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 게시판담당 : 윤순영
나에겐 친정 큰 오라버니인 기산 김양수씨가 표제에 쓴 -이책에 인천이 있다 "仁川開化百景"-
을 이곳 김포로 이사온지 얼마 되지않아 소포로 받았었다.
바로 그 즈음이 서울과 인천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나던 때였기 때문에
책은 받았지만 그냥 대강 훑어보고나서 서가 한편에 꽂아두고 있었는데
전에도 글로 쓴 적이 있지만 이 나이쯤엔 쌓아둔 물건이나 생각들을 정리해야 된다는 생각에
서가에 책들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남편의 옛시집도 찾아들었었고 오라버니가 집필한 이 책도
찾아 시간이 되면 인천에 관한 역사니 홈피에 유용하게 써 볼 요량이었다.
그러니까 누구나가 과거에 대한 유년기에 고향생각이나 젊은때 지나온 삶의 행적이랄지의 그리움의 일환으로
여고시절을 떠올리며 반갑게 여고홈피도 찾고 오늘의 큰행사도 참여하고 하지않았을가 한다.
우리 학교 개교 오십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도 끝났으니 우리 학교 우리들이 살았던 또는 살고있는
인천에 뿌리를 이 책을 빌어 적어볼가한다.
(한분밖에 안계시는 오라버니는 팔순을 내일모레 두고 계신데 옛 모습은 간데없고 이젠 시들어가는
노년을 지탱하기에도 육신은 힘들어보이신다.
다만 아직도 강직한 정신은 남아있는 부분이 보이기는 하시는데.......)
??시민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문장
.....지 용 택(새얼 문화재단 이사장의 간행사)
[인천개화백경]에 부쳐
인천은 유난히 역사적 외풍에 시달린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이 고장에서
삶을 설계하고 꽃을 피워 그 열매를 후손들에게 넘겨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이 지역의 참된
주인이 되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도로나 건축물, 무슨 기념물 하나하나가 깊은 애정과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 별로 많지 않은 걸 보면 그런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미 천 년 전에
화려하고 위대한 개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말에 민족적 치욕으로 얼룩진 불평등 조약의
인천 개항을 새롭고도 위대한 일인 양 기념하기 위해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 거대한 기념탑을
조성하는 일만 보더라도 한심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해 분노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질책하면서 이 고장을 지켜온 사람이 있다.
바로 기산 김양수 선생이다.
약관으로 한국 문단에 입문, 그 활동이 활발하여 인천의 위상을 높인 바 있는 선생은 한결같이
문단 활동과 더불어 마음으로부터 인천을 사랑하여 역사적으로 미흡했던 인천 사람들의
생활풍습과 인물 이야기들을 찾아 정리하고 가꾸어 그 많은 성과를 후학들에게 남겨놓은 바 있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인천개화백경]을 세상에 내놓으시는 것은 참으로 시민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지역 인물들을 바로 알려주는 노력이 부족한 상황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알기 때문이다.
책 이름을 [인천개항백경]이 아니라 [인천개화백경]이라고 한 것은 단순한 "개항"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포괄하여 "개화"로 승화시키는 역사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식을 시민들에게도 심어주려는 깊은 뜻을 존경하면서 선생의 열정과 뜻이 인천시민들의
속 깊은 마음과 함께 어울어져 더 많은 저술과 활동이 앞으로도 계속되길 바란다.
은희야!!!!!
너희 가계는 역시 문학과 예술에 소질이 있는 DNA를
가지고 태어난 가족들이구나.
그러니 또 산이 할아버지 같은 분과 이상이 맞고,
대화가 통하니 결혼 한거고.....
천생 연분이 따로 없는 환상의 짝꿍을 만났으니
성공한 인생이구나.
?순영아~
학교에서 역사과목의 중요성을 잃고 있다던가 하던데..........
뜬금없이 인천역사가 뭔?.....하고 재미없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도 했다만
이런 흐름들이 결국은 뿌리없는 인간성을 조장한다는 생각이다.
뿌리가 없으니 위 아래도 없고 부모자식지간에도 근간이 흔들리고
나 부터가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생각보다 읽어보니 재미있는 부분도 많고 익히 들어서 아는 분들이
그렇게 훌륭한 분들이셨다는 것에 반갑고 우리동네가 예전엔 그런 유래가 있었구나 하니
또 반갑고 하더구나................
...고3때 담임 이셨던 최 경섭 선생님께서 졸업 할 마지막쯤에 내 오라버니라는 걸 아시고는
놀라시더라 시인이셨으니 그러셨겠지.........그것도 내가 이야기 안해드렸는데
....그리고 서 순석 선생님께서는 졸업한뒤에 아시고...세상에나 ...하셨지. 국어과 선생님들이시니 그러셨겠지.
우리 친정은 아주 독특한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내가 성공한 인생일가?
아직도 진행중인 인생이 남았으니..............가봐야 알겠지.
?........ 시인 이시고 그시기에 예술원회장을 지내신 고 조병화 선생님의 축간사...........
인천 이야기를 김양수가 [인천개화백경] 이라는 이름으로 엮어낸다고 한다. 나는 한시절 인천에서
교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시인으로 첫문단 진출을 한 곳이 그곳이었고 또한 노년에 이르러 인하대학교 부총장과
대학원장을 지낸다음 정년을 맞은 곳도 인천이었기에 김양수가 인천 역사 이야기를 책으로 소개하기 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보며 환영할 뿐 아니라 기대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나의 자전 에세이 [떠난 세월, 떠난 사람]
속에 김양수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기에 옮겨 본다.
......나는 그 시절 제4시집 [人間孤島]를 출간했다(1954년 3월 20일, 산호장). 인천의 김양수가 주선해 준 시집이다.
김양수는 나의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제자이며, 실로 조숙한 문학 소년이었다. 그는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과
한국평론가협회장을 지낸, 우리 문학평론계의 대가가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엔 10대 문학 소년이었다.
인천의 한영사 사장 김성민 씨가 출판비를 제공하고 역시 산호장(대표 장만영)에서 1000부를 출판했다.
교정, 인쇄, 모두 김양수가 해 주었다. 김양수는 베레모를 쓰고 다녔다. 술을 많이 했다. 알뛰를 랭보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경성(李慶成 당시 인천시립박물관장, 나중에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 씨와 김양수와 나는 자주 인천
"청탑" 이라는 곳에서 술을 마시며 침전해가는 인생의 밤과 어둠을 지냈었다. 그때 그 김양수와 우리의 모습을
시집 [인간고도]속에 다음과 같이 하나 남겼다.
베레모를 쓴 하얀 시인이
양주를 들고 청탑을 연다
황해에 가린 깊은 항구
1954년 1월 序夜의 氣候는 차다
오, 알뛸 랭보
不良하다는 것과 不幸하다는 것과
선한 인간의 슬픈 유산을 위하여
뜨거운 감정의 이 포말을
"나의 불행에 후회가 없듯이
끝까지 왔다.
나와 헤어져서 슬픈 사람은 없다
...........,
아듀."
어둠이 술술
술술 눈이 내리는
밤, 우리들의 밤
시보다 잠에 취한 소녀는
난로를 지키고
베레와 양주와 시인은
돈, 돈, 돈, 돈,.............고독.
그 시절의 이 시 한 편을 회상하며 김양수의 인천 이야기 [인천개화백경]을 축하한다.
??1. 개척문화의 선구지 인천
? 우리 나라 지형을 한동안 "토끼" 형상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에 의한 조작이었고
원래는 "호랑이" 형상이었다는 설이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다면 인천광역시는 바로 "호랑이"
배꼽 쯤에, 서울은 그 심장부 쯤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인천은 수도 서울의 관문,
요충이 되기 이전에도 선구적 개척지로서의 소임을 해 왔다.
인천의 지형은 두 줄기의 계통적인 산맥에서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 산맥은 지질 구조상으로 마식령
산맥과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속한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 산맥의 한 줄기가 남북주향의 산계인데 마식령 산맥에서
연속되는 것이다. 이 산맥에는 북으로부터 천마산, 국사봉등 500m 이상의 준봉에서 시작하여 김포 반도에서
문수산을, 강화도에서 고려산, 마니산을 형성하고, 문수산은 다시 인천시 북쪽에 계양산을 이루었고 철마산,
주안산에 이르기까지 해안선과 거의 평행하면서 남북으로 뻗어 구릉성 산지해안을 이루었다.
또 하나의 산맥은 남동주향의 산계인데 이 구릉군은 인천시내 중앙으로 뻗어 이로 인하여 평야의 발달이 없고
불규칙한 구릉지의 분포 상태로 해서 지역 간의 도로가 고개들로 이어졌다. 구시가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구릉군은
시내 한복판에 응봉산(자유공원) 을 비롯하여 도원산 송림산 등 50m정도의 낮은 산을 이루었으며 수봉산과
문학산은 비교적 규모가 큰 산지이다. 인천의 산 지형의 특성은 험준하지 않고 산지의 산성취락 발달과
관계가 있다. 이 산지들은 기복이 낮기 때문에 그 아래도 흐르는 하천들은 측방침식을 계속하여 노년기의
준평원을 형성하고 있는데 부평평야가 바로 그것이다. 이 산지의 계양산은 시생대의 결정판암이며 문학산은
중생대의 경질화강암으로 형성돼 있다.
? 인천은 큰 산이 적고 지역이 협소해 큰 하천이 발달할 수 없었다. 서쪽으로 면한 해안은 출입이
복잡한 리아스 식 해안으로 간만의 차가 심하여 간석지가 발달하였고 항만 한복판을 월미도가 가로막아
자연적으로 내항을 이루게 하고 있으며 영종도, 팔미도, 영흥도 , 용유도, 덕적도,등의 여러 섬이 또 하나의
큰 내항을 만들어 놓고 있다. 또한 인천 앞바다 도서의 중앙에는 비교적 높은 산으로 영종의 백운산, 덕적의
국수봉, 대무의도의 호용산등 비슷한 높이의 준봉들이 우뚝 서 있다.
인천이 역사적 문헌에 뚜렷이 나타난 것은 2천 년전 백제 건국의 비류 설화부터이다. 거기에 보면
졸본부여에서 비류와 온조 두 형제가 내려와 새 천지를 개척하기 위해 남하해 와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하고
비류는 미추홀로 불리는 인천 문학산에 도읍을 정했다. 인천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문학산을 중심으로 한
옛 인천읍지, 인천지역과 계양산을 중심으로 한 부평지역, 개항 후 새롭게 인천이 국제 무대 앞에 나선
항도로서의 역활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것은 인천이 지리적 위치로 하여 개척 문화의 선구자
구실을 언제나 해 온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인천에는 이미 문학산을 터전으로 비류에 의한 미추홀 왕국의
개국이 있기 전에 실제로는 신석기 시대 중간기와 금속 병용 시대인 5 천년~6 천년 전 부터 태고인이 정착해서
유물과 유적이 남아서 그 존재를 입증해 주고있다. 뿐만 아니라 인천은 삼국 시대 이전 진국에 속해 있었으며
삼한시대에는 마한 50여 개 국 중에 진왕이 다스리는 목지국에 해당되는 나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뒤 백제 시대
에는 비류 개국 시절의 고호 그대로 미추홀로 불리웠으나 고구려의 지배하로 들어가서는 매소홀이 되었고
신라의 지배로 들어가서는 소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는 경원군, 인주, 경원부 그 다음에 인천으로
굳혀졌다. 이렇듯 인천은 여러 차례 지명이 바뀌는 계기를 가져왔고 그때마다 요충지대임을 입증해 보여주고 있었으며
또 개척 문화의 선구적 모습을 보여줘 왔다.
숙자후배 반가워요~
나도 마찬가지랍니다.
일년간 맡은 게시판지기 하려니 막상 대문글 만들기가 만만치 않더라구요.
우연하게 서고 정리하다 저작권 문제도 , 또 내가 관계가 있어 이야기 끌고 나가기
쉬운 책을 집어들게 되었지요.
숙자 후배처럼 나도 나 살던 동네 , 학교, 몇몇 추억속에 , 또는 기억속에 명소
약간의 인천역사 ,역사속에 알려진 인명 정도 였으니 말이지요.
우리 오라버니 인천개화백경은 작자 후기에 보면
고 일 선생님의 [인천석금] 이경성 선생님이 집필하고 유희강 선생님이 펴낸 [인천안내]
그리고 최성연 선생님의[개항과 양관역정] 이종화 선생님의 [문학산] 신태범박사님의[인천 한 세기]
박광성 교수님의[한국중세사회와 문화] 조우성 시인의[년표로 본 인천현대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책자는 시인 조우성시인과 작가 이기윤형의 편찬기획과 가아 [오라버니 큰아들] 근성의 원고정리가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오라버니 후기의 중요한 점을 든다면
<위에 열거한 책들 자료들의 뜯어맞춤과 다름 아니므로 앞으로 후학들이 제대로 정리할 날이 있으리라 믿으며
이 책이 나오기까지 격려하고 뒷받침 해주신 이경성 조병화 지 용택 원종원 오광철 이동석 박노호 김재식
선생님들에게 감사한다는 내용이 실려있더군요>
1998년 이후에 나온 더 훌륭한 인천사가 분명히 출판 되었을거라 생각됩니다
13년이 지났으니 말이지요.
13년이란 세월도 기록된 인천사 한번 알아본뒤에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인천 지명에 대한 부분에서 찾아보면
삼국시대의 미추홀 또는 매소홀, 신라 경덕왕때의 소성현, 고려시대의 경원군, 인주 로 환원되었다가
태종 13년에 인천으로 개칭되면서 지금까지 인천이라는 지명으로 불리웠다고 하는군요.
?
??
은희야~~
우리 마음의 고향! 인천이란 곳이 이렇듯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그런 곳이었구나!~~~
너의 오빠되시는 어른! 문학가이시며 내 고장에 대한 애향가이신 분이구나!~~
늦게라도 이렇게 인천의 진가를 세세히 알게 돼 반갑고 긍지가 느껴진다!~~~
애 쓰는 김에 더 많이 올리려므나!~~~~~구석~구석~~~~!!
?희순아~
마음이 아주 많이 착잡하다.
생각을 다시 가다듬고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본다. 그리고 중간 중간 발췌해서 써보려고
네가 살던 구 시가지 또 동인천역의 처음 모습등......처음으로 선교사들이 들어온곳도 인천이고
...내리교회가 ........등등.....
그래 어떻게 하면 좀 지루하지 않게 쓸가 고민좀 해봐야 겠다.
시골 정거장을 연상시키는 역사 낙성식모습. 현재 이 자리에는 백화점이 들어서 있어서
옛 정경을 알 길이 없다. 구경꾼들의 차림새가 궁핍했던 시절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국내 최초의 철도 개통
영국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기차가 개통된 지91년 만인 1899년 9월 18일 인천에서
노량진으로 이르는 우리 나라 최초의 철도가 개통을 보았고, 1900년 7월 5일에는
한강 철교가 준공되어 11월 12일 정식으로 서울과 인천 간의 경인 철도가 기적소리도
요란하게 달리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한강 철도가 준공된 같은 7월달에 경인 간 시외 전화 업무가 또한 우리 나라
최초로 개시 되었고 바로 전년인 1901년에는 경인간 철도 우편물의 운송이 시작되었다.
근대적 문명 이기의 보급이 인천 개항을 기점으로 전개된 것이다.
인천 최고의 신식 교육 발상지
인천 영화학교는 1893년 3월 12일 미국 선교사 조원시에 의해 내리교회 안에 설치되었다.
인천에서 가장 오랜 교육기관으로 1905년 처음으로 초등과 졸업생 17명을 배출시켰다.
사진은 일제하 학생들의 모습.
?인천 개항은 또한 신문물의 도입의 일환으로 몰려든 외국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의 방편으로
의료 봉사 활동과 교육 사업 활동이 펼쳐졌다. 서양 종교의 좌우축과 같은 아니 쌍두마차와 같은
역활을 의료 시설 봉사와 교육 사업 활동으로 전개해 나갔다.
이는 1885년 제물포항에 입항하여 서울 입경을 기다리던 [아펜젤러] 부부가 제물포구 선상에서
선상 예배를 통해 시작했고 1890년에 현 내리교회 위치에 교회당을 지었다. 선교 활동을 더욱
자리잡히게 할 목적으로 2년 뒤인 1892년 4월 영화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 학교를세운 [죤스]에
의해 또 2년 뒤인 1894년 여성 교육을 위한 영화여학교가 세워졌다.
처음에는 미스 죤스가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 채용한 여성으로부터 한국말을 배움과 동시에
신앙심을 주입시키려 한 것이 동기가 되어 그 여성에서부터 신교육이 실시되면서 신여성 교육이
발단이 되었다고 하는데 쓰게치마를 쓰고 다니는 여학생들에게 처음에는 월사금을 걷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을 줘가면서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어떻든 인천 개항을 본 지 10년 만에 이 고장에 신교육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영화여자 학교가
열린 다음 해인 1895년에 관립인천외국어 학교(인천고의 전신)가 개교되었고, 5년뒤인 1900년 천주학방
에서 출발한 인천박문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그로부터 7년후인 1907년 5월에 인천 공립보통학교(현창영초등학교)가
개교를 봤다. 이와 함께 전통 의료업인 한방밖에 없었던 이고장 인천에 1883년 5월 일본인 거주민을 위한
현대 의료 시설이 일본 영사관 내에 설치된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한 현대 시설을 갖춘 병원은
영국 성공회 [비숍 코오프]주교를 따라온 미국인 의사 [랜디스]박사가 1890년 10월 성 누가병원을
세움으로써 처음 개설을 보게 되었다.
그러고보니..........학교로는 영화학교가 첫번째로 설립되었고
그다음이 인천고.........그다음이.....박문학교............그다음이 창영초등학교 이네요.
영화학교는 역사가...........119년이 되었군요.
??영화학교가 그렇게나~~~학교이름을 들어 본 것 같네!~~~
역사가 깊다는 창영이 박문보다 나중이었구나!!~~~
언젠가 초등 전체 체육대회를 한다하면서 개교 연혁을 쭈욱 열거했던 표를 본 것도 같네..가물가물...
사진의 은희 너의 오라버니 모습하고.. 네 모습이 남매가 틀림없네..
인천의 역사를 알수 있으니... 재미있다..
우리 아버지가 창영 졸업을 하셨고..
우리 엄마는 영화여 학교를 졸업하셨고..
우리들 5남매가 모두 창영 출신이거든..
나도 박문학교 보다는 창영이 먼저 생긴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네..
언젠가 야구 영화를 보니... 우리나라에서 야구가 제일 먼저 시작된것도
인천이라고 하더라구.. 배타고 선교사들이 인천으로 들어와서
인천 4H 구락부 사람들에게 야구를 처음 가르쳤다고 하더라고..
인천을 28살에 떠나서 경상도에서 햇수로 39년을 살았는데도
누가 물으면 난 인천사람이라고 하거든..
살아온 햇수로 따지면 부산사람인데도 말이야...
인천의 역사 이야기 갈무리 해 놓아야 겠다..
인천 사람이 인천을 말할때 기본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상식이니까..
재밌는 얘기 기대돼.
?은숙아~
야구 이야기를 하니 어릴때 생각이 나는구나
초등학교 다닐때 우리집 일하는 아저씨와 함께 구경갔다가 야구공이 튕겨져서
하필 나한테 날아와 맞아서 멍이 들었었던 기억이있단다......둘째 언니도 따로 왔다가
어린 동생이 공에 맞은걸 보고 깜짝 놀라서 쫓아와 보고는 언제 너는 왔냐고 해서
우리식구 모두 야구를 좋아하는걸 알았다는거 아니냐....나는 남동생들과 야구 글러브 끼고
야구놀이도 했다.........공 주고 받는 수준이긴해도......
네말대로..........이런 제목으로 이 책에도 있단다.
야구 인천, 체육 고장의 향수
인천은 체육열이 대단히 높은 고장이었다. 지금 자유공원 언덕 아래 제물포고교 운동장이
1930년대 이전에는 "웃터골 운동장" 이라고 호칭되던 인천 최초의 공설 운동장이었다.
개항 뒤 영국 함선이 친선 방문차 인천항에 기항했던 길에 영국 수병들과 우리 나라 청년들간에
최초의 축구 시합이 벌어졌었다. 해군 팬티 차림인 영국 수병들은 무엇을 신고 뛰었는지 몰라도
우리 청년들은 처음 짚신을 신고 뛰다가 중간에는 모두 맨발로 뛰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축구 시합에 해당하는 시합이라고 하며 인천의 젊은이들이 스포츠광의 기질을 보이는
최초의 사건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엄복동을 효시로 사이클에서 김호순 이홍복이 아시아를 재패했지만 60년대까지 인천은
야구의 고장이었다. 일본 한큐팀 선수였던 유완식, 역시 일본 코시엥에 출전했던 김선웅, 장영식 그리고
연전 선수인 박현덕 그밖의 심연택, 박근식, 이연구, 한광희, 이용국, 홍병창, 한득봉, 유인식등이 박칠복회장,
최문혁감독, 강세희, 박문원 메니저를 중심으로 인천팀을 조직하고 해방 후 미군과 친선경기를 가지면서
"야구 인천 재건"에 힘을 쏟았다. 그것은 일제시대 경인기차 통학생 운동부를 기반으로 한용단이라는
야구팀을 만들었고 민주당 정권때 국회의장을 한 곽상훈이 단장으로 이들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에 야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고 민족 운동과 같은 것이어서 일본팀과 시합이 있는 날은 인천의
온 관중들이 물밀듯이 밀려들고 일본 심판의 편파적 오심이 떨어지면 곽상훈 단장이 달려나가 일본 심판을
두들겨 패는 소동이 벌어지고 시민들의 박수갈채가 터지는 민족적 울분 해소가 전개됬던 것이다.
.....<계속....합니다.>
은희야,
김양수 선생생님이 큰 오빠로 옆에 계셨으니 인천 역사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겠니. 참 훌륭한 분이시로구나.
난 인천이 제2의 고향이지만 이렇게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의
일부분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이 글을 보고 새삼 느낀다.
학교의 역사도 흥미롭고.... 아펜젤러의 제물포 항의 의료와 선교 활동의 인연도....
사람이든 지역이든 물론 국가는 말할 것도 없이
지난 역사는 어떠한 면으로든 지금 현재를 잉태해 놓은 연결고리로
작용하는 걸 보면서 미래의 역사도 만들 수 있다 생각하니
다시금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니....그래서 인천을 다시 조명하게 되는구나.
좀처럼 보기 힘든 우리 인천의 역사를 관찰할 수 네 글 ,,, 두구두고 읽어 볼테다.
?영선이 왔구나~
오늘 오랜만에 오라버니에게 전화 드렸네.
내 다리 다친것 자꾸 걱정하시니까 전화 안 하려고 하다 어제 만난
후배 아버님이 아주 내 어릴적부터 뵙던 오라버니랑 가까우셨던 분이셨어서
그분의 딸인 후배가 오빠보고 양수씨라 하더란 이야길 전해드렸네
반가워 하면서 이런저런 옛이야기 한참 니누었는데
얼마 시간이 흐른후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스승님이셨던
조병화 선생님께서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을 하셨는데......말년에 팔순이 되시니
좋아하시는 약주도 못하시고 여행도 근력떨어져 못다니시니까....심심하시다고
너무 오래살지 말고 빨리 죽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하시더라
오라버니 자신 이야기를 그리 빗대어 하시는게 아닌가..........한동안 말문을 열지못했지.
조 병화 선생님처럼 생전에 저서도 많이 출간하신 분도 드물고
세상적으로 부와 명예를 다 가지셨던 분이..........죽음을 원하시고 곧 원하시는대로 돌아가셨으니
그래서 더 그러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긴했다.
인천이야기 홈피에 올린다고 하니까........누가 관심을 갖기나 하느냐고
세상이 이기주의가 팽배해져서 옆집도 모르고 사는데 자기 사는고향을 궁금해 하기나 하냐고
....너도 늙어가는구나..........고향이야기에 관심을 두는걸보니...
.....잠깐 맡은일이 있는데 공통관심사가 될일을 찾다가 ...그리되었노라 했네.
.........그래...하면서....허...허 웃으시던 오라버니의 공허한 웃음소리가 몇시간이 지난 이 늦은밤에도
귓전에 남아있는구나.
어제는 나드리에서 즐거웠고.........오늘은 맥이 빠져서 우울했네.
또 내일은 손주들 바라보면서 맥빠질 여유도 없을거겠지만 말야.
은희언니..... 저 이 책 한권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요? (교보? )............ 얻을 수 없다면 혹 제가 사본을 만들어도 될려나요?
???순애 후배~
우선 이 책에 보면 친정쪽 어른이신 송암 박 두성 선생님도 나와 있지요
여러 훌륭한 어른들 책들을 모아 엮은 한권의 책이라서
인물을 간단하게 거론한 정도이지만....역시 인천 출신의 훌륭한 인물이시지요.
저 위 3기 숙자후배에게도 이야기 했지만
이책은 13년전 책이라서 이후에 더 세밀하고 정확한 책이 나온걸로 압니다.
너무 두꺼워서 ......사본 만들기에 힘들텐데
인천출신의 훌륭한 인물중 혹 이승윤씨도 나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분은 경제학자로써 미국서 공부하시고 대학교수로 계시다 후에
재무장관, 국무부총리. 국회위원을 여러번 하셨지요.
언제 한국에 가거나 뉴욕에 가면 그책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숙자후배~
엊그제부터 양 이틀간에 걸쳐..........
옆지기 때문에 병원 출입 하느라 이곳에 글을 남기지 못했네요.
일찍 답변을 주지못해 미안해요
이책은 말한바와 같이 13년전 출판된 책이라서 빠진 부분이 있지않나 싶구요.
그래서 내가 한번 찾아보았네요.
인천처럼 반골인 지역이...그러니까 야당세가 강한 지역이 없었지요.
지금은 그런 기세도 꺾인듯 하지만요.
이 승윤씨는 미국 위스콘신 출신 경제학 박사시고 서강대 교수도 하셨더군요.
?국회의원을 박정희시대때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하셨구요.
?재무부 장관도 그 시절에 하셨고
?김영삼 정권때 부총리도 하셨군요.........실력이있는 분이셨나 봅니다.
?아마도 인천에서 나온 다른 책에선 등재되어 있을지 모르겠어요.
인천고등학교 출신이시니 분명 인천출신이 맞으신데.................................
보면은 인천출신이신데 타지에서 더 많은 활동 하신분보다
타지 출신이신데 인천서 많은 활동을 하신 분들이 인천의 훌륭한 인물이라고 거론되었드군요.
은희 선배님 내가 질문을 해놓고도 미안한 마음이었지요.
곧 미국 여행을 떠날 준비도 하셔야 되는데 부디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바라며 이승윤씨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그분도 인천 유명록에 있나 궁금했었지요.
???숙자후배~
오히려 난 고마운걸요..........글을 읽어주고 관심가져주니
글 올릴 맛이 더 나거든요.
참 세상사가 그렇더군요...........역사란것도 그렇구요 잣대를 어디다두느냐
아주 객관적으로 기술하기가 어려울것같은데
그때 그때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가에 따라서 엄청 달라지기도하고
역사는 역사니 객관적으로 아주 공평하게 하기가 어려워서
오히려 조선시대나 그 이전에 역사기술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을때가 공명정대하였던거 같읍니다.
임금의 잘 잘못을 또 시대사항을 그대로 기술하려고 했다지요.
그러니 폭군은 폭군으로 우리가 알게되지 않았을가싶네요.
일본이 지금 역사를 자기들 이익을위해 거짓으로 만들고 있는거를 보면
괘씸하다는 생각도 납니다.
욕심많은 사람들이 모두 하는짓이니..........
우리들 누구라도 옳바른 의식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풍물 인천의 재조명
1. 문학산과 그 주변
? 인천의 문학산이야말로 부평의 계양산에서 하나의 지맥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와서
이루어진 산으로 인천의 주산인 것이다.
"문학산" 이라는 이름은 [여지도서]란 문헌의 인천조에 처음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비록 "문학산" 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지는 않아도 [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인천부의
남쪽 2리 쯤 되는 거리에 남산이 있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고적조에 남산 고성이 돌로 쌓였고 둘레가 430 척이라고 해 놓았다. 이 남산이 바로
문학산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짐작되는 바는 어느 고을이고 부치의 위치에서 보아 남쪽으로
보이는 산은 대체로 남산, 또는 안산이라고 부르는 관례에 의해서라고 한다.
....고도 미추홀의 터전......
문학산은 연수동의 북쪽, 산성 마을의 남쪽, 학산마을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산으로
숱한 전설과 많은 고적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세기 전 인천항이 제물포구를 중심으로
개항을 보기 전까지 그리고 개항지 부근으로 부치가 옮겨가기 전까지는 분명히 인천의 주산이
문학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항지 중심으로 신도시가 형성되고 부치가 옮겨가면서 마치 응봉산이
인천의 주산인 것처럼 착각한 적도 있었다.
..............문학산이 우리들 기억속에서 가장 남는 지명중에 자리를 잡아서 역사를 알고보니
더 흥미롭더군요..........인천에 다녀와서 다시 계속 하지요.???
???한때 인천의 부역이 개항지 중심으로 오므라들고 옛 부치가 있던 관교동 일대가
부천군역으로 흡수된 일이 있었던 데서 오는 현상인지 모른다.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했어도 그 동안은 문학산이 인천 지역의 역내에서 벗어나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인천부역의 확장과 함께 문학산은 다시 인천 역내로 복구되어 들어왔고 인천의 주산은 역시 문학산이
틀림없음을 실증해주게 되었다.
그렇지만 문학산이 인천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단순히 주산이라는 데에만 있는것이 아니고
인천이 역사 상으로 그 이름을 처음 드러낼 때 문학산이 중요한 터전으로 등장한다는 데에 있다.
[여지도서]에는 문학산 정상에 문학산성이 있으며 이 산성을 미추왕의 고도라고 기록해 놓았고 또한 안정복은 그의
[동서강목]에서 문학산지에는 비류의 성기가 있고 성문의 비판이 남아있다고 해 놓았다.
여기 말하는 비류란 말할 것도 없이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형인 것이다.
그리하여 인천의 옛 이름이 미추홀이고 비류가 인천에다 나라를 세웠다하여 나라 이름을 비류 백제라고도
하는데 그 터전이 문학산성이라고 전해지고 있어서 문학산은 인천의 출발과 함께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은희 선배님 덕에 인천 역사와 지리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문학산이 인천의 주요산인줄도 모르고
어렸을때부터 외할머님 한테 어머님의 두동생들이 논현동에서
걸어서 그당시 유일한 국민학교인 그 멀고도 먼 문학 학교를 다녔다는군요.
후에 논현동에도 학교가 세워지기도 했지만요.
그당시 문학 학교를 걸어 다니든 두분은 아즉 살어계시고
그중 한분이 바로 이승윤씨 입니다.
언제든 인천에 관한 책이 있다면 꼭 사서 볼것이며
이런 글을 올려주신 선배님께 감사드림니다.
미국 여행을 마음껏 즐기시고 다시금 멋진글을
올려주시기 바람니다.
???숙자후배~
고마워요......................
숙자후배 외가가 문학학교.........그러니까...문학이란 지명과
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였군요.
인천은 바다와 접한 곳이라서 개항에 얽힌 파란만장한 역사가 있고해서
그 부분이 엄청 많이 이 책에 쓰여 있네요.
우선 잠깐 개항역사는 비켜나서 우리가 자라던 고향의 이름 떠올리면서
알고싶더라구요..........그래서
문학산과 그 주변, 계양산과 그 주변, 응봉산과 그주변,수봉산과 그 주변
월미산과 그 주변, 송림산과 도원산, 산 이름 고개 이름,
남동공단과 소래포구..........................
미국다녀와서 써 보려합니다.
우리 가는 쪽에 살고있지 않아서 얼굴 보고오진 못하겠군요.
자리비운 사이에도 우리기수방 잠깐씩 기웃해 주세요.
그럼 건강하시길............
이 책은 1998년 9월 18일 발행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