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강원도 치악산 자락에서 밭을 가꾸며 민박을 경영하고 있는
장 현심의 수필이다.
이글을 본인의 허락 없이 여기에 올리는 것은 이 글이 여러 사람에게
읽혀지기 위하여 책으로 출판된 작품이기에 우리들 친구들이 모두
읽었으면 싶어 본인의 허락 없이 여기 올린다.

이 수필은 모닥불이라는 수필가 동호회에서 해마다 출간하는 수필집인
『겨울산은 잠들지 않는다.』에 실린 6편의 수필중 하나다.
장 현심은  수필가 동호회 모닥불의 회원으로 책이 출간 될 때마다
다수의 수필을 발표했다고 한다.

수필을 읽어보니 현심이의 생활을 보는 듯 하고 그녀와 함께 이야기
하는듯한 착각을 가지게 한다.
현심아!!
문자를 통해 나한테 까지 귀한 책을 주어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네가 이글을 읽을 수 있을 때가 있기를 바라면서...
                                            장   은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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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머리에 (장 현심)
  
  해방 이듬해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인천과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초등학교가 있던 피난지 강화도가 늘
  그리웠다.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부턴 여기가
  고향이다. 치악산 방그러니 계곡에서 세 번째 봄을 맞는다.
  사람(人)이 산(山) 옆에 있으면 신선(仙)인데, 게다가 나는
  머리까지 하얗다.  개 일곱, 토종닭 일곱, 오리 열한마리를
  부양하며 농사도 짓는다. 여자신선은 새 고향에서 오늘도
  아주 분주하다.                  
                                                  chsim@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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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멧새인지 딱새인지
  
  서울에도 눈이 많이 내렸다는 소식이다. 여기도 또 와서 쌓였다.
이사를 하기 전에는 강원도 산간지방의 폭설 주의보가 외국의 날씨만큼이나  
나와는 상관없이 먼 소식이더니 이제는 그게 내 집 마당의 이야기가 되었다.
전국 어디서든 소리만 들리면 덩달아 내린다.

  오랜만에 하늘이 희뿌옇기에 지척인 치악산 휴양림을 찾았는데 싸락눈이 다시
진눈개비로 바뀌어 나뭇가지 사이를 희뜩거린다. 설경을 즐기고 싶은 마음과,
더 쌓이기 전에 하산하고픈 마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숲 속이 시끄러웠다.
보니 몸통은 까치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색깔은 장끼처럼 호화로운 깃을
가진 새가 대여섯 마리 엉겨 붙어 좇고 쫓기며 어우러져 내는 요란한 소리였다.

  사람이 옆에 있는 것엔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 하긴 산은 원래 날짐승
길짐승들이 사는 터전이니 어쩌다 산에 든 사람에게 그들이 신경 쓸 일은 없겠다.
환영은 못되지만 적어도 나를 기피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 싸움에 비할 바 없이 흥미로워서 제풀에 파하고 다른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구경을 하였다.

  그런데 소란을 부린 그 새들이 무슨 새인지 알 수가 없다. 처음 보는 새다.
돌아와 알아보니 산까치(어치)라는 이름을 가진 새였다.
  
  산골에 오니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가 확연히 드러난다.
새로운 문명의 산물이거나 첨단과학, 아니면 이 세 개를 변화시킬 문화사조라면
‘아! 내가 시대에 뒤떨어졌구나.’ 하겠다. 그런데 태고적부터 있어온 동물들이며,
사방에 지천인 풀, 나무들의 이름을 모르겠다. 그것만이 아니라 자연 속에 살면서도
자연을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사는 듯하다.
  
  이곳에서는 내가 찾아 나서기 전엔 사람을 만날 수 없다. 인터넷도
우편집배원도, 신문도 들어오지 않는다. 숲과 나무와 다양한 종의 새와 곤충,
계곡의 물과 잡초들뿐이다. 이웃이라고는 그들이 전부인데 친하게 지내려도
아는 게 없어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지 답답하다.

  도회지에 살면서 교통편을 이용할 줄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고,
시장과 백화점도 구별할 중 모르는 사람과 비슷하다 하겠다.

  시골로 내려올 때는 나름대로의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다.
나이 들어 전원에 살며 글까지 쓴다면 더 이상 멋스러울 것이 없을 듯하였다.
자연인으로 살았던 ‘소로“처럼은 아니더라도 가까이서 글을 쓰는 선배와
비슷하게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분은 딱새와도 교감을 한다고 한다.

딱새는 숲에서 만난 그에게 맛나게 생긴 벌레를 입에 넣어주려고 할 정도다.
그런 일 정도는 산새가 있는 곳이라면 가능할 것이라 미루어 짐작했다.
도심에서 부대끼며 살아서 그런지, 푸성귀도 가꾸고 자연과 어울려
살면 맘먹은 대로 멋진 글이 술술 써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쓰고 싶은 대상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그것을 내 글 속에 집어 넣을 수도 없다.
새와의 사귐은커녕 멧새인지 딱새인지 구별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야생초 편지(황 대권 저)』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이 풀 무더기를 한 평만 떼어다 교도소 운동장으로 옮겨  놓을 수만 있다면…….’
그는 옥살이를 하면서 옥담 밑에 돋아난 쇠비름 며느리밑씻개 달개비 강아지풀
등을 가꾼다. 풀 하나하나의 특성과 이름을 중얼거리며 딛고 있는 땅을 온갖
보화가 가득한 신비의 곳간으로 여긴다. 어쩌다 사회참관이라도 나가는 날엔
도랑 근처에 돋아난 풀들을 뽑아 주머니에 건사했다가 화단에 옮겨 심었다고 한다.

그를 데려다 이곳에 3일간만 살게 한다면 얼마나 행복해 할까를 생각했다.
관찰하고, 키우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을까. 그토록 열악한 환경에서도
풀을 가꾸고 지키며,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으로 이어가는
그가 성자와 간이 숭고해 보인다.

  이집으로 이사 온 첫날밤을 잊지 못한다. 오랫동안 비어 있어서 천장에는
거미줄이, 벽지는 얼룩이 졌고, 곰팡이 냄새가 가득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는데, 천장에서 뭔가 가슴위로 툭 떨어졌다. 깜짝 놀라 일어나 불을 켜보니
밤알만큼이나 큰 거미였다. 벽 쪽으로 멀찍이 기어가서는 움직이지도 않고
침입자인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잡으려면 장 밑으로 들어가고, 누우면
다시 기어 나오기를 여러 차례. 밤잠을 설친 후 이튿날 살충제를 뿌렸다.
자는 동안 거미한테 물릴지도 모은다는 공포감. 그놈이 노려본다는 불쾌감.

밤마다 나와서 괴롭히면 어쩌나 하는 염려는 모두 내 입장에서만 본 상황이다.
거미가 해충을 포식하는 익충이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다.
거미라고 모두 독이 있어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만도 아니건만,
거미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과 인간의 편협한 이기심으로 거미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며칠 후 그 녀석이 서랍 속에 죽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때 약만 뿌리지 않았던들,
우리는 거미와 사람이라는 다른 종끼리 상대방의 생활습관을 이해하는
안락한 동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들 누(累)대에 걸쳐 살아온 집에서
학살을 저지른 나는 잔인한 호모 사피엔스다.

  나무 한 그루, 우리에겐 쓸모없어 보이는 습지 한 자락, 동토의 작은 생명체
하나가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음을,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알아간다. 앞으로는 열매가 안 열리는 나무라고 해서, 단풍이 곱지 않다고,
가시가 많다고, 벌레가 낀다고 그것들을 베어버리는 일은 삼갈 것이다.
제초제도 멀리 하며, 밭에 풀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검은 비닐도 덮지
않고 농사를 지어볼 예정이다. 김을 매더라도 가꾸는 작물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꽃이며 자라는 모양새를 살펴 보겠다.

풀 한 포기, 작은 새, 곤충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고 모르면 도감을 뒤지며
저들에게 애정을 가지려고 한다. 그러노라면 그들을 통해서 세상과 우주를
보는 더불어 사는 방식을 깨우치는 날이 오겠지.

  산과 계곡과 풀의 세상인 이곳, 이들을 스승 삼아 검객이 혼자 정진하듯이
내가 그들과 다름없이 살련다. 치악산 방그러니 계곡이 나를 품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