뜰을 감상해 볼일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시간을 낼 수 있다면, 대사관의 대문에서 나서면서 왼쪽으로 불과 20여m 걸어나간 후 엥발리드 대로를 따라 다시 몇 걸음만 걸으면 나타나는 바렌느 거리의 첫 번째 저택 「비롱관」을 찾아가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여기가 유명한 조각가 로댕의 작품을 소장한 로댕 미술관이다. 한국대사관에서 불과 도보로 5분 남짓, 그리고 약 1시간이면 미켈란젤로 이후 최대의 조각가라는 이 대예술가의 작품들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다.
위대한 이 예술가의 작품들 못지 않게 우여곡절과 일화로 가득 찬 내력을 가진 것이 이 저택이다. 이 지역의 다른 많은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비롱관 역시 18세기에 지어졌다. 시골에서 가난뱅이로 상경하여 가발장사로 치부한 페랑크 드 모라스를 위하여 건축가 가브리엘과 오베르가 1731년에 완공한 건물이다. 이듬해 집주인이 사망하자 저택과 드넓은 땅은 뒤멘느 공작부인이 세내어 사용했고 1753년에는 튜울립 꽃을 미칠 듯이 사랑했던 비롱 원수의 소유로 넘어갔다. 비롱관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다. 대혁명 이후에는 교황의 총독인 카프라라 추기경이 거처하기도 했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뒤에는 예수의 성심수도회에서 경영하는 상류사회출신 소녀들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후일 나폴레옹 3세와 결혼하여 으제니 황후가 될 몽티죠 백작부인도 이곳에서 소녀시절 교육을 받았다.
1904년 정교분리가 이루어지자 수도회가 나가고 저택은 거의 버림받다시피 되었다. 명목상 국가의 소유로 변했고 국가를 대리한 청산인이 그 용도를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임시로 이 저택의 놀라운 분위기에 매혹된 예술가들이 세를 들어 쓰게 되었다. 오늘날 나폴레옹의 석관이 안치된 엥발리드의 돔이 바로 머리위로 바라다 보이는 파리의 한복판에서, 돌연 마주치게 되는 이 한가한 시골 같은 분위기와 균형 잡힌 성곽의 우아함-여기에 반하지 않을 예술가가 어디 있겠는가 ? 당시 젊은 문학청년이었던 장 콕토의 술회에 귀를 기울여보자.
『학교를 빼먹고 어슬렁거리던 어느 날 바렌느 거리에서 나는 그 길과 엥발리드 대로가 만나는 모퉁이에서 우연히 어떤 저택의 뜰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기에 수위한테 그 집안에 들어가 구경을 좀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비롱관이라 불리는 그 저택은 정교분리 이후 국가 청산인이 관리하는 동안 조각가 로댕이 건물의 몸체를 빌어 살고 있으며 나머지는 세를 놓는데, 따라 들어가 보겠다면 아직 사람이 들지 않은 방들을 보여주겠다는 대답이었다. 그중 어떤 것이 맘에 든다면 청산인 앞으로 신청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날 저녁으로 당장 나는 그 저택의 큰 방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수녀들이 경영하던 학교에서 춤과 음악을 가르치는 교실로 쓰던 방이었다). 싸구려 호텔 방을 한달 동안 빌리는 값 정도를 지불하고 나는 그 방을 1년 동안 쓰기로 계약한 것이었다.
건네 받은 커다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궁륭이 나타났고 궁륭은 정원으로 나 있었다. 정원인지 공원인지 채전인지 알 수도 없는 그런 숲이었다. 사춘기 특유의 아무 것도 모르는 눈으로 보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아니 그래 파리가 이 같은 침묵의 섬을 에워싼 채 살아서 걸어다니고 있었더란 말인가 ? 침묵이란 소음과 대조를 통해서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라 지만 그래도 그곳의 침묵에는 정말이지 압도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침묵은 귀를 잠재우고 오직 눈으로만 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풀과 나무들에서 솟아 나와서 그 침묵은 습관의 힘에 의하여 한 도시의 떠들썩한 소음을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침묵은 바로 버림받은 정원의 특권이었다. 이를테면 그 저택이야말로 '침묵의 장관'이라 할만한 것이었다. 따분한 되풀이에 지친 귀를 대신하여 결국은 눈으로 듣기에 이르는 특이한 현상인 것이다. 파리에서 수천 리나 떨어진 시골에 와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돌연 나를 가득한 침묵 속으로 던져 넣는 것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잔해가 쌓여 있고 들장미가 향기를 뿜으면서 모래와 잡초의 둥근 골짜기에 뒤엉켜 있었다. 엉겅퀴와 나뭇가지들이 뒤덮이지 않은 유일한 곳이었다. 다른 데는 걷잡을 수 없도록 무질서하게 자란 식물들이 작은 처녀림을 이루고 있었다. 이끼가 돋아난 계단들, 녹색유리창이 난 건물의 정면, 해시계가 그 모든 무질서의 풍경을 굽어보고 있었다. 반면 내방의 창문 겸 출입문들은 융단처럼 빽빽하게 자란 물망초들 때문에 열리지 않았고 그 앞으로는 그야말로 초목의 터널들이었다.』 시인 장 콕토는 이처럼 대조각가 로댕이 느꼈을 이 저택의 인상을 오히려 더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다.
비롱 저택이 정부관리로 넘어가 임시로 세를 놓게 되자 그곳으로 가장 먼저 들어가 살게된 사람은 여류 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였다. 그 여자는 후일 『두이노의 연가』나 『말테의 수기』로 널리 알려진 오스트리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부인이었다. 릴케는 빈의 어느 출판업자의 청을 받아 로댕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하여 파리로 왔다가, 서투른 프랑스말 실력에도 불구하고 1905년 9월부터 로댕의 비서로 채용되어 뫼동에 있는 이 조각가와 함께 살았었다. 그러나 작업으로 피곤해진 로댕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어 이듬해 5월, 시인 자신의 표현을 빌리건대 '도둑질한 하인처럼' 쫓겨나고 말았었다. 그러나 로댕에 대한 열렬한 찬미자였던 리께는 원한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아내 덕분에 이 비롱관을 발견하자 이 저택이야말로 로댕에게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즉시 그에게 연락을 했다.
그로부터 약 20년 전인 1889년, 로댕은 산책을 하다가 이탈리아 대로변, 클로 페이양에서 우연히 다 낡은 저택을 하나 발견했었다. 「라폴리 뇌부르」라는 버림받은 장원이었는데 나폴레옹의 시의였던 코르비자르, 나중에는 죠르쥬 상드와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가 들어 살았던 집이다. 이 집은 그리하여 로댕과 그의 아름다운 제자요 정부였던 카미유 클로델이 은밀하게 숨겨둔 채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거처가 되었었다. 1895년 건물이 붕괴위험에 직면하자 로댕은 그곳을 떠나 뫼농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든 아틀리에들 가운데서 그가 가장 떠나기를 아쉬워했던 곳이다. 카미유의 추억이 서린 곳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8세기의 아름다운 건물을 애호했던 로댕에게 비롱관은 바로 무너져버린 「클로 페이양」을 고상하게 승격시키고 더욱 크게 확대해 놓은 그같은 장원이었다.
즉각적으로 결정이 내려졌다. 이제 스무 살 남짓한 학생 장 콕토가 그렇게 손쉽게 빌릴 수 있는 집이라면 당대 최대의 예술가요 옥스퍼드 대학의 명예박사인 68세의 로댕에겐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방대한 비롱관의 1층 전체를 1년간 세내는데 불과 5900프랑이었다. 이리하여 1908년이래 지금까지 줄곧 비롱관은 부분적으로건 전체적으로건 「로댕의 집」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비롱관에 들어있던 사람은 로댕, 클라라 베스토프, 릴케, 콕코만이 아니었다. 유명한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이 이 집에 무용교실을 열고 있었고 젊은 화가 마티스도 여기서 살았다. 반면 카페에서 노래하는 통속가수 잔느 블로크까지 으제니 황후가 드나들었던 이 집에 들어 산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더군다나 비극 배우 에두아르 막스(예명 드 막스)는 저택 안의 옛 예배당에 들어 살면서 남색행각을 일삼았다 하여 대예술가 로댕의 복잡한 여자관계와 아울러 도덕군자들에겐 지탄의 대상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저택의 관리를 맡은 청산인은 이 같은 여론을 빌미 삼아 건물을 철거하고 건물 및 정원이 차지하고 있는 4만3천㎡의 광대한 땅을 45개의 필지로 쪼개어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재정적인 시각에서만 본다면 이것은 분명 현명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롱관에는 로댕이 들어앉아 있었다. 예술가의 친구들이 발벗고 나서서 항의했고 청년 콕토 역시 신문사의 친구들을 동원하여 여론형성에 분주했다. 이리하여 우선 18개월의 전세계약을 다시 맺은 로댕은 비롱관을 손에 넣을 계획을 세웠다. 돈으로 매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작품, 수집품 기타 소장품들과 함께 자신의 미술관을 만들어 국가에 헌납하는 계획이었다. 당시 법무장관 아리스티스 브리앙, 장차 외무장관과 국가수반이 될 폴 봉쿠르, 후일 대통령이 될 두 사람 폴 두메르, 레몽 프엥카레, 그리고 클레망소 등 거물급 인사들을 차례로 접촉했고 재무장관 역시 어느 정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무에는 첩첩한 난관이 남아 있었다, 무려 10여 개 부처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법안을 상정하여 상·하원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게다가 로댕 자신이 무관심해지기도 했다. 허물어지고만 클로 페이양 저택이 카미유 끌로델과 깊은 관계가 있다면 비롱관은 이 무렵 로댕의 주변에 돌연 나타난 드 슈와죌 공작부인과 깊은 관련이 있다. 팔레 르와얄 공원에서, 「앉아 있는 빅토르 위고」상 제막식을 할 때 이상하게도 「양키」 액센트가 심하게 섞인 말씨의 「여제자」로 로댕을 동반하면서 그녀는 처음 공석에 모습을 나타냈다. 로댕은 그를 「마담」이라고 불렀다.
미국 뉴욕에서 프랑스계 변호사로 널리 알려진 인사의 딸인 그녀는 루이 15세의 재상의 후손이지만 빈털터리인 슈와죌 공작과 결혼했다. 빈털터리일 뿐만 아니라 치유할 길이 없는 노름꾼인 남편은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자기 아내의 복잡한 남자관계에도 잘 적응했다.
당시 미국에서 로댕의 인기는 상승일로에 있었고 예술가의 「뮤즈」로 자처하는 슈와죌 부인은 상류사회의 폭넓은 지면을 활용할 수 있어 그야말로 로댕의 대리인으로서는 적임자였다. 그러나 전 작품을 국가에 바치겠다는 로댕의 미술관 계획은 이 야심 많은 뮤즈의 사업에는 큰 장애였다. 슈와죌 부인은 1909년부터 1912년 가을까지 비롱관의 절대적인 여주인으로 행세하면서 로댕으로 하여금 오직 비롱관에서만 기거하고 수십 년의 반려인 로즈를 뫼동의 아틀리에 버려 두도록 만들었다. 슈와죌 공작과 부인은 이렇게 하여 로댕과 그 주변사람들 사이를 철저하게 가로막았다. 「오직 당신한테 돈을 뜯어낼 생각만 하는 그런 사람들은 상대도 하지 마세요.」 이리하여 수십 년간 친구요 찬미자요 협조자였던 모든 사람들이 다 멀어져 갔다.
이런 괴이한 고립 가운데 3년이 흘러가고 마침내 1912년 10월, 로댕은 슈와죌 공작 부부를 비롱관에서 추방해버리고 나서 벨기에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로댕은 오랜 알코올 남용으로부터 깨어나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작업조수들과 일을 재개했다. 기나긴 외출에서 돌아오듯 그는 로즈에게로 돌아갔다. 「나의 착한 로즈, 그대를 내 곁에 두신 신의 선물이 얼마나 위대한가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 편지를 그대에게 보내요. 이것을 그대의 너그러운 가슴속에 담아두시오, 나는 화요일에 돌아가겠소. 그대의 친구, 오귀스트 로댕」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편지는 1913년 8월 24일 로댕이 로즈에게 보낸 것이다. 마침내 「로댕씨가 국가에 헌납하는 재산의 최종 인수에 관한 법안」은 1916년 9월 상원에서 치열한 논란 끝에 통과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하원을 통과함으로써 비롱관은 「로댕 미술관」으로 그 법적 지위를 획득했다. 로댕은 이 미술관에 대리석 작품 56점, 청동 작품 56점, 석고상 193점, 1백여 점의 테라코타, 2천 점이 넘는 스케치와 그림, 수백 점의 가치 있는 그리스·로마·고대 이집트 골동품, 그리고 고흐와 르느아르 등 거장들의 그림들을 기탁하면서 로즈가 살아있는 동안 국가가 연금을 지불한다는 조건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대통령 프엥카레는 로즈가 로댕과 정식 결혼한 부인이 아니므로 연금을 지불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반대했다. 해결책은 하나뿐이었다.
이리하여 1917년 1월29일, 77세의 백발노인 예술가 로댕은 1964년 24세 청년시절의 만나 53년간의 기나긴 생애를 함께 살아온 (카미유와 슈와죌 부인과 그외 많은 다른 여인들에도 불구하고) 로즈 뵈레와 뫼동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일차대전 중이어서 석탄도 때지 못하는 추운 날이었다. 결혼식을 마친 지 2주 후인 로즈와 로댕은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 국가는 연금을 지불한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로댕이 빚은 그녀의 반신상은 로댕 미술관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에 지금도 영원한 동반자의 모습으로 서 있다.(카미유 끌로델의 모습은 1층의 제6전시설, 슈와죌 부인의 모습은 제8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로즈가 죽은 지 10개월 후, 1917년 11월 24일 로댕도 77세의, 격동에 찬 생애를 마치고 파리근교의 뫼동 옛집의 뜰에 로즈와 함께 묻혔다. 그들의 무덤돌위에서 유명한 조각 「생각하는 사람」이 천근같은 무게로 생각에 잠겨있다.
로댕 미술관 로댕관
김화영 / 고려대 교수· 불문학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주불 한국 대사관은 파리의 북쪽 17지구의 빌리에 대로변에 있었다. 악명 높은 동백림 사건의 기억 때문인지 건물의 인상이 음산했었다. 그후 매우 다행스럽게도 대사관은 파리의 유서 깊은 지역으로 옮겨 앉게 되었다. 세느강 좌안의 이른바 『포브르 셍 제르맹』 거리에 당당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20세기 중엽 실존주의 작가들 때문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곳이 『셍 제르멩 데 프레』 거리요, 그곳의 카페 『되 마고』, 『플로르』 등이지만 그 지역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셍 제르멩 데 프레』 수도원이 있었다 하여 그 이름이 그렇게 전해내려 온 것이다. 『포브르셍 제르멩』이라면 바로 그 수도원이 있는 중심지 근방의 변두리 동네란 뜻이다. 이 동네가 크게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다.
당대의 귀족들과 부호들이 이 지역에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기 시작하면서 이곳의 면모는 전혀 달라졌다. 특히 거대한 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대문들부터가 행인들의 시선을 압도했다. 육중한 대문이 열리면 마차가 당도하는 넓은 뜰이 나타나고 뜰의 저 안쪽에 주인이 거처하는 건물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건물들 뒤쪽으로는 광대한 숲을 이루는 정원이 펼쳐진다. 이렇게 지어진 저택들의 문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파손되거나 굳게 닫혀버렸다. 그리고 소유주가 프랑스 정부나 외국대사관으로 바뀌었다. 포부르 셍 제르멩 거리가 다시금 황금시대를 맞는 것은 19세기 초엽, 왕정복고시대였다. 18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발자크의 『인간희극』에는 바로 이 거리의 대저택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유명한 소설 『고리오 영감』에서 시골의 몰락한 귀족가문의 아들 으젠 드 라스티냐크가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하여 찾아가는 먼 친척, 당시 파리의 귀족 사교계를 주름잡는 귀부인 드보쎄앙의 저택도 바로 포부르 셍 제르멩 구역의 그르넬 거리에 있다. 오늘날 주불 한국 대사관은 바로 그 그르넬 거리 12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드 보쎄앙 부인이 몽트리보 장군에게 실연한 슬픔을 못 이겨 노르망디로 은퇴하기 직전 그 장려하고도 서글픈 고별 무도회를 열었던 바로 그 저택을 대한민국 정부가 구입한 것일까 ? 그러나 보쎄앙 저택은 소설 속의 집일뿐이다.
이 동네의 자자한 명성도 루이 필립의 7월 왕조, 그리고 특히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과 더불어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세인들의 관심은 점차 샹젤리제 거리로 옮아갔다.
그러나 아직도 이 지역에 프랑스 정부의 청사들과 외국대사관이 밀집해 있다는 것은 바로 18세기와 왕정복고시대의 영화를 간접적으로 증언한다. 이 모든 기관들은 바로 광대한 대지 위에 대문, 뜰, 건물, 정원의 기본적 골격을 갖춘 옛날의 대저택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르넬 거리에만 해도 교육성, 보훈처, 공업성, 스위스 대사관이 등이 있다. 특히 이 거리의 명물로는 한국대사관 정문과 마주보는 프랑스 지리원 건물이다. 1722년에는 지어진 이 저택은 「느와르무티에 관」이었고, 20세기 초엽에는 프랑스군 총사령부였었다. 포슈 장군은 여기서 운명했다.
파리 한국대사관에 볼일이 있어 들르게 되는 여행자는 잠시 마음의 여유를 얻어 바로 이와 같은 동네의 유서 깊은 역사와 내력을 상기하면서 대사관의 대문과 뜰 현관과 건물, 그리고 다행히 기회가 주어진다면 건물 뒤쪽으로 펼쳐진 드넓은 뜰을 감상해 볼일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시간을 낼 수 있다면, 대사관의 대문에서 나서면서 왼쪽으로 불과 20여m 걸어나간 후 엥발리드 대로를 따라 다시 몇 걸음만 걸으면 나타나는 바렌느 거리의 첫 번째 저택 「비롱관」을 찾아가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여기가 유명한 조각가 로댕의 작품을 소장한 로댕 미술관이다. 한국대사관에서 불과 도보로 5분 남짓, 그리고 약 1시간이면 미켈란젤로 이후 최대의 조각가라는 이 대예술가의 작품들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다.
위대한 이 예술가의 작품들 못지 않게 우여곡절과 일화로 가득 찬 내력을 가진 것이 이 저택이다. 이 지역의 다른 많은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비롱관 역시 18세기에 지어졌다. 시골에서 가난뱅이로 상경하여 가발장사로 치부한 페랑크 드 모라스를 위하여 건축가 가브리엘과 오베르가 1731년에 완공한 건물이다. 이듬해 집주인이 사망하자 저택과 드넓은 땅은 뒤멘느 공작부인이 세내어 사용했고 1753년에는 튜울립 꽃을 미칠 듯이 사랑했던 비롱 원수의 소유로 넘어갔다. 비롱관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다. 대혁명 이후에는 교황의 총독인 카프라라 추기경이 거처하기도 했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뒤에는 예수의 성심수도회에서 경영하는 상류사회출신 소녀들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후일 나폴레옹 3세와 결혼하여 으제니 황후가 될 몽티죠 백작부인도 이곳에서 소녀시절 교육을 받았다.
1904년 정교분리가 이루어지자 수도회가 나가고 저택은 거의 버림받다시피 되었다. 명목상 국가의 소유로 변했고 국가를 대리한 청산인이 그 용도를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임시로 이 저택의 놀라운 분위기에 매혹된 예술가들이 세를 들어 쓰게 되었다. 오늘날 나폴레옹의 석관이 안치된 엥발리드의 돔이 바로 머리위로 바라다 보이는 파리의 한복판에서, 돌연 마주치게 되는 이 한가한 시골 같은 분위기와 균형 잡힌 성곽의 우아함-여기에 반하지 않을 예술가가 어디 있겠는가 ? 당시 젊은 문학청년이었던 장 콕토의 술회에 귀를 기울여보자.
『학교를 빼먹고 어슬렁거리던 어느 날 바렌느 거리에서 나는 그 길과 엥발리드 대로가 만나는 모퉁이에서 우연히 어떤 저택의 뜰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기에 수위한테 그 집안에 들어가 구경을 좀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비롱관이라 불리는 그 저택은 정교분리 이후 국가 청산인이 관리하는 동안 조각가 로댕이 건물의 몸체를 빌어 살고 있으며 나머지는 세를 놓는데, 따라 들어가 보겠다면 아직 사람이 들지 않은 방들을 보여주겠다는 대답이었다. 그중 어떤 것이 맘에 든다면 청산인 앞으로 신청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날 저녁으로 당장 나는 그 저택의 큰 방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수녀들이 경영하던 학교에서 춤과 음악을 가르치는 교실로 쓰던 방이었다). 싸구려 호텔 방을 한달 동안 빌리는 값 정도를 지불하고 나는 그 방을 1년 동안 쓰기로 계약한 것이었다.
건네 받은 커다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궁륭이 나타났고 궁륭은 정원으로 나 있었다. 정원인지 공원인지 채전인지 알 수도 없는 그런 숲이었다. 사춘기 특유의 아무 것도 모르는 눈으로 보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아니 그래 파리가 이 같은 침묵의 섬을 에워싼 채 살아서 걸어다니고 있었더란 말인가 ? 침묵이란 소음과 대조를 통해서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라 지만 그래도 그곳의 침묵에는 정말이지 압도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침묵은 귀를 잠재우고 오직 눈으로만 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풀과 나무들에서 솟아 나와서 그 침묵은 습관의 힘에 의하여 한 도시의 떠들썩한 소음을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침묵은 바로 버림받은 정원의 특권이었다. 이를테면 그 저택이야말로 '침묵의 장관'이라 할만한 것이었다. 따분한 되풀이에 지친 귀를 대신하여 결국은 눈으로 듣기에 이르는 특이한 현상인 것이다. 파리에서 수천 리나 떨어진 시골에 와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돌연 나를 가득한 침묵 속으로 던져 넣는 것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잔해가 쌓여 있고 들장미가 향기를 뿜으면서 모래와 잡초의 둥근 골짜기에 뒤엉켜 있었다. 엉겅퀴와 나뭇가지들이 뒤덮이지 않은 유일한 곳이었다. 다른 데는 걷잡을 수 없도록 무질서하게 자란 식물들이 작은 처녀림을 이루고 있었다. 이끼가 돋아난 계단들, 녹색유리창이 난 건물의 정면, 해시계가 그 모든 무질서의 풍경을 굽어보고 있었다. 반면 내방의 창문 겸 출입문들은 융단처럼 빽빽하게 자란 물망초들 때문에 열리지 않았고 그 앞으로는 그야말로 초목의 터널들이었다.』 시인 장 콕토는 이처럼 대조각가 로댕이 느꼈을 이 저택의 인상을 오히려 더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다.
비롱 저택이 정부관리로 넘어가 임시로 세를 놓게 되자 그곳으로 가장 먼저 들어가 살게된 사람은 여류 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였다. 그 여자는 후일 『두이노의 연가』나 『말테의 수기』로 널리 알려진 오스트리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부인이었다. 릴케는 빈의 어느 출판업자의 청을 받아 로댕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하여 파리로 왔다가, 서투른 프랑스말 실력에도 불구하고 1905년 9월부터 로댕의 비서로 채용되어 뫼동에 있는 이 조각가와 함께 살았었다. 그러나 작업으로 피곤해진 로댕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어 이듬해 5월, 시인 자신의 표현을 빌리건대 '도둑질한 하인처럼' 쫓겨나고 말았었다. 그러나 로댕에 대한 열렬한 찬미자였던 리께는 원한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아내 덕분에 이 비롱관을 발견하자 이 저택이야말로 로댕에게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즉시 그에게 연락을 했다.
그로부터 약 20년 전인 1889년, 로댕은 산책을 하다가 이탈리아 대로변, 클로 페이양에서 우연히 다 낡은 저택을 하나 발견했었다. 「라폴리 뇌부르」라는 버림받은 장원이었는데 나폴레옹의 시의였던 코르비자르, 나중에는 죠르쥬 상드와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가 들어 살았던 집이다. 이 집은 그리하여 로댕과 그의 아름다운 제자요 정부였던 카미유 클로델이 은밀하게 숨겨둔 채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거처가 되었었다. 1895년 건물이 붕괴위험에 직면하자 로댕은 그곳을 떠나 뫼농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든 아틀리에들 가운데서 그가 가장 떠나기를 아쉬워했던 곳이다. 카미유의 추억이 서린 곳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8세기의 아름다운 건물을 애호했던 로댕에게 비롱관은 바로 무너져버린 「클로 페이양」을 고상하게 승격시키고 더욱 크게 확대해 놓은 그같은 장원이었다.
즉각적으로 결정이 내려졌다. 이제 스무 살 남짓한 학생 장 콕토가 그렇게 손쉽게 빌릴 수 있는 집이라면 당대 최대의 예술가요 옥스퍼드 대학의 명예박사인 68세의 로댕에겐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방대한 비롱관의 1층 전체를 1년간 세내는데 불과 5900프랑이었다. 이리하여 1908년이래 지금까지 줄곧 비롱관은 부분적으로건 전체적으로건 「로댕의 집」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비롱관에 들어있던 사람은 로댕, 클라라 베스토프, 릴케, 콕코만이 아니었다. 유명한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이 이 집에 무용교실을 열고 있었고 젊은 화가 마티스도 여기서 살았다. 반면 카페에서 노래하는 통속가수 잔느 블로크까지 으제니 황후가 드나들었던 이 집에 들어 산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더군다나 비극 배우 에두아르 막스(예명 드 막스)는 저택 안의 옛 예배당에 들어 살면서 남색행각을 일삼았다 하여 대예술가 로댕의 복잡한 여자관계와 아울러 도덕군자들에겐 지탄의 대상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저택의 관리를 맡은 청산인은 이 같은 여론을 빌미 삼아 건물을 철거하고 건물 및 정원이 차지하고 있는 4만3천㎡의 광대한 땅을 45개의 필지로 쪼개어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재정적인 시각에서만 본다면 이것은 분명 현명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롱관에는 로댕이 들어앉아 있었다. 예술가의 친구들이 발벗고 나서서 항의했고 청년 콕토 역시 신문사의 친구들을 동원하여 여론형성에 분주했다. 이리하여 우선 18개월의 전세계약을 다시 맺은 로댕은 비롱관을 손에 넣을 계획을 세웠다. 돈으로 매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작품, 수집품 기타 소장품들과 함께 자신의 미술관을 만들어 국가에 헌납하는 계획이었다. 당시 법무장관 아리스티스 브리앙, 장차 외무장관과 국가수반이 될 폴 봉쿠르, 후일 대통령이 될 두 사람 폴 두메르, 레몽 프엥카레, 그리고 클레망소 등 거물급 인사들을 차례로 접촉했고 재무장관 역시 어느 정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무에는 첩첩한 난관이 남아 있었다, 무려 10여 개 부처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법안을 상정하여 상·하원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게다가 로댕 자신이 무관심해지기도 했다. 허물어지고만 클로 페이양 저택이 카미유 끌로델과 깊은 관계가 있다면 비롱관은 이 무렵 로댕의 주변에 돌연 나타난 드 슈와죌 공작부인과 깊은 관련이 있다. 팔레 르와얄 공원에서, 「앉아 있는 빅토르 위고」상 제막식을 할 때 이상하게도 「양키」 액센트가 심하게 섞인 말씨의 「여제자」로 로댕을 동반하면서 그녀는 처음 공석에 모습을 나타냈다. 로댕은 그를 「마담」이라고 불렀다.
미국 뉴욕에서 프랑스계 변호사로 널리 알려진 인사의 딸인 그녀는 루이 15세의 재상의 후손이지만 빈털터리인 슈와죌 공작과 결혼했다. 빈털터리일 뿐만 아니라 치유할 길이 없는 노름꾼인 남편은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자기 아내의 복잡한 남자관계에도 잘 적응했다.
당시 미국에서 로댕의 인기는 상승일로에 있었고 예술가의 「뮤즈」로 자처하는 슈와죌 부인은 상류사회의 폭넓은 지면을 활용할 수 있어 그야말로 로댕의 대리인으로서는 적임자였다. 그러나 전 작품을 국가에 바치겠다는 로댕의 미술관 계획은 이 야심 많은 뮤즈의 사업에는 큰 장애였다. 슈와죌 부인은 1909년부터 1912년 가을까지 비롱관의 절대적인 여주인으로 행세하면서 로댕으로 하여금 오직 비롱관에서만 기거하고 수십 년의 반려인 로즈를 뫼동의 아틀리에 버려 두도록 만들었다. 슈와죌 공작과 부인은 이렇게 하여 로댕과 그 주변사람들 사이를 철저하게 가로막았다. 「오직 당신한테 돈을 뜯어낼 생각만 하는 그런 사람들은 상대도 하지 마세요.」 이리하여 수십 년간 친구요 찬미자요 협조자였던 모든 사람들이 다 멀어져 갔다.
이런 괴이한 고립 가운데 3년이 흘러가고 마침내 1912년 10월, 로댕은 슈와죌 공작 부부를 비롱관에서 추방해버리고 나서 벨기에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로댕은 오랜 알코올 남용으로부터 깨어나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작업조수들과 일을 재개했다. 기나긴 외출에서 돌아오듯 그는 로즈에게로 돌아갔다. 「나의 착한 로즈, 그대를 내 곁에 두신 신의 선물이 얼마나 위대한가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 편지를 그대에게 보내요. 이것을 그대의 너그러운 가슴속에 담아두시오, 나는 화요일에 돌아가겠소. 그대의 친구, 오귀스트 로댕」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편지는 1913년 8월 24일 로댕이 로즈에게 보낸 것이다. 마침내 「로댕씨가 국가에 헌납하는 재산의 최종 인수에 관한 법안」은 1916년 9월 상원에서 치열한 논란 끝에 통과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하원을 통과함으로써 비롱관은 「로댕 미술관」으로 그 법적 지위를 획득했다. 로댕은 이 미술관에 대리석 작품 56점, 청동 작품 56점, 석고상 193점, 1백여 점의 테라코타, 2천 점이 넘는 스케치와 그림, 수백 점의 가치 있는 그리스·로마·고대 이집트 골동품, 그리고 고흐와 르느아르 등 거장들의 그림들을 기탁하면서 로즈가 살아있는 동안 국가가 연금을 지불한다는 조건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대통령 프엥카레는 로즈가 로댕과 정식 결혼한 부인이 아니므로 연금을 지불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반대했다. 해결책은 하나뿐이었다.
이리하여 1917년 1월29일, 77세의 백발노인 예술가 로댕은 1964년 24세 청년시절의 만나 53년간의 기나긴 생애를 함께 살아온 (카미유와 슈와죌 부인과 그외 많은 다른 여인들에도 불구하고) 로즈 뵈레와 뫼동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일차대전 중이어서 석탄도 때지 못하는 추운 날이었다. 결혼식을 마친 지 2주 후인 로즈와 로댕은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 국가는 연금을 지불한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로댕이 빚은 그녀의 반신상은 로댕 미술관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에 지금도 영원한 동반자의 모습으로 서 있다.(카미유 끌로델의 모습은 1층의 제6전시설, 슈와죌 부인의 모습은 제8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로즈가 죽은 지 10개월 후, 1917년 11월 24일 로댕도 77세의, 격동에 찬 생애를 마치고 파리근교의 뫼동 옛집의 뜰에 로즈와 함께 묻혔다. 그들의 무덤돌위에서 유명한 조각 「생각하는 사람」이 천근같은 무게로 생각에 잠겨있다.
2008.02.01 11:54:37 (*.58.64.240)
은희야~~!!!
예술을 두루 섭렵한 회장덕분에
모든 장르의 예술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게해주어 고맙구나.^^*
세계적으로 로댕의 작품은
파리로댕미술관, 필라델피아로댕미술관, 도쿄국립서양미술관에 전시되어있는데
운이 좋게 필라델피아 딸네 집 옆에 "로댕미술관"이 있어
손녀딸 손잡고 노래부르며
아름드리 나무숲을 가로질러 걸어가곤 했던 기억의 조각이
이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구나....
미술관입구에 "단테"의 "신곡"을 주제로 하여 조각한 "지옥의 문"엔
189명의 인물이 조각되어 있고
그 문을 통해 전시관으로 들어서면
"로댕" 일생일대의 작품들이 총망라되어있어 자주 찾곤 했지....
전시장앞 마당에 대형으로 전시된 "로댕"의 유명한 조각
"생각하는 사람"을 보고 다섯살 꼬마가
"할머니~!!! 저 사람은 왜 쌔드(sad)해요?" 하고 물어서
순간적으로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하고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그 어린 꼬마 마음에도 분명 "생각하는 사람"은 슬퍼보였나보다 *^^*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데 연속되는 갈등의 고리를 끊지못하고.....
그들의 번민과 고뇌의 결정체를
후대의 우리는 좋은 작품으로 감상하며
마음밭을 기름지게 가꿀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깊이 감동받을 수 있는 호사를 누려
행복하고 감사할 뿐이구나^*^
예술을 두루 섭렵한 회장덕분에
모든 장르의 예술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게해주어 고맙구나.^^*
세계적으로 로댕의 작품은
파리로댕미술관, 필라델피아로댕미술관, 도쿄국립서양미술관에 전시되어있는데
운이 좋게 필라델피아 딸네 집 옆에 "로댕미술관"이 있어
손녀딸 손잡고 노래부르며
아름드리 나무숲을 가로질러 걸어가곤 했던 기억의 조각이
이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구나....
미술관입구에 "단테"의 "신곡"을 주제로 하여 조각한 "지옥의 문"엔
189명의 인물이 조각되어 있고
그 문을 통해 전시관으로 들어서면
"로댕" 일생일대의 작품들이 총망라되어있어 자주 찾곤 했지....
전시장앞 마당에 대형으로 전시된 "로댕"의 유명한 조각
"생각하는 사람"을 보고 다섯살 꼬마가
"할머니~!!! 저 사람은 왜 쌔드(sad)해요?" 하고 물어서
순간적으로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하고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그 어린 꼬마 마음에도 분명 "생각하는 사람"은 슬퍼보였나보다 *^^*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데 연속되는 갈등의 고리를 끊지못하고.....
그들의 번민과 고뇌의 결정체를
후대의 우리는 좋은 작품으로 감상하며
마음밭을 기름지게 가꿀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깊이 감동받을 수 있는 호사를 누려
행복하고 감사할 뿐이구나^*^
2008.02.01 23:30:15 (*.222.111.146)
금순아~
딸을 잘 두어서 손녀와 숲속도 거닐고
로뎅 박물관도 관람했으니.....사람 평생에 좋았던일 중
한 부분이지 않겠나.........싶구나.
몇번 가본 유럽여행이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필름 들여다 본것만도 못하네.
무엇하러 여행이랍시고 휘 돌아 다니고 왔는지몰러.
지금부터라도 운이 따른다면........다르게 하고싶구나.
집에 칩거해 있으니 육신이 답답해지고
생각도 왔다갔다 한다만서도
그래도 무언가 만들어서라도 보내려하곤 있다.
두서없이 이것저것 하고있는데 ...........
내가 섭렵씩이나 했겄냐....서당개 삼년이나 되려나 그것도 아닐수도있고,
그래서 핑계낌에
올 한해는 꼭 결단을 내서 탈출에 기회를 만들려고
작심을 한단다.
영광의 탈출이 될지.....그 반대가 될지는 몰라도...ㅎㅎㅎ...
로뎅의 관한 내용을 올린것은
누군가에게 편지쓰듯 한것인데
금순이가 행복하다면 더불어 반갑구나.
딸을 잘 두어서 손녀와 숲속도 거닐고
로뎅 박물관도 관람했으니.....사람 평생에 좋았던일 중
한 부분이지 않겠나.........싶구나.
몇번 가본 유럽여행이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필름 들여다 본것만도 못하네.
무엇하러 여행이랍시고 휘 돌아 다니고 왔는지몰러.
지금부터라도 운이 따른다면........다르게 하고싶구나.
집에 칩거해 있으니 육신이 답답해지고
생각도 왔다갔다 한다만서도
그래도 무언가 만들어서라도 보내려하곤 있다.
두서없이 이것저것 하고있는데 ...........
내가 섭렵씩이나 했겄냐....서당개 삼년이나 되려나 그것도 아닐수도있고,
그래서 핑계낌에
올 한해는 꼭 결단을 내서 탈출에 기회를 만들려고
작심을 한단다.
영광의 탈출이 될지.....그 반대가 될지는 몰라도...ㅎㅎㅎ...
로뎅의 관한 내용을 올린것은
누군가에게 편지쓰듯 한것인데
금순이가 행복하다면 더불어 반갑구나.
2008.02.01 23:52:32 (*.222.111.146)
로뎅박물관에 까미유 끌로델방이 함께있다하니
그녀의 작품도 찾아와보았답니다.
오늘 자정가까이까지
이 로댕의 마블 작품 몇개 때문에
넋을 놓기를 시간여...............
무슨 말이 필요가 있겠읍니까
그중에서도......(신의 손)
그녀의 작품도 찾아와보았답니다.
|
오늘 자정가까이까지
이 로댕의 마블 작품 몇개 때문에
넋을 놓기를 시간여...............
무슨 말이 필요가 있겠읍니까
그중에서도......(신의 손)
2008.02.03 06:22:28 (*.58.64.242)
은희야~~!!!
혼줄이 다 빠져나가도록 가슴 져린 작품이다.
차디 찬 돌덩이가
이토록 따스한 온기의 생명력을 품고
살아 움직임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니.....
"놀랍다"는 표현은 너무 얄팍한 것 같구나..
네가 넋을 놓을 수 밖에 없겠구나....
아무 말 없이 그냥
잡아보고 싶다....
영원히 놓고 싶지 않을 것 같다.........
혼줄이 다 빠져나가도록 가슴 져린 작품이다.
차디 찬 돌덩이가
이토록 따스한 온기의 생명력을 품고
살아 움직임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니.....
"놀랍다"는 표현은 너무 얄팍한 것 같구나..
네가 넋을 놓을 수 밖에 없겠구나....
아무 말 없이 그냥
잡아보고 싶다....
영원히 놓고 싶지 않을 것 같다.........
2008.02.03 12:07:59 (*.222.111.146)
사진의 매력을 알려준 고마운 이가 있는데..........
특히 조각작품에서
사진을 찍을때 각도에 따라서
조명에 따라서
피사체의 표정이 다르게 나타남을
로댕의 마블작품(특히 거대하지않은 작품일 수록)에서도
볼 수가 있네...........같은 작품인데도 말이지......
실제의 작품을 대 할때의 느낌은 또 다르겠지만
사진으로 다시 재 탄생할 수도 있음에
사진 예술의 매력에 한숨이 나오더라.
사오년전인가 중국 황산에 가서 꼭두 새벽 네시에
일출맞을 좋은위치를 잡으러 부지런을떨며 나갔는데
중국 그 넓고넓은 나라 황산이라는곳에서
시상에나 바로위 형부를 만난것 아니냐........새벽 네시에
후레쉬불빛에 겨우 앞만보면서 서로 조심하라고 소곤거리며 하는 말소리를 듣고
어디에선가 또 작은소리로
"어이....거기 정웅네 아닌가..." 바위틈 어디에선가 가까운곳에서
속삭이듯 들려오는소리..."오메나 여긴 분명 중국하고도 황산임에 분명한데"
했다는거 아니더냐.
바로위 형부가 대기업에서 은퇴하시고 난후
삼년간 사진에 빠져 계시다는건 알았지만서도
그곳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단다.
황산일출을 찍으려고 며칠 새벽을 그렇게 바위틈 비좁은 공간을
잘 확보하려고 잠도 안자면서 순간을 기다리셨다고 하더라.
드디어 작가 반열에 이름을내고 책자도 만들고 작품전도 열고
마지막 인생에 여력을 쏟아붓고 있더구나.
지금은 육십중반이 넘어선 나이에 베트남 정부 국영기업체에 스카웃 되어서
베트남의 큰배 만드는 최초의 한국인 이며 외국인이 되어가지고선
그 정열을 그곳에서 배만드는것만 생각하시고 어쩌려나싶단다.
결론은 예술이든 직업이든 몰입해서 할 수 있는 시간이
인간삶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 아닌가 싶구나.
특히 조각작품에서
사진을 찍을때 각도에 따라서
조명에 따라서
피사체의 표정이 다르게 나타남을
로댕의 마블작품(특히 거대하지않은 작품일 수록)에서도
볼 수가 있네...........같은 작품인데도 말이지......
실제의 작품을 대 할때의 느낌은 또 다르겠지만
사진으로 다시 재 탄생할 수도 있음에
사진 예술의 매력에 한숨이 나오더라.
사오년전인가 중국 황산에 가서 꼭두 새벽 네시에
일출맞을 좋은위치를 잡으러 부지런을떨며 나갔는데
중국 그 넓고넓은 나라 황산이라는곳에서
시상에나 바로위 형부를 만난것 아니냐........새벽 네시에
후레쉬불빛에 겨우 앞만보면서 서로 조심하라고 소곤거리며 하는 말소리를 듣고
어디에선가 또 작은소리로
"어이....거기 정웅네 아닌가..." 바위틈 어디에선가 가까운곳에서
속삭이듯 들려오는소리..."오메나 여긴 분명 중국하고도 황산임에 분명한데"
했다는거 아니더냐.
바로위 형부가 대기업에서 은퇴하시고 난후
삼년간 사진에 빠져 계시다는건 알았지만서도
그곳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단다.
황산일출을 찍으려고 며칠 새벽을 그렇게 바위틈 비좁은 공간을
잘 확보하려고 잠도 안자면서 순간을 기다리셨다고 하더라.
드디어 작가 반열에 이름을내고 책자도 만들고 작품전도 열고
마지막 인생에 여력을 쏟아붓고 있더구나.
지금은 육십중반이 넘어선 나이에 베트남 정부 국영기업체에 스카웃 되어서
베트남의 큰배 만드는 최초의 한국인 이며 외국인이 되어가지고선
그 정열을 그곳에서 배만드는것만 생각하시고 어쩌려나싶단다.
결론은 예술이든 직업이든 몰입해서 할 수 있는 시간이
인간삶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 아닌가 싶구나.
2008.02.03 23:30:19 (*.222.111.146)
다나이드를 여러각도에서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원래 작품의 가까운 대리석작품의 색은 맨위에 사진이라고합니다.
여러곳에서 같은작품이라도 수많이 보았고 그중 가져올수 있는곳에서
옮겨와 봅니다.
다나이드란 제목은 그리스 신화의 에피소드에서 따온것으로
다나이드란 "다나오스의 딸" 이란 의미라 합니다.
아르고스의 왕이였던 다나오스는 자신의 사위들에 의해 멸망된다는
신탁을 받게되어, 자신의 50명의 딸들과 이집트의 왕 아이굽터스의
50명의 아들들과 혼례한날 밤에 딸들을 시켜 남편들을 죽이게했는데
그중 한명만 빼고 모두 49명의 딸들이 남편들을 살해 했다고 합니다.
그 죄로 저승에서 항아리에 물을담아 구멍뚫린 독에 물을 붓는
영겁의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상은 작품설명을 실은곳에서 간추려 봤습니다.
실제의 인물인 까미유를 모델로 한 작품이라
벌을받는 여인이라고 보기보단 관능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이
더 돋보이는 작품이라고봅니다.
원래 작품의 가까운 대리석작품의 색은 맨위에 사진이라고합니다.
여러곳에서 같은작품이라도 수많이 보았고 그중 가져올수 있는곳에서
옮겨와 봅니다.
다나이드란 제목은 그리스 신화의 에피소드에서 따온것으로
다나이드란 "다나오스의 딸" 이란 의미라 합니다.
아르고스의 왕이였던 다나오스는 자신의 사위들에 의해 멸망된다는
신탁을 받게되어, 자신의 50명의 딸들과 이집트의 왕 아이굽터스의
50명의 아들들과 혼례한날 밤에 딸들을 시켜 남편들을 죽이게했는데
그중 한명만 빼고 모두 49명의 딸들이 남편들을 살해 했다고 합니다.
그 죄로 저승에서 항아리에 물을담아 구멍뚫린 독에 물을 붓는
영겁의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상은 작품설명을 실은곳에서 간추려 봤습니다.
실제의 인물인 까미유를 모델로 한 작품이라
벌을받는 여인이라고 보기보단 관능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이
더 돋보이는 작품이라고봅니다.
2008.02.04 06:19:11 (*.58.64.165)
은희야~~!!!
인간의 최종 추구점이 "예술과 종교" 라고 한다지?
어린 날 부터 일찌감치 인생의 최종점에 다다른
너의 가족은 모두 축복받은 유전인자로구나....
더구나 형부까지도 사진에 심취하셔서
아마츄어를 떠나 프로의 영역에 진입하셨다니.....
그 머나먼 낯선 땅에서 예정에 없이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충격!!!
놀라워라~~~!!!
나도 하와이에서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너무 반갑고 놀라웠고.....
세상에나.....!!! 어떻게, 바로 이 시간에, 바로 여기서, 이렇게.......^^
너도 순간 엄청 놀랐겠다.
그 시간에 그 곳에서 형부를 만나다니....^^*
아마 꼭 만나야될 사람은 언제 어디서라도 어떻게든 만나지나보다,,
우주의 에너지는 너무 섬세하고 정확해서
"끌림의 법칙"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실현하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길가다 만나고 스치는 모든 인연도
"끌림의 법칙"에 의해 내가 끌어온 것은 아닐까?
아니면 상대가 나를 끌어 온 것일까?...
어느 만남도 소홀히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마른 나뭇가지에 물 오르듯~~~
마른 작설잎 기지개 켜듯~~~
메마른 내 영혼을 일깨워 기지개 켜고 물 오르게 해야겠다...*^^*
인간의 최종 추구점이 "예술과 종교" 라고 한다지?
어린 날 부터 일찌감치 인생의 최종점에 다다른
너의 가족은 모두 축복받은 유전인자로구나....
더구나 형부까지도 사진에 심취하셔서
아마츄어를 떠나 프로의 영역에 진입하셨다니.....
그 머나먼 낯선 땅에서 예정에 없이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충격!!!
놀라워라~~~!!!
나도 하와이에서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너무 반갑고 놀라웠고.....
세상에나.....!!! 어떻게, 바로 이 시간에, 바로 여기서, 이렇게.......^^
너도 순간 엄청 놀랐겠다.
그 시간에 그 곳에서 형부를 만나다니....^^*
아마 꼭 만나야될 사람은 언제 어디서라도 어떻게든 만나지나보다,,
우주의 에너지는 너무 섬세하고 정확해서
"끌림의 법칙"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실현하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길가다 만나고 스치는 모든 인연도
"끌림의 법칙"에 의해 내가 끌어온 것은 아닐까?
아니면 상대가 나를 끌어 온 것일까?...
어느 만남도 소홀히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마른 나뭇가지에 물 오르듯~~~
마른 작설잎 기지개 켜듯~~~
메마른 내 영혼을 일깨워 기지개 켜고 물 오르게 해야겠다...*^^*
2008.02.04 10:48:30 (*.222.111.146)
아무도 모르는 우리 친정오라비를 네가 안다고 했을때부터
전화통화때도 구어체보다 문어체를 구사하는
몇번도 아닌 잠깐의 대화로도 잊을 수 없는 존재
"문어체 당신친구" 로 더 통하는 그대 금순아~
기대가된다 .
여태까지 잠자고있던 너의 모든것이 어찌 풀려 나올지
기대 해도 되겠지?
전화통화때도 구어체보다 문어체를 구사하는
몇번도 아닌 잠깐의 대화로도 잊을 수 없는 존재
"문어체 당신친구" 로 더 통하는 그대 금순아~
기대가된다 .
여태까지 잠자고있던 너의 모든것이 어찌 풀려 나올지
기대 해도 되겠지?
2008.02.04 11:46:32 (*.222.111.146)
코가부러진 사나이
로댕의 초기작품이며 가난한시절
작업실 추위때문에 작품머리부분이 파손되어
마스크로 만들었었고 후에 다시 작업을해서
재탄생 시켰다고합니다
2008.02.05 10:41:40 (*.37.156.76)
은희언니,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끌로델의 아름답지만 어리숙해 보이는, 비범을 감춘듯한 모습,
'사쿤탈라'의 위가 여잔가? 아래가 여잔가? 특징을 보고서 겨우 알아냄.
어린 소녀 샤틀레느를 보며 재질이 뭔가? 유리인가? 할 정도로 고광택의 조각품,
"왈츠'의 춤은 춤사위로 보이지 않고,
사랑하면서 같이 하지 못함, 정신병동, 동생과의 마지막 만남,
또,
형부의 언니와의 너무도 인연스러운 만남,
은희언니,
말 끝을 못 맺겠어요.
슬프디 슬픈 이야기에요.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끌로델의 아름답지만 어리숙해 보이는, 비범을 감춘듯한 모습,
'사쿤탈라'의 위가 여잔가? 아래가 여잔가? 특징을 보고서 겨우 알아냄.
어린 소녀 샤틀레느를 보며 재질이 뭔가? 유리인가? 할 정도로 고광택의 조각품,
"왈츠'의 춤은 춤사위로 보이지 않고,
사랑하면서 같이 하지 못함, 정신병동, 동생과의 마지막 만남,
또,
형부의 언니와의 너무도 인연스러운 만남,
은희언니,
말 끝을 못 맺겠어요.
슬프디 슬픈 이야기에요.
2008.02.05 11:51:15 (*.222.111.146)
광희여~
이 배경음악 비탈리의 샤콘느 G단조 또한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 이라고 하는데
요즈음 가장 평범한 일상속에서 평화롭지만
슬픔을 아주 가까이 친구로 삼아 이것저것 골라 친구하고있다네.
기쁨과 슬픔.........무엇이 기쁨이고 또 무엇이 슬픔이련가
깊은 슬픔속에서 기쁨을 볼 수 있다면야.......
이 배경음악 비탈리의 샤콘느 G단조 또한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 이라고 하는데
요즈음 가장 평범한 일상속에서 평화롭지만
슬픔을 아주 가까이 친구로 삼아 이것저것 골라 친구하고있다네.
기쁨과 슬픔.........무엇이 기쁨이고 또 무엇이 슬픔이련가
깊은 슬픔속에서 기쁨을 볼 수 있다면야.......
2008.02.05 12:28:34 (*.222.111.146)
사쿤달라 작품사진을 몇장 모아두었는데
좀 큰사진을 올리면 .....위에 그녀가 또렷하기에
힌두교 전설속에 사쿤달라는
마술에 걸려 눈멀고 말못하는 그녀가
남편과의 재회하는 모습이라는데...........
이작품으로 까미유는 불란서 예술가 살롱전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받았다고 합니다.
좀 큰사진을 올리면 .....위에 그녀가 또렷하기에
힌두교 전설속에 사쿤달라는
마술에 걸려 눈멀고 말못하는 그녀가
남편과의 재회하는 모습이라는데...........
이작품으로 까미유는 불란서 예술가 살롱전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받았다고 합니다.
2008.02.05 12:48:29 (*.222.111.146)
[ 키스 (1886) ]
이제 나는 몸을 빼려 한다
사랑으로부터, 세상의 비웃음으로부터
사랑하는 폴, 일찌기 너를 따라 중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내겐 건너지지 않는 바다 하나 너무 깊었다
이제 혼자서 노를 저을 수 있겠다
로뎅이란 바다를 건널 수 있겠다
폴, 나를 재촉하는 인어의 금빛 풀루트 소리 들리는가
저 황홀한 빛,
꿈 하나를 깨는 데 일생이 걸렸구나
지지 않는 햇살 같은 바다의 쪽빛 명성을 위해서
나는 죽어서도 더 불행해야 한다
로즈는 내 삶의 터전이오 그..녀..를..외..면..할.. 수..는..
로댕의 목소리는 나를 할퀴며 자라는 겁없는 손톱이었다
밤마다 깨어지며 덮치는 조각상들, 초인종은 울리지 않고
작업실 거미들은 탄성좋은 타액으로 나를 엮었다
그의 등을 향한 날들의 혼미한 정신
찢긴 팔다리 타고 올라 나의 뇌수를 뽑아내던 잔혹한 그리움의 대롱
맨발의 거리를 헤매도 바다는 끝내 내 발바닥 적셔주지 않았다
아, 일몰에 젖은 사람들의 눈빛이 나를 찢어발기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폴 네가 맞은편에 서 있기도 했던가
배에 올라야 할 시간이다, 사랑하는 폴
파도 위 바람처럼 가벼워지는구나
너무 무거웠던 짐, 때가 되면 스스로 떠나지는 것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다른 사랑, 이제서야
고모는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에 있었다,
라고 말 할 조카들의 병아리 같은 입
훗날이 미안할 뿐이다.
까미유 끌로델........
까미유의 사쿤달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도하고
도용했다고도해서 설왕설래 말이 많은 작품 ....로댕의 키쓰..
로댕의 지옥의 문을 같이 작업하면서
어찌 그녀의 천재적인 솜씨가 로댕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는가.
우리는 그저 아름다운 예술가로서의 그들의 작품을 보고
기쁨과 슬픔의 느낌을 맛보면서........감탄하고.....행복하니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미쳐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종말을 꼭 불행이라는 잣대로만 볼것도 아닌것 같은데..........
2008.02.05 14:23:04 (*.133.164.174)
이제 나는 몸을 빼려한다....
이 한줄의 글을 읽는데 왜 눈시울이 뜨거워 질까요?
살았다고 설쳐도 산것이 아닌것 같은 맘이 들땐 왜 그럴까요?
언니들의 도란도란 속에서 괜히 응석한번 부려 봤습니다.(:o)
이 한줄의 글을 읽는데 왜 눈시울이 뜨거워 질까요?
살았다고 설쳐도 산것이 아닌것 같은 맘이 들땐 왜 그럴까요?
언니들의 도란도란 속에서 괜히 응석한번 부려 봤습니다.(:o)
2008.02.06 10:43:04 (*.222.111.146)
순호대장~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어느 형태를 지니고있든
우리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그 외에 모든 만물만상이
그리할것같다오.
우리는 한치앞도 벌어질일을 모르는 인간군상.....유한한 삶이니
종교를 갖는것이 아닐까?
항상 떨쳐일어나는 순호의 깊은마음을 조금은 알지요.
광희~
참말로...........
무언가 마음이 동해서 이것저것 찾아다니다 보면
알아야 할 것이 줄달아 나오니 숨차다네
사쿤달라가 신화에서 유래했다해서 쫓아가보니
인도의 전시대의 걸쳐 가장 위대하다는 작가 칼리다사가 나오고
그가 산스크리트의 시인이자 극작가이고
그가 쓴 〈아비지냐나샤쿤탈라 Abhijñnaakuntala〉('샤쿤탈라의 앎'),등
여섯개의 유명한 작품이 있는데
그것을 대략 볼라해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 싶고
이곳 저곳에 비슷하게 올려진 유럽판 사쿤달라의 내용도
원작과는 좀 다른 내용이고해서........
또 칼리다사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종교를 이해하고
<마하바라타>를 조금이라도 읽어봐야 쓰겠으니
한 예술가를 찾아다니다보면 예술전반의 통하지 않은 분야가 없으니
증말로다 숨차다오.
그래도 두산타왕과 성자 칸바의 딸 사쿤달라를 찾아
까미유가 나타내고자 했던 슬픔을 가까이 느끼고는 싶으니.........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어느 형태를 지니고있든
우리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그 외에 모든 만물만상이
그리할것같다오.
우리는 한치앞도 벌어질일을 모르는 인간군상.....유한한 삶이니
종교를 갖는것이 아닐까?
항상 떨쳐일어나는 순호의 깊은마음을 조금은 알지요.
광희~
참말로...........
무언가 마음이 동해서 이것저것 찾아다니다 보면
알아야 할 것이 줄달아 나오니 숨차다네
사쿤달라가 신화에서 유래했다해서 쫓아가보니
인도의 전시대의 걸쳐 가장 위대하다는 작가 칼리다사가 나오고
그가 산스크리트의 시인이자 극작가이고
그가 쓴 〈아비지냐나샤쿤탈라 Abhijñnaakuntala〉('샤쿤탈라의 앎'),등
여섯개의 유명한 작품이 있는데
그것을 대략 볼라해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 싶고
이곳 저곳에 비슷하게 올려진 유럽판 사쿤달라의 내용도
원작과는 좀 다른 내용이고해서........
또 칼리다사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종교를 이해하고
<마하바라타>를 조금이라도 읽어봐야 쓰겠으니
한 예술가를 찾아다니다보면 예술전반의 통하지 않은 분야가 없으니
증말로다 숨차다오.
그래도 두산타왕과 성자 칸바의 딸 사쿤달라를 찾아
까미유가 나타내고자 했던 슬픔을 가까이 느끼고는 싶으니.........
2008.02.09 23:36:37 (*.222.111.146)
옛날 옛적 벼르고 별러 한양 구경길에 나서듯
오랜만에 시아버님 제사지내려 다니러온 시누 수녀님
데려다 줄겸 ......바깥바람 쐬라고 ...나선김에
고호전도 다녀왔읍니다.
........에그머니나.....인산인해......되돌아설가하다
그 브이아이핀가 하는 초대권으로해서 줄서지않고 들어가는바람에
정신없이 사람에 치이면서도 용케 볼 수가 있었지요.
삼월달 끝나기전 아주 일찍암치 서둘러 다시 가볼양 입니다.
몇작품은 기대치 이상이었거든요.....행복했답니다.
얼마전 보내준 로댕의 작품사진을 보고.....이곳 저곳 어떤 작품인가
찾아다니다 로댕의 회화코너에서
데생하나 올려봅니다.......역시 로댕의 탄탄한 데생력이
대단한 조각작품으로 탄생되나봅니다.
오랜만에 시아버님 제사지내려 다니러온 시누 수녀님
데려다 줄겸 ......바깥바람 쐬라고 ...나선김에
고호전도 다녀왔읍니다.
........에그머니나.....인산인해......되돌아설가하다
그 브이아이핀가 하는 초대권으로해서 줄서지않고 들어가는바람에
정신없이 사람에 치이면서도 용케 볼 수가 있었지요.
삼월달 끝나기전 아주 일찍암치 서둘러 다시 가볼양 입니다.
몇작품은 기대치 이상이었거든요.....행복했답니다.
얼마전 보내준 로댕의 작품사진을 보고.....이곳 저곳 어떤 작품인가
찾아다니다 로댕의 회화코너에서
데생하나 올려봅니다.......역시 로댕의 탄탄한 데생력이
대단한 조각작품으로 탄생되나봅니다.
|
그의 "생각하는 사람" 이나 "키스" 같은 작품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어느 쪽을 통해서라도 거의가 알고있을것이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알려진 조각가이기도 하다.
예술가들이 좋게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라고해서
남녀의 관계도 독특하거나 평범하지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로댕 그도 역시 그러하고.....얼마전 영화화된
불란서 배우인 이자벨 아자니가 주연한 "카미유 크로텔"에서
여류조각가 카미유와의 관계를 그린 영화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한 이십여일전인가 불문학 교수이면서 시와 평론등등........
많은 저서를 집필한 김 화영 선생님이 여류시인 한분과 실로
오랜만에 이쪽으로 찾아오신적이 있으셨다.
전에 얼떨결에 내노라 하는 문인들을 쫓아 그저 전업주부인 내가
여행을 길게 한적이 있었는데 그때 누구보다도 친밀함을 나누었던분인데
근래에 정년퇴직하셨다는 소식은 접했지만 오랜동안 뵙지를
못했었다.
새해벽두에 불현듯 찾아오셔서 오랜시간동안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시고 우리부부에게 자극을 주시는 여러 말도 해주셨다.
눈 감을때 까지 시인은 시를쓰고....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애정어린 독려를 하고 아쉬운 작별을 하셨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게으름에 파묻혀서 생각없이 지내기도하고
생각자체도 하루 하루가 바뀌기도한다.
스스로에게 고무시키는 방법이라도 만들려면
훌륭한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고 읽고 느끼기라도 해야하나...
그분의 글중 로댕박물관의 관한 글이 생각나서
올려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