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자가 남기는 것


  큰언니가 지난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 막내인 나에게
어머니 대신이던 큰언니다.

  응급실로 실려 오던 마지막 밤에도 그 언니는 조카들을 시켜 나에게
연락하라고 하여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간암으로 인한 피하 출혈로
온 몸이 검은색이었고, 앙상한 뼈에 가죽뿐이라서 더한층 보내는
심정이 절절하다. 6년간의 투병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겨웠는지를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영결식을 집례하는 목사님이 유가족들을 불러 모아 놓고 고인이
생전에 부탁한 유지를 따르겠느냐고 물었다. 시신기증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니다. 건강을 잃고, 병과 싸우며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무렵이다. 그때 이미 그 병에게 헤어나지 못할
것을 짐작했는지,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몸이 연구 대상이
되었으면 좋겠노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유족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시신기증자, 즉 당사자는
말이 없고, 형제들과 자식인 아들은 찬성, 두 딸이 반대였다.
결사 반대였다. 유지를 받드는 것도 중요하고 의학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고인의 뜻도 훌륭하지만 내 어머니만은 그렇게
못 하겠다는 것이다. 고생하다 돌아가신 것만도 불쌍하고 기가
막힌데 두 번 죽게 할 수는 없다고 한다. 딸들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시신이 알코올에 담궈지고 그 이후의 과정들을 추측해보면 선뜻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문서화 된 본인의 시신기증서가 없기 때문에
언니의 주검은 결국 땅 속에 묻혔다.

  장례가 끝난 후 언니가 살던 집에 갔다. 먼저 간 언니를 보듯 할
유품이라도 한 점 챙기고 싶었다. 망연히 빈집의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언니의 손때 묻고 추억어린 것들이건만 주인의 생명이 끝나고 나니
요즘같이 물자가 흔한 세태로 보면 한낱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생전에 몸담았던 집은 장판 도배 다시 하여 고인의 체취마저
없앤 뒤 세를 놓았다.

  ‘내가 가졌던 것은 모두 두고 가고, 남에게 주었던 것은 다 가져가노라.’
언젠가 큰 오라버니에게 들었던 만주(滿洲) 어느 분의 묘비명이 생각난다.
그렇다. 재산, 권력 명예 등 살아서 가졌던 것들은 숨 떨어짐과 동시에
손에서 놓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생전에 지녔던 지식이나 사상까지도.
좋아했던 사람도, 원수처럼 여기던 이도 일단 이 세상을 떠나면 모두 잊는다.
그들의 잘못된 소행에 대해서도 관대해진다.

  우리도 장차 그렇게 될 존재들인 탓도 있을 것이다. 또 무엇을 소유했건
아니건, 가치가 있든 없든 간에 죽음은 모든 의미와 좋고 나쁨과 우열조차도
없애버리고 마는 까닭이 아닐까 한다. 떠난 자에게서 받은 사랑, 희망, 선행
등은 그가 없음으로 해서 더 따듯하고 마음에 사무친다. 가지고 있다가 무(無)가
되어 버리는 정 반대의 논리로, 남에게 준 것은 남은 자의 가슴에 남아 오히려
살아 있는 자들의 삶으로 이어지고 증폭된다는 뜻일 게다.  

  그날 유품으로 가져온 물건보다 더 구체적으로 마음에 각인되는 것이 있었다.
이루지 못한 언니의 높은 뜻이다. 남을 위해 나를 주는 성숙한 의식과 정신이
엄숙하게까지 느껴졌다. 언니와의 이별을 계기로 나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주 진지하게. 언니 생전의 결심처럼 나도 시체를 기증하기로 했다. 큰언니를
보내고 돌아와서 시신을 기증하기로 마음을 정하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
썩을 육신이라고 생각하면 한 푼의 가치도 없지만 자신의 전부를 내 놓는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값어치를 지닌다.
누군가의 생명을 값으로 따질 수 없듯이.

  이미 장기기증회원으로 가입한 모닥불 수필동인 박용현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의 소개로 이해를 도울 만한 소책자도 받아 보았다. 죽은
사람에겐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된 각막이나 피부조직이라도 그것이 꼭 필요한
산 사람이 있다. 그는 죽었어도 이식 받은 사람을 통해 그의 삶도 이어진다.
죽어가는 이게게 생명을 나누어 주고, 죽은 나는 다시 함께 사는 길이다.

  신청서를 양식에 따라 내고서도 웬일인지 가입증서를 기다리는 동안
몹시 불안했다. 죽어서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스스로 내 손이며 팔을 세세히 어루만져 보았다. 발가벗겨진 채 의사들이 필요한
부위를 가르고 자르고 들어내는 장면. 기독교 신자들이 믿는 부활의 몸은
현재의 이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때가 오면 이리 저리 개체로
흩어져 있는 내 몸 조각 들은 어떻게 될까, 혼란스러웠다.
‘한살이라도 더 젊어서 죽어야 시신이라도 쓸모 있겠지’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들로 밤엔 잠도 오지 않았다. ‘없던 일로 해주세요.’
취소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가도 날이 밝으면 ‘아니야.’ 하고 머리를 흔들고
번복하기를 몇 며칠, 드디어 등록증이 배달되었다.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로부터 ‘장기 등록증’을 교부 받았다.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설명할 길 없는 평안함이다.

  노후대책이 다 되어 있는 중년의 느긋함이 이러할는지, 애면글면 속 태우던
일이 무사히 해결되었을 때의 홀가분함에 비교할는지 어림으로라도 표현이
안 된다. 평생 내 자식, 내 가족, 나만을 위해서,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살다가 처음으로 이웃도 보고 푸른 하늘도 올려다본 기분이다. 천국의 초대장이나
받아놓은 듯 자랑스럽다. 이렇게 기분이 좋을 줄은 미처 몰랐다.
살아서 자기 몸의 장기를 떼어주는 사람에 비하면야 부끄러워서 내색할
일은 못되지만, 조붓한 내 그릇 됨됨이를 스스로 아는지라 대견하기까지 하다.

  회원 번호 09021. 주민등록증과 함께 몸에 지니고 다닌다.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었을 경우에 누군가가 즉시 사랑의 본부로 연락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 카드에도 ‘본인이 하늘의 부름을 받는 날, <빛의 전화>로 연락해 주십시오.’
라고 씌어 있기도 하다. 그날로부터 ‘나는 훗날 다른 누군가의 몸의 한 부분이자
생명이기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는 성의로움과 ‘하늘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는
기대로 산다. 죽는 일이 두렵지만은 않다. 언니의 마음을 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