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농(上農)의 조건


  밭에 풀이 그득 차올랐다. 딸 아이 산후 조리 수발을 드느라
이십여 일간 밭에 나자지를 못했더니 애써 가꿔놓은 옥수수 밭이
잡초 밭이 되었다. 수확 터울을 두느라 늦게 심은 것들은 풀에 묻혔고
게다가 일찍 심은 것은 고개가 댕강 잘려 있는 것들도 있었다.
씨를 다시 심거나 달게 나온 곳에서 뽑아 모종을 해야 할 듯하다.

  한숨을 치 쉬고 내리 쉬며 옥수수 밭에 엎드려 있는 나를 보고
이웃 할아버지는 중농은 된다며 웃으신다. 고작 멍석을 펼쳐놓은 것
만한 크기의 밭인데 대단한 농사꾼인 양 예산도 걱정도 많아 엄살은
혼자 떨면서 그토록 묵혀 놓았으니 가소롭게 보이기도 할 것이다.

  ‘중농’이 무얼 뜻하는지를 몰라 멀뚱하니 쳐다본다. 김을 보고도
뽑지 않고 그냥 두는 이를 하농, 보고 뽑는 사람은 중농, 풀을 보지 않고
김매는 농부를 상농이라고 한다는 설명이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식한 듯한 잡초는 시루에 올라오는 콩나물 같았다.
줌에 쥐어지는 대로 한 움큼씩 잡아 뽑으니 풀만 손아귀에 남고 뿌리는
땅에서 꿈쩍을 않는다. 호미질을 한 다음 손가락으로 후벼 파서 끊어진
뿌리를 찾아 당기는 일이 여간 번거롭지 않다. 중등을 붙잡아도 안 되고
한번에 두서너 포기를 잡아도 안 된다. 성급한 마음을 누르고 하나씩 뽑되
앞으로 끌듯이 당긴다. 이렇게 하면 뽀드득 소리를 내면서 실뿌리까지 나온다.
시험문제 풀 때처럼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눈종이의 칸을 세듯이,
스킬자수 짜듯이 하나하나씩 뽑아야 두 번 손이 안 간다. 틱 낫한 스님이라면
‘김매기 명상’이라는 용어가 생겼음직도 하다.

  아침 여섯 시부터 시작한 김매기가 여덟시가 되어 가는데도
맷방석만한 넓이나 맸을까. 산봉우리에 아침 해가 비친다.
한 이랑도 다 끝내지 못했다. 이랑 수를 세어보니 아침, 저녁
두 시간씩 하루 네 시간 일을 한다고 쳐도 일주일은 족히 걸리겠다.

  ‘재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라는 옛 시조의 마지막
구절이 머릿속에 맴돈다. 늦잠을 자는 젊은이의 게으름을 보며
일이 밀려 조바심하는 농부의 심정이 전해온다. 시조를 배울 그때는
‘사래 긴 밭’이 잡초가 우거진 밭이냐, 이랑이 긴 밭이냐가 알쏭달쏭했다.
지금은 김이 묵은 밭이든 이랑이 긴 밭이든 둘 다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베게 베고 드러눕지만 않을 뿐 안방에서 하는 자세가 나온다.
네발로 기기도, 주저앉기도, 무릎을 꿇고 엎드리기도 하고,
팔꿈치를 땅에 대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뽑히는 풀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기도 한다.

  풀에는 향기도 있다. 뽑으면 움켜잡았던 흙을 뿌리가 풀어놓으며
대신 향을 내 놓는다. 냉이, 오이 풀, 명아주, 씀바귀, 비름 등 손에
잡히는 것마다 다른 향기를 뿜는다. 장소만 잘 골라 났으면 모두
나물인 것들이 여기서는 제거해야 할 잡초들이다. 이제라도 검은 비닐을
덮어 아예 풀이 못 나오게 하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이 밭에서는 곡식을 가꾸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 주변엔
가꾸는 작물보다 훨씬 많은 잡초가 있다. 그것들과 적대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다. 제국주의자들이 제3세계를 침략 할 때의 방법으로 잡초를
대하지는 않겠다. 도대체 얼마나 나오기에 잡초와의 전쟁이란
말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려니와 한번 겪어보리란 생각이다.

  김매는 내내 검은 등 뻐꾸기가 운다. 제 알을 남의 둥지에
낳아 놓고 노심초사다. 이곳에 새가 많지만 그놈은 울음소리로
이름을 아는 몇 안 되는 새 중의 하나다. 그 소리를 들으며 상념에
젖기도 하고 혼자 말을 하기도 한다. 저리도 안타까이 울 바엔 차라리
자기 둥우리를 만들 일이지……. 호젓한 골짜기에선 반가운 벗 이상이다.
한시나 옛 그림 속에 새가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아마 그들도 나와
비슷한 심사였던가 보다. 물가에 있는 밭이라서 원앙이
찾아오고 산비둘기가 자주 들른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새의 노래는 공으로 듣는 동안 밭매기 1인 공연은 끝이 났다.

  줄지어 선 옥수수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람이 술술 통하는 게
옥수수가 무척 시원해 할 것 같다. ‘김매는 아줌마 궁둥이 돌렸다 어서 나가자.’
한다더니 처음 풀을 뽑은 고랑에선 어느새 잡초가 올라오고 있다.
손을 댈 것도 없이 호미로 긁어 흙을 뒤집는다. 잡초와 씨름하듯
덤비던 때와는 비교가 안 되게 수월하다. 그 노인장, 상농이 제일 쉬운 노릇이란
얘기를 귀띔이나 해줄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