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수업료

  오월 한달 벌어서 여름 석 달을 산다는 꽃집에 여름이 돌아왔다.
날씨가 더워 꽃은 푹푹 썩어 나가는데 손님은 그림자도 없다.
집세도 내야하고 인건비도 나가야 하는데 무슨 수를 써야 매상을
올릴까 궁리를 한다.

  영업 사원을 채용해볼까. 아니면 거래가 소원해진 고객들에게 전화를
돌려 볼까 하던 차에 손님이 들어온다. 걱정이 일시에 사라지며 반가움이 앞선다.
권하지도 않는데 의자를 당겨 앉고 XX생명의 기획 실장이라며 자신을 소개한다.
중간키에 피부는 가무잡잡하고 호감이   가는 얼굴이다.
  
  여의도의 가장 높은 건물일뿐더러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규모가 큰 회사다.
창사 XX주년 기념식을 갖는데 식장의 꽃 장식 견적을 받으려고 왔다.
중앙 테이블에 어느 정도 크기의 꽃바구니 하며, 구석에 몇 개, 입구에
몇 개 하는 식으로 식장의 그림까지 그려 가면서 설명을 해준다.  

  크기와 개수가 나오니까 금액은 쉽게 산출이 된다. 472만원이다.
花요일이란 꽃집이 생긴 이래 단일 건수로는 가장 큰 액수다.
최 실장이라는 그 남자는 회사에 전화를 걸어 비싸다는 이견(異見)이
있는지 설득을 시킨다.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꽃이나 잘 해달라며
계약을 하겠다고 한다.

  이 사람이야 말로 왕 같은 손님이다. 자신의 의사가 분명할 뿐 아이라
정당한 값을 치르고 잘해 주기를 바라는 세련된 매너를 가졌다. 손님이
모두 이사람 같다면 좋겠다.

  음료를 대접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이 꽃집에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사장님께선 XX아파트에 사시죠. 거기 사시는 경아 어머니가 저의 형수님 되십니다.
여기를 소개 하시면서 꽃을 아주 예쁘게 하니까 들려 보라고 했습니다.
경아 어머니라면 잘 아는 분이다. 같은 아파트에서 몇 년을 함께 살았다.

교회의 구역 식구일뿐더러 성격이 서글서글하여 남에 일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돕는 분이다. 최 실장은 묻는 말은 물론 묻지 않는 회사에 관한 얘기며
가족이나 개인 신상에 대한 것도 좌르르 쏟아 놓는다. 꽃가게 명함을 주면서
직장의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

  자신의 명함은 지금 가진 게  없고 당장 회사에 들어가서 대금을 치를 터이니
꽃집 직원인 김 선생과 함께 가겠다고 한다. 잔돈을 봉투에 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친절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김 선생은 행사장도 볼겸 나와 함께
가 보자고 한다. 최 실장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극구 말린다. 현장 확인도 없이
꽃 장식을 맡는 다는 게 일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서 급히 사람을 불러
가게를 지키게 하고 따라 나섰다.

  몇 백 명도 넘게 수용할 수 있는 넓은 홀은 다른 행사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기웃거리며 눈짐작으로 길이를 재고 꽃 배열을 해보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정식으로 정확한 수치를 재야 할 터이므로, 로비에 앉아, 최 실장을
따라 6층에 있다는 그의 집무실로 간 김 선생을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불길한 예감을 애써 누르며 꽃의 배열을 구상한다.
30분이 지났다. 혹시 일이 잘못 되고 있는 건 아닐까.
나쁜 예감은 휘몰아치듯 강한 확신으로 변한다. 김 선생은 무사할까.
유난히 김 선생에게 호감을 보이던 점이 마음에 걸린다. 수첩을 차근히
찾아도 되련만 허둥거리며 전화번호를 물어서 경아 엄마와 연결이 되었다.

  그런 시동생은 없다는 간단한 대답이다. 역시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시장 바닥 같은 인파 속에서 사라진 사람을 어떻게 찿나.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까, 경황이 없는 중에서도 침착해 보려고 정신을
가다듬는데 앞에서 김 선생이 오고 있다. 우선 염려하던 바는 안심이다.
그러나 무엇에 홀린듯한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예사롭지 않는 다른 사태가
벌어진 것이 틀림없다.

  거스름돈을 가지고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500만 원짜리 수표를 주겠다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최 실장이 나오지를 않아요. 김 선생은 울듯이 말한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최 실장의 집무실이라고 가르쳐준 곳의 문을 열어보니
기획실이 아니라 헬스클럽이었고 안내에게 최 실장이란 사람을 물었더니
그런 사람은 있지도 않다고 한다. 주관 부서에 문의를 해보니까 그런 행사는
예정에도 없다는 대답이다.

  꽃을 팔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때문이다. 당한 나는 물론이지만
그 녀석도 정말 한심하다. 너무 했다. 그 좋은 인물에, 해박한 지식에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화술을 가지고 무엇을 못해서 그래 돈 몇 푼을
등쳐먹는 사기꾼인가. 그도 자랄 때는 장래를 펼칠 순수한 꿈이 있었을 터인데
살아오면서 어떤 험로를 거쳤기에 창창한 나이에 벌써 인생을 구겨버렸을까.

  멀쩡한 대낮에 두 여자가 택시 타고 가서 돈 28만원을 그냥 주고 온 격이다.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처음부터 속이려고 작정한 꼬임에 걸려든 것이 속상하다.
당하고 나서의 얘기지만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이야기 도중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믿었기에 나름대로 좋게
해석을 해버린 게 그의 사기 놀음에 휘말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를 의심하지 않은 것은 경아 엄마의 시동생이란 점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경아 엄마가 어디 하나 둘인가. 수경, 민경, 은경…경아 엄마는
얼마든지 있는 것을. 사람의 심리는 자신이 경험하고 아는 쪽으로 인정해버리려는
경향이 있는 것일까. 그래서 경아 엄마라고 하니까 내가 아는 경아 엄마라고
쉽게 단정해 버린 것 같다.

  또 이상했던 것은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은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명함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달라고 하지 않아도 인사할 때마다
거의 습관적으로 꺼낸다. 남들과 다르다고 잠시 마음에 걸렸지만
뭐라고 말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 관행이나 일상의 범절이 나와 같지 않다
하더라도 속으로 접어 두고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길들여진 습관이니 남과 왜 다르냐고 걸고넘어질 일은 아니다.

아무리 액수가 큰 수표라 해도 그것에 맞춰 끊으면 될 것이요,
거스름돈도 봉투에 넣어라, 말아라 그가 요구할 사항은 아니었다.
상식(常識)선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보편적인 사람과 상종해야
서로의 마음을 다치지 않는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상행위(商行爲)는 단순히 물건과 돈만이 건네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인격도 주고받는다. 허리 굽혀 인사하고 웃는 얼굴로 상대방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것만이 친절은 아니다. 나의 이익을 떠나 용도와 돈에
맞는 것을 성의껏 권해주는 것도 손님을 존중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꽃은 생활필수품이 아니라서, 없더라도 그냥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예쁘자고 기분 좋자고 사는 물건이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만족시켜 주는 꽃은
사는 순간 이미 물건이 아니다. 황홀해서 탄성을 발하고 향기에 취한 사람을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천사가 되는 걸 자주 경험한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이 세상은 서로 믿고 사는 만큼
아름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하지만 꽃을 팔고 싶지 않은 손님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깍는다.
마치 그냥 가져가도 되는 물건에 돈을 처들인 듯 투덜대는 사람, 재고를 떠넘기려 한다는
피해 의식에 권하는 꽃은 무조건 싫다는 아가씨 “꽃값이 왜 이렇게 비싸” 나무라듯
큰소리치며 들어오는 아주머니, 부르는 값의 반을 무조건 깍으며 막무가내
버티는 외국인. 부인이 아들을 낳아 병원에 간다면서 생화는 금방 시들어서 안되고
화분은 죽어서 소용없다며 나가는 아저씨……. 실망스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 실장은 그런 점에 착안하여 심리적으로 자신을 완전히
신뢰하게 한 다음 밖으로 유인해 내어 돈을 알궈 내었다.

  요즘 사기꾼은 기술이 하도 발달하고 능란해져서 치려고 마음만
먹으면 제아무리 똑똑해도 안 당하는 재주가 없다고 한다.
청와대나 고위층을 빙자한 사기꾼에게 당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걸 보면 그렇기는 한 모양이다.

  그들이 나처럼 어리석어서 당했을까. 군인간 아들이 사고를 쳤다고
돈 뜯어 가는 사기, 등록금 사기, 땅 사기, 심지어 해외에 진출한
큰 기업체들도 국제 사기단에 걸려드는 수가 있다니 그동안 당하지 않고
산 게 요행이다. 얼마나 무섭고 험한 세상인데 그 정도는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위에서 위로를 해준다. 더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이일을 계기로 미연에 방지가 된다면 수업료 치고는 싼 것이 아닐까.

  사람을 어느 선까지 믿어야 하나. 상식적(常識的)인 사람이라는 잣대를 세워
놓았지만 그것 또한 모호하다. 어느 면에서 상식은 약간 벗어나지만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내일도 모레도 꽃가게에서 미지의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상식이란 잣대를 남몰래 들이대고 의심의 눈금을 셀 수는 없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악인이 없다는 말이 있다. 또 당할지언정
즐거운 마음으로 기쁨을 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