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감상치(癡)

  내가 사는 집은 치악산 자락에 자리 잡아서 공기 맑고 물 좋기가
어느 유명 휴양지 부럽지 않다. 2층이 비어있다시피 하여 자연이
그리워 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방을 내어 준다. 이곳에 묵는
사람들은 거의가 아름 아름으로 해서 오거나 입 소문을 듣고
연락을 한다. 많게는 사오십 명을 넘기도 하고 가족단위 또는
작은 모임인 열명 내외가 되기도 한다.

  이번에 우리 집 2층에 머물고 있는 패거리 중 한 명이 계곡에서
마당으로 올라오는 나에게 말을 건넨다.
“이 개울물에 산메기가 사나요?”
산메기라? 메기는 알아도 산메기는 낮선 이름이다. 선뜻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니, 손바닥을 펴서 가운데 손가락 세 마디를
짚어 보이며
“아 요만한 고기 있잖아요.”
버들치나 산천어를 말하는가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왜 물을까.
물의 맑기가 궁금한가. 어종의 분포를 알고 싶은가.
아니면 물고기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영화가 흥행한 이후로
토종 담수어를 기르는 사람이 많다고 하던데 그런 부류의 사람인가.
그런데 그 모두가 아니었다.
“재미 삼아 잡아서 매운탕 끊여 먹으려고요.”
눈만 떠다니는 것 같던 치어들이 어느덧 자라 성냥개비만 해졌다.
큰놈들은 물 가운데를, 어린놈들은 겁 없이 물가에서 헤엄치는 게
여간 신통하지 않다. 이 높은 산속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급류에 흽쓸려 떠내려가지는 않을까. 나의 애틋한 마음을 전할 길은
없지만 애정 어린 눈길로 한참을 기다리면 돌 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잡아서 끊여 먹겠다니. 밉다. 정말 싫다. 이런 사람들은 누구
소개로 왔는지를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번엔 거절을 해야겠다.

  손님이 온다는 날은 아침부터 기다려진다. 전날부터 이층에 난방용
심야전기를 넣고 외출은 삼간다. 길섶에 풀을 깎고, 계곡물이 얼마나
있나 내려가 보기도 하고, 먹는 물은 모자라지 않고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을지 인원수와 샘물의 양을 가늠해 보느라 집수통(集水簡)도 점검한다.
들에는 무슨 꽃들이 피어 있으며 이름은 무엇인지 책을 들춘다.
밭을 살피며 들도 거닌다.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이 되어도 오겠다던
일행은 오지 않는다. 외등을 밝히고 평상에 앉아 기다린다.
집안에 들어가 있어도 안 될 것은 없지만 밤길에 혹시 집으로
들어오는 샛길을 놓칠까 봐 걱정이 된다.

  밤늦게 도착한 그들은 저녁을 먹고 기타를 쳐대기 시작한다.
인원수가 많은 팀들은 드럼에다 전자악기까지 동원하다. 밤새
두드린다.  새벽 두세 시 경에 끝내는 축들도 있지만 아침 여섯 시
넘게 계속하는 이들도 있다.

  아침이다. 심호흡을 하며 산책길을 묻는 이들이 있을까 해서
집 주변을 어정거리던 나는 혼자 걷는다. 새벽 공기가 아깝다.
이층은 조용하다. 모두들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나 고단하랴.
아마 정오는 지나야 일어나리라. 그리고는 아침 겸 점심을 급히
먹고는 길이 밀리기 전에 떠나야 한다며 부랴부랴 차에 시동을 걸겠지.

  내가 손님을 위하여 준비한 것들은 여태껏 써먹어 보지 못했다.
마당가에서 우산 모양의 레이스를 달고 있는 꽃나무의 이름을
묻는 이가 아직 없었고, 가슴이 미어지게 우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이름을 궁금해 하는 이가 없다. 계곡을 아지랑이처럼
메우려 날아오르는 나방과 나비에게, 색을 달리하고 모양을 제멋대로
꾸며낸 각양의 나뭇잎에 관심을 갖는 이가 없다.

방문객들은 밤새워 노느라, 교회에서 온 사람들은 예배보고
성경 공부하느라 자연을 감상할 시간이 없다. 떠나기 마지막 날,
마당에 불을 피우기도 한다. 그러나 모닥불 가에 둘러 앉아
주먹 같은 별을 보거나, 달빛에 취하는 게 아니다.
땔감에 기름을 끼얹어 불길이 사람 키를 넘게 하고는 마이크를
들고 산천이 들썩이게 노래 부르며, 부나비보다 더 어지럽게
춤들을 추어댄다. 풀숲을 서성이거나 나무 밑을 찾아 드는
이들이 없지는 않다. 대체로 여자들인데, 자연을 즐긴다기 보다는
봄이면 쑥을 캐느라, 가을이면 도토리나 밤을 주우려고 한다.

  그렇게 놀다 가려면 구태여 이곳을 찾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도회지 주변에도 그만한 장소는 얼마든지 있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것, 즐길 수 있는 것은 모두 마다하고, 일상에서 하던 놀이만 한다.
그럴 바엔 뭣하러 왔느냐고 물으면 오고 가는 길에 스트레스는
다 풀린다는   대답이다.

  빠르고 복잡한 주변 환경을 벗어나서도 분위기만은 익숙한 게
좋은 걸까. 그림 전시회에 가서 그림을 감상하기보다 또박또박
울리는 대리석 밟는 소리를 즐기든, 외국 여행 가서 낮선 음식은
입에 안 대고 한국서 가져간 김치와 고추장만 먹든, 각자 취향이다.
그러니 자연을 감상하든 안 하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아쉽고 안타깝다. 다음에 시간 날 때 와서 보라고 여름날의
향기를 갈무리해 놓을 수도 없고, 산허리에 둘린 구름을 광에 들여
놓을 수도 없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산야의 변화를 말로
설명할 길은 더욱 없다.

  인간의 마음과 유전자 속에는 자연에 대한 애착과 회귀 본능이
있다고 생명공학자들은 말한다. 신원섭 충북대 산림 과학부 교수는
‘숲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행복해지며, 자제력, 통제력,
사회적응력을 높여주고 집중력을 회복시킨다.’ 고 한다.
저들도 나이가 들면, 또 때가 되면, 자연을 보는 눈이나,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겠지. 지금 비록 노는 게 경박하고 자연 풍광의 진면목을
알아볼 줄 모른다고 생각될지라도, 실망하지는 말자.
포괄적(包括的)으로 보면 그들도 희망적 존재이며 의미 있는
이 시대의 징조다. 이곳에 찾아와 밤새 떠들며 노는 것 자체가 적어도
자연으로 관심을 돌리며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리라.

  자연 치(癡), 아니 고향으로 회귀를 시작한 자들이 떠나고 나니
평소보다 더 조용하다. 이런 고요를 경 읽는데 북 줄 끊어진 것 같다고
표현하던가. 혼곤히 낮잠에 빠져든다. 주변계곡과 개들도 함께 잠들었다.
모두가 피곤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