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 게시판담당 : 윤순영
언젠가 그냥 좋아서 올렸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처럼
며칠전인가 우리 미술계에서 화가중 널리 알려진 박 수근화가의 초기작품을 우연히 보게되어서
그냥 좋아서 블로그에 스크랩해다 놓았던 것을 이곳에도 올려봅니다.
반 고흐도 살아생전엔 가난과 질병으로 불행한 삶을 살다 설흔 일곱살에 타계했고
박 수근 화가도 어려운 환경과 지병으로 쉰 한살에 생을 마감 했다고하지요.
그의 관한 자세한 소개와 작품을 한번 보셔요.
화가 박수근의 작품 세계 - 수채화
박수근(1914-1965)의 삶과 예술은 '서민의 화가'라고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는 곤궁한 시절에 힘겹게 살아갔던 서민화가 그 자체였다.
1914년 강원도 양구 산골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가난 때문에 국민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다.
6.25동란 중 월남한 그는 부두 노동자,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 따위로 생계를 유지했다.
25억. 더 없으십니까? … 서면 응찰 손님께 25억원에 낙찰됐습니다.” 숨 죽여 지켜보던 관중들은 낙찰과 동시에
미술품 경매장을 뜨거운 박수소리로 가득 메웠다.
얼마 전 K옥션에서 박수근의 <시장의 여인들>이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며 새 주인을 찾았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 있었던 서울옥션 경매에서도 박수근의 작품은 20억원이란 액수에 낙찰되었다.
최근 부동산 시장에 몰렸던 돈이 미술 시장으로 유입되면서 경매 시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로 인해 경매 시장에서의 박수근은 블루칩 작가로 손꼽힌다.
하지만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서민 화가’라는 지금의 명성과는 달리
그는 혹독한 가난과 힘겨운 삶을 살다간 불운의 화가였다.
작가 박수근(1914~1965)은 개신교 집안의 3남3녀 중 4째로 태어났다.
강원도 양구가 고향인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보통학교를 나온 것이 학력의 전부다.
12세 되던 해 박수근은 밀레의 <만종>을 보고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느끼며 한국의 밀레가 될 것을 결심했다.
아버지의 광산업 실패로 삶은 더욱 힘들어져만 갔고 미술교육을 따로 받는다든가 유학을 간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교장선생님의 도움으로 그는 독학의 길로 들어섰다.
1932년 그의 나이 18세 때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수채화 <봄이 오다>가 입선되면서 화가로서의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빈곤과 궁핍은 그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힘겨운 삶의 무게가 그를 고통의 시간으로 내몰면 내몰수록 그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박수근은 제 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부터 연속적으로 여덟 번의 입선을 하게 된다.
박수근은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일은 없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人間象)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즐겨 그린다.
” 그가 지향한 소재는 가난한 서민들의 평범한 생활상이었다.
박수근을 흔히 한국적 작가, 서민 작가, 향토 작가 등등으로 칭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화폭에 담겨진 대부분의 소재는 생활에 전념하는 시골 사람들의 꾸밈없는 모습이다.
.......................퍼옴.............................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그의 일제 치하 해방되기전 초기작품을 소개합니다.
봄이 오다, 1932, 수채화,(제11회 선전 입선작)
-오른쪽 끝으로 조그맣게 빨래 너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정감이 어린 모습!-
농가의 여인 1938, 유채(제17회 선전 입선작)
나물 캐는 여인들, 1940년대, 하드보드에 유채
그림마다 너무 좋네요.
모두 바탕화면으로 하고 싶을 만큼요.
사진이 커져버려 바탕에 올릴 수 없는 게 안타깝네요.
그림 하나 하나가 마음을 쿵 때리는 아침입니다.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던 그 시절
충분치 않은 화구로 그리는 그림 속에서 그가 느꼈을 해방을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언니~간만에 2기 방에 노크했어요.
뭐가 그리 바쁜지 홈피에도 잘 못 들어왔어요.
제가 우리나라 작가중 젤 좋아하는 박수근샘!!!
정감있는 순수함이 엿보이는 그림들!!
살아 생전에 그 값을 인정 받았다면 좀 괜찮게 살다가셨을텐데......
좀 더 잘 살으셨다면 어떤 작품이 나왔을까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작품은 못 가졌지만 눈으로 행복해하고 있어요.
언니덕분에 다시 박샘을 생각해보게 되는 이 아침 행복합니다.
언니~감사합니다!!!
오늘은 박완서씨와 박경리씨의 꾸밈없는 모습의 사진을 올려보려구요.
어제는 손자 산이와 오늘은 손녀 규리랑 하루해를 보내고
겨우 이제서야 짬을 내서
여기저기 전에 들러보던 블로그에서 두분의 면모들을 모아보았지요.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입니다.
박 완서 선생님의 손을 보면서 ..........한참을 생각했지요.
박경리 선생님께서 고추수확을 하신 날인가봅니다.
김은희 선배님!
대가의 꾸미지 않은 순수한 모습에 괜히 마음이 뭉클해 집니다.
순수하고 고단했기에 심금을 울리는 글을 쓸 수 있었을까요?
거짓없는 모습에 마음마저 순해지는데
성형에 중복된 표정 없는 모습과 대조를 이루는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 작품 속에 모든 허세를 배제한 것이 아닐까요?
박수근 화백의 생가에 지은 기념관엘
작년 친구들과 다녀 왔습니다.
사촌 오빠의 별장이 양구에 있어 가끔 가곤 했는데 기념관은 처음이었습니다.
강릉 바닷가 마을에서 하룻밤 자고
양양의 솔비치로 해서
친구의 권유로 양구로 간 것입니다.
문화생활을 즐기는 친구는 이곳이 벌써 몇번째인데 그래도 우리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며 온 것입니다.
안내인의 도움을 받아
작품 하나하나를 설명 듣고
친구가 사 준 책자며 박수근의 그림이 담긴 기념품을 선물 받았던 행복했고 특별했던 그 skll;;'''''lkjhgfdsaweuiop[]/.,mnbgfdsa
(또 게시판이 말썽을 부립니다) 날이 생각납니다.
역시.....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을 화가 박수근의 작품을 보면서 새삼 다시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힘들었던 그의 생활은
팔로우 백만을 이뀰고 다닌다는 작가 이외수를 생각하게 합니다.
박수근의 기념관을 본 따 이외수 문학관을 지자체에서 건립한다고 했을 때
다들 "이건 아니다" 라고 했지요.
그러더니 급기야 그 작가의 젊은 날, 대마초 사건과 함께 혼외 아들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그 때 변명으로 일관하던 작가의 처신이 모든 이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왜 그는 이제라도 사과하고 책임지겠다 못 했을까요?
정의를 부르짖던 그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요?
"한 때 사랑했던 여인에게서 아들이 있었고 챙기지 못 했다"
"그러나 책임을 통감하고 늦어지만 이제는 모든 책임을 지겠다" 라고 왜 못 했을까요?
그런 비겁한 작가의 기념관이라니.........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이 부끄럽습니다.
김은희 선배님!
우리를 좋은 그림으로 일깨워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양구, 인제, 화천, 등 내 유년의 기억속에 반가운 지명이지
동인천역 자리에서 제재소를 하시던 친정아버님이
자리를 옮겨 춘천서 제재소를 하시면서 춘천 근거리에 여러군데 산판을 운영을 하시고 제재소를 경영하셨었거든
그 시절엔 아주 오지중에 오지였는데.............
문학관이니......미술관이니............격세지감이 느껴지도록 많은것이 달라진 세월이야
참으로 그 시절엔 예술가는 더욱 힘겨운세월들을 보냈지
오라버니 덕분에 예술가라고 지칭되는(문학인,영화 연극 배우들 음악인 미술인)
흘러간 옛사람들이 된 예술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많이 알고있지.
우리 평범한 사람들도 겉으로 비쳐진 것 말고 뒷이야기나 실은 진실이 따로 있는것처럼말야
좋은것이든 나쁜것이든 한쪽면만 알고있는일이 허다하지뭐.
"정의" 라는 단어는 어찌보면 인간들의 욕심이 내재된 오염되기쉬운 단어가 아닐가싶다.
팔로우가 백만이 넘는다니...........참으로 순진한 사람들 이지.
사람을 이용에 대상으로 목적을 두고 끌어들이니....이득없는짓은 절대 안하고
잔머리 잔재주가 많긴 많아서 언뜻보면 근사해보이거든
팔로우들 편드는거 보면 장난이 아니던데뭐
기념관이니 하는것도 지역에 이득을 위해 사람들을 모으고 이윤을 추구하려고 투자하기도 한다더라
반면에 진실하고 정직한 이런 예술인들이 계셔서 위안이되고 잠시라도 나도 행복한 시간이라오
산학이의 각별한 내게 대한 고마움을 박경리 선생님의 시로 인사할게
손주들이 돌아가고 한적한 시간 외로움을 이 가슴저린 시가 위로해주네.
옛날의 그 집
박 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은희 언니 ~
우연히 2기 방에 왔다가 귀한 그림과 사진과 음악을 선사받았네요.
언니의 해박한 지식에 늘 감탄하고 있어요.
음악과 미술과 문학을 두루 사랑하고,
아직까지도 타오르는 열정을 간직하고 계신 언니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늘 건강하세요.
굴비,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고흐의 영향을 받음)
감자, 1952, 하드보드에 유채(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복숭아1, 1957, 캔버스에 유채
복숭아2, 연도미상, 종이에 혼합재료
화구, 1962, 수채화
책가방, 수채화
닭과 병아리
집(우물가),1953, 하드보드에 유채
춘일, 1950년대, 하드보드에 유채(봄날의 골목 풍경)
판잣집, 1956, 하드보드에 유채
골목 안, 1960년대, 하드보드에 유채(박수근이 살던 창신동 집 골목)
판자촌, 1960년대, 하드보드에 유채
아~~!! 그림들 정말 좋으네요.
그림에 대해서 문외한이지만 보아서 감동을 주는 그림을 훌륭한 작품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필(feel)이 그리울 때 찾아와 그림들을 보고 또 보고 해도 되겠어요.
박경리,박완서 두분의 사진도 그들의 표정이 살아있네요.
그나저나 어디서 퍼오세요?
저는 올리는 방법마저 가물가물 잊혀지고 있는데......
음악하며.....대단하십니다.
은둔자 하시기에는 너무 젊은 선배님이셔요.
앞으로도 많이 많이 올려 주십시오.
은희언니 덕분에 이곳에서 샤갈도 마스터(?)했었구요 ㅎㅎ
그림 잘 감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냥 눈길이 가고 좋으면 되지 뭐............
거기다 경선이가 말하는 느낌까지 얻는다면 더 좋겠지
모든 사람이 그런건 아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할거야
나이들어가니 ........
모든것이 자신없어지는데 용기를 주네
어느날 내가 올린 대문글을 보니 많이도 했더군
참으로 잘 놀고 잘 지내기도했네.
이곳내려와서 줄창 인터넷으로 이곳저곳 듣고 보고 읽고 했으니
즐겨찾기에 많은 사람들 블로그나 카페 주소를 올려놓고
찾아가 보기도하면서
잘하는 사람들 컴퓨터교육실이란 코너에서 많은걸 배우기도 했어요.
경선이도 아마 하려고 하는 마음만 갖는다면 집에서도 할 수 있지않을가싶네.
음악은 유투브에서 가져오면 되지않을가싶은데.......
써도 된다는 전제하에 올려져서 허락한 영상물이니 저작권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알고있거든
일정기간이 지나면 허락기간이 만료되어서 금지시키기도 하더라.
요즈음 늙어가는 증상중에 하나
어제 한 결정을 다시 번복하는 우를 자주 저지른다는거.........걱정이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눈깜짝 할 사이에 1년의 3분의 1이 가버렸네요.
저도 한동안 푸욱 재충전했으니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할 시점인 것같아요
항상 자신을 닦고 연마하시는 선배님의 이 게시물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학교 때는 가르쳐주니 그냥 배워 머리에 익혔는데
교과서에 서양위주의 음악과 미술 비중이 너무 많지 않았나 싶은 생각입니다.
한동안 고3 입시에 국사를 선택으로 했었고
국어와 국사는 국민정신의 근간인데 교육정책 집행하는 자들의 실책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페이스북에 북한 미술을 올리는 분이 있어요
그림마다 이게 진정한 한국적인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오더군요.
제 담벼락에 공유할까 하다가 ㅎㅎ
종북주의자라고 할까봐 소심해서 못한답니다 ㅋㅎㅋㅎ
북한의 폐쇄주의는 반대이지만
그림을 보면서 북한이 남한보다 더 한국적인 것을 고수하고 있다 보여지는 일면이 있어요
요즘 인천의 대표적 사진작가를 만나서 대화를 나눈적 있어요
디카가 대중화되면서 천편일률적인 사진세계를
문학과 사진, 연극과 사진. 이렇게 접목시키는 일을 시도하며 신인을 발굴한답니다.
그러러면 문학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겠고
거기에 맞는 사진세계를 창조하여야 하는 과정인데
그냥 보이는대로 셧터만 철컥 철컥 눌러대는 저로서는 머나먼 쏭바강입니다
선배님처럼 꾸준이 이러한 활동을 하시는 것은
그만큼 삶의 원천이 되고 젊게 사는 방법이라 여깁니다
혹시라도 하시면서 제가 도움이 될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지난 주에 자전거일행들이 강화를 향해 지나가며 표지판 대곶면을 봤는데
예전에 아마 2005년? 선배님댁 갔던 일이 떠올랐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그러게 2005년이면 9년이 넘었다............
참으로 그동안 홈피속에서의 알게 된 인연들도 많았고 그러니 우여곡절도 있었지싶다.
그 흔한 말로다 미운정 고운정 쌓은 세월이였지싶기도 해.
잘 모르는것이 생기면 도움을 준다니 그말 정말 고마운일이야
전번에도 유투브 동영상 바뀐것도 알려주니 많은 도움이 되었거든
그러고보면 홈피로 인해 생긴 일들
이런 저런 일이 다 우리들의 삶의 한부분 영향을 끼친 세월이였구 말야
올해도 두어달만 지나면 상반기는 금새 가버릴거고 그러네..................
나도 꼭 해보고싶은 일을 계획하고 있긴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없어지고 있지만 다시 재충전해야겠어요.
칠십일세의 바로 위 언니도 중대 대학아카데미에서 사진을 공부하더라구요
벌써 동기들 전시회도 가졌고 작품 사진책자도 출간해서 나도 한권 받았는데
아주 좋더라..........
영희는 자전거 타면서 시야도 넓어질테고 대상의 폭도 다양할테니
앞으로 좋은 사진이 많아지겠네.
기대할게...........
영희도 건강하고 ...........좋은일이 많기를 ~!!!
올려주신 박수근과 그분의 그림을 보며
진지하고 지치지 않는 열정의 선배님을 봅니다.
한국 다녀온 뒤로 왠지 저는 건성 건성 약간은 우울하게 지내고 있는데
밤새워 검색하시고 글쓰고 그림 올리시는 선배님이 제겐 자극이 됩니다.
몸 조심하시구요...더 건강하셔서
좋은 글. 그림 많이 올려주세요.
한국의.... 강화의 산천이 그리워요.
수인이 간지도 꽤 되네.
LA에 말리브 쪽 산동네에 산불이 엄청나게 났다는 소식에
친구에게 걱정스러워서 전화를 넣었었지
물론 방향은 전혀 다른곳이지만 가끔 산불이 나면 대형 사고라서 말이지.............
인재는 없어야하는데 말야..........
이곳이나 그곳이나 비슷하다
며칠전서부터 읽는 책이 있는데 손주보느라 자기전 삼십분만 읽고 더 이상 고단해서 보질못하네
진심의 탐닉 이라고 김 혜리가 만난 크리에이터 리더 22인이라는
한마디로 인터뷰 취재 내용을 엮은 책이야.
내가 왜 이 책을 찾아 읽냐면 이름만 들어도 또는 얼굴만 비춰져도
거부감이 일어나는 몇몇 젊은사람들 때문인데
요즈음 젊은이들과 함께 하려면 우선 그들의 생각을 좀더 알고싶어서 말이지
역시 시도를 잘했다싶어요.........
우리 자식들도 그 세대들이니 말야.
보통 사회전반적인것에 대한 바라보는 눈이 다르고 견해차이도 많고 하니
우리가 화가 나기도하고 우울할 수 밖에 없는것같아서 말야.
"달걀 대신 자명종을 삶아 먹는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절감했어요"
하는 젊은 피디의 활자가 아니라 이미지로 사고한다는 이즈음 세대들도 또 나이를 먹으면
또 세대간에 부딪치는 외로움을 만나겠지.
어제는 이곳은 일요일이자 어린이 날 이였어요
식구가 모두 함께 외출을 했네........강화 이곳저곳 드라이브도 하고 전등사도 들려보고 했네
전등사 죽림다원하고 근처 고목에서 내리는 꽃비를 찍어보았네.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시점보다 신록이 아름답고 꽃비가 나리기도 하지................
수인이도 파우워 블로거인데 블로그에 좋은 글 많이 쓰려면 건강해야지
어제는 이곳은 일요일이자 어린이날이였어요.
손주들 뛰어노는 모습을 찍으려고 캠코더 준비해 가지고 갔다가
문득 생각이나서 죽림다원 전경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보았네
식구들 쫓아가느라 휘리릭 바쁘게 찍느라 화면이 안정감이 없지만 그냥 올려볼게.
전통 찻집이 '죽림다원'이었군요.
흩날리는 꽃비....작년에는 꽃비를 맞아보았는데....
여긴 지천에 꽃이 피어나고, 자카란다 보라색 꽃도 피기 시작했어요.
저희집에서 프리웨이로 30분 떨어진 까말리오라는 곳에서 난 산불.
어제는 이곳에까지 하늘에 회색연기가 깔렸는데
오늘 칠 팔대나 되는 소방차가 남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는데
아마 모두 진압이 된 듯합니다.
저는 주로 아침에 매일 짧게 책을 읽어요. 성경과 또다른 책을요.
1시간 이상은 눈에 무리가 가서, 매일 조금씩
여러종류의 책을 손에서 놓진 않고 있는데
라인댄스도 돌아오고 죽 계속하는데도 요즈음은 왠지 무기력해져서....
오후에 교회에서 오다 Art Show에 들려왔습니다.
(해마다 이맘때 동네별로 돌아가며 하는 아트 쇼이지요)
좋아하는 두 화가도 만나고
그들의 그림도 보면서 다시 힘을 내고 있답니다.
이제 정말 힘을 내야겠어요.
빨래터, 195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최근 45억원에 경매된 그림)
빨래터, 1954년 캔버스에 유채
전시되어 있는 그림의 색감이 또 다르다.
위의 그림 '빨래터' 는 옥션 경매에서 45억원에 낙찰됐다고 한다.
내가 결혼한 칠십년대초 산이할아버지가 국어 교사로 처음 내려간 초임지인 경기도 이천에서
한살배기 아기인 큰딸과 함께 세식구가 살았었다. 그 시절만해도
아기 기저귀등 많은 빨래감을 십여분 거리에 있는
개울로 갖고가 빨래를 했었다.
이 그림을 보면 서울, 인천 등 대도시에서 만 살던
초짜 새내기 주부이자 아이엄마 였던 나의 다른환경에서의
여러모로 좌충우돌 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절 생활이 떠오른다.
늦은봄이나 한여름이면 빨래하기엔 그래도 편한 계절 이였었다.
우리가 세 살던 집 안마당에 있는 그 당시 뽐뿌(펌프)라 불리우던 시설은 겨울이면 손잡이가
얼어 맨손을 대면 척 달러붙었다..............손잡이 쇠가 얼어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 큰솥에 물을 데워 물을 쓰자면 물긷기와 불때기의 번거롭고 힘들었던 과정을 겪어야했었다.
그러니 한여름 아이를 물가에서 놀게하며 흐르는 개울물에 빨래하기는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였었다.
이천에서의 한 삼년 남짓한 경험이 내 인생에서의 폭을 넓혀주었다면 과장일까?
새내기 주부로서 불편하기만 한 생활은 아니였던 교사생활하는 남편의 경험을 함께 하기도 한
내 인생의 아련한 추억속의 한 페이지 이였기 때문이리라.
오십년대의 여인네들의 빨래터
나는 그래서 박 수근씨의 이 빨래터에 눈길이 더 간다.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던 시절 그림물감을 후원해 주던 미국인에게 선물한 그림이란다.
그가 팔십대가 되어 내어놓은 이 빨래터란 제목의 그림이 경매에서 45억에 낙찰이 되었다.
어려웠던 시절 박 수근화백을 향한 그의 고마운 후원의 가치가
그런 큰 액수의 가치이기를 바랄 뿐이다.
빨래터 그림을 보며 빨래터에 대한 추억을 떠 올리셨군요.
저도 그런 추억이....새마을 샘터에서 아침마다
남편이 물을 길어와서 바가지 에 물을 퍼 제게 마시라고 주어선지
그 뒤로 변비가 없답니다. 지금까지.
그 시절 기저귀를 빨아다 주는 아줌마가 있었어요.
비오는 날이면 빨리 마르지 않는 기저귀 땜에 곤란했던 기억도 납니다.
반겨주고 대접해 주는 선배님과 친구들에게서 받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체험하는 순간들이기도 했어요.
제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도 썼었지요.
경선아~ 니가 '길상사' 했을 때
토지의 길상이가 떠 올랐어.
격조있는 그 길을 나도 가고 싶구나.
말만 들어도 감격이야.
6월에 인숙이가 간다는구나. 3주간 머문단다.
만나 즐거운 시간 가져라.
그래 수인아~
나의 이천에서의 삼년여의 생활은 농촌의 따듯한 인심 또한 많이 느낀 시간이였지.
처음 세든 집 주인 할머니는 황달이 지나 흑달로 진행되던 심각한 상황이였는데도
항상 친정 어머니처럼 모든걸 보살펴 주시곤 했었다
결국은 일년이 지나자 돌아가셔서 다른집으로 이사하고
두번째 이사간 집은 비워둔채로 도시로 떠난 집인데 안마당이 폐가처럼 길길이 풀이자라고 해서
우리 두 부부는 열심히 꽃을 심고 나무를 심고 했었단다.
나중엔 이웃 아주머니들이 놀러오시고 김치니 장이니 퍼 날라주시곤했었지
그집 안마당 한켠에 있는 절구를 잘 닦아 마른 고추를 빻아 먹기도하고
이젠 제법 잘 걷는 딸아이를 데리고 이웃 집에 마실도 다니고
나 장에 장보러갈때는 옆집의 아주머니는 손주처럼 봐 주시곤 했었단다.
그 옆집 아주머니의 대한 추억은 서울로 올라온뒤에도 잊혀지지 않았고 육년전인가 소식을 들었는데
팔십 사세에 돌아가셨다네.
항상 저 빨래터에 왼편에 여인네 처럼 머리엔 수건을 항상 둘러 얹고 사셨는데
가을에 콩타작할때 수건을 풀러 먼지를 터느라 벗은 맨 머리 모습을 처음 보았었단다.
나중에 아주머니 말씀은 하도 머리에 이음질을 많이해서 정수리부분의 머리가
탈모되어서 그리 쓰신다고........................
칠십년도 초기에 우리농촌 실상이였는데 육이오 전란 이후 오십년대는 말을 해 무엇하리오.
노상,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화가 박 수근씨 하면 소설가 박 완서씨의 소설 "나목"이 생각나지요.
이십여년전인가 중국이 개방되기전 어쩌다 남편 덕분에 문인들 틈에 끼어 북경대학 노신문학 쎄미나겸
중국여행을 하게되었었지요.
그때 박 완서 선생님도 함께 하셨는데 열흘이 넘는 여행기간동안 제일 궁금한
데뷰작인 "나목"에 대해 조심스럽게 여쭈었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올려져서
소설의 주인공 격인 실제의 박 수근 화백의 그 투박하고 거친 필치의 그림과 소박해 보이는 수채화를
올려봅니다.
이 그림은 1960년대초의 수채화 작품이랍니다.
................. 나목........................
박 완서씨의 소설 나목이 태어나게된 계기는 1965년에 박 수근 화백이 사망하고
69년 경 박수근의 유작전이 열렸는데 이중섭 화가와 막상막하의 그림값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유작전은 보고 와서는 속이 부글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샘이 나서 부글댔다는 것이 아니라 박수근 화백이 얼마나 싸구려 그림을 그리고
-박수근 화백이 싸구려 인조 스카프에 그려서 받은 초상화 값이 겨우 6달러 였다.-
얼나나 가난하게 살았는가를 생각하니 속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가족들도 그의 그림을 가진 게 없는데 그의 그림값을 올려 받으며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화가 났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언하고 싶어졌다.
그 때 당시 그의 그림 하나가 집 값에 해당할 정도였으니 살아서 좀 알아주지
죽으니까 이런가 싶어서 그의 전기를 쓰고 싶어졌다.
그녀의 데뷔작 '나목'은 이렇게 탄생되었다...........퍼옴.........
화가 박 수근씨의 그림을 엄청 모아 놓은 사람의 열성을 고대로 옮겨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