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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다치기 바로전날  나는 몇년 쓰던 전기밥솥이 전 같지 않고 슬슬 나이든 치레를 하길래

새로 나온 신형 전기밥솥을 주문해 놓았었다.

그리곤 새로 배달된 전기 밥솥은 구경조차 못한채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새로온 전기밥솥은 유명무실하게 아무런 구실도 못한채 부엌 한켠 구석지에 쳐박힌채 잠을 자고 있고 

안주인 없는 우리집 부엌도  별수없이 문을 닫고 한동안 휴업을 한 상태였다.

 

그러구러 퇴원한지 두어달이 가까워오는데 비록 목발은 짚었지만 오늘에사

 처음으로 부엌에 나가 스스로 무쇠솥 에서 숭늉을 내 손으로 떠서 마셨고

무쇠 솥뚜껑 무게의 실체를 다시 느껴보고 더불어 무쇠솥 모양세도 다시 천천히 살펴 보았다.

 구입해서 얼마 못쓰고 방치해 두었던 기억이 나긴해도 모양세도 까맣게 잊고 있어서 말이다.

인천 이란 큰 도시에서 살았어도 내가 시집오기 전 살던 친정집도

대가족이 함께 살았으니 당연히 부엌에 큰 가마솥이 세개나 부뚜막에 걸려 있었었고

적어도 결혼 하기 전 까지도  무쇠솥을 이용해 만든 온갖 음식을 먹고 살았던 기억이다.

그러나 결혼후에 나는 그런 재래식부엌이 있었던 시절이 언제였든가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었는데

우리집  산이 할아버지는 특이하게 가끔 젊은시절에도 몸이 부실해 질락 하면

옛날 어머니가 해주시던 가마솥밥맛을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던차에 이곳 고향까지 내려와 살게되었으니 장작때는 가마솥은 말더라도 무쇠솥은 구입하자고

종종 밥맛타령을 다시 하기 시작하는것이여서

"그래 가마솥은 걸지못한다 하더라도 그 무쇠솥밥을 한번 해주마" 하고

경기도 여주까지  일부러 찾아 내려가 

 십인용쯤 되는 적당한 크기에 무쇠솥을 마지못해 구입한것이였다.

여차저차해서 큰마음먹고 들여온 무쇠솥이니 그래도 들기름을 매겨 곱게 길을 들이고 

사용을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만만한 일이 아니였다.

옛 재래식 부엌에서 사용할때는 항상 걸어놓고 쓰니 무게를 느낄 필요도 없었겠지만

가스테이블을 사용하는 입식부엌에 사용하려니 작은 무쇠솥이긴해도 항상 들어 나르고 닦고

해야 하는데 닦기도 귀찮고 또 그 무게가  장난이 아니였다.

밥맛이고 뭐고간에 슬슬 꾀가 나기 시작하는데 때마침 손목을 다치는 일이 생겨

안성마침으로 그 무거운 무쇠솥 다루는일은 자연스럽게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밥은 커녕 다른일도 못하게 될 처지라니 어쩌겠는가 말이다

그리곤 전기밥솥회사들의   경쟁속의 더욱 개발되어 편리해진 전기밥솥을 구입해서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출타하면서 예약도 해놓고 입맛대로 밥맛도 조정해놓기도하고 밥이 다된 시간도 알려주니

밥짓는 어려움은 잊고 살면서 얼마간 입맛을 당겨주었던

무쇠솥밥맛의 기억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잊고지냈었다.

그런데 나 없는새 부엌 밥짓는 주인공이 바뀌자 잠자던 무쇠솥이 깨어나

제 역활을 하면서 우리집 밥맛은 무쇠솥밥맛으로 확실하게 자리잡기 시작하니

새로 구입한 전기밥솥은 그저 보온밥통 역활만 한채로 놓여있다.

 

 

실은 밥솥 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 인듯 하지만 전업주부이던 내가

 자동차운전과 밥짓던 일과 연관되었던 일이 생각나  이글을 쓰게 되었다.

 삼십여년도 넘은 일이라서  언제였던가  기억이 어슴프레해서 년,월,일은 정확하진 않지만

그당시 부모님 가업을 이어 장거리 출타를 자주 하게된 우리부부는 일찍암치 운전을 배워

지금처럼 차가 많지않던 시절에 자동차운전을 했었다.

 그것도 여자들이 면허취득이 어렵다던 1980년대 초기에 자동차운전면허를 용케도 단번에 따고는

겁도없이 면허취득한 그날로 실제 연수도 없이 길거리에 용감하게 나섰었다.

그때가 삼십대 중반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겁이 없을 나이긴하다.

 지금처럼 여성운전자들이 많은 시절이 아니라서인지 보는눈이 확연하게 달랐었는데

지방엘 가면 여성운전자들을 흘깃거리며 신기해 했었고

도시에선 가끔 보이는 여성운전자들을 보면 비아냥 거리는 소리를 종종 하곤했었다

거기다 운전이 좀 서툴러 보인다치면 당장 들려오던소리가 있었는데

"집에 가서 솥뚜껑 운전이나 해라"  그땐 겁도나고 미안해서 그소리도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못한채 그 자리를 피하는것이 급선무였었다.

또한 으례히 여자는 부엌살림을 도맡아 해야 하는본분이 있어서 

저리들 이야기 하는것이겠거니  했으니 그러했으리라

 

요즈음엔 우리나라 인구중 여성운전자들이 거의 남성운전자들 수 만큼 많아졌고

따로 솥뚜껑 운전수란 소리를 듣지않아도 될만큼 자동차운전이나 부엌일이나

남녀의 구별을 둘 만큼 분리가 되어있지도 않다는 생각이다.

우리집만해도 아들'며느리 구분없이 하게되면 하게되는것이 밥짓는 일이고

부엌살림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힘들게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대접만 받던 남정네 시대는 아니니 말이다.

거의가 맞벌이 부부가 많은 시대이니 바깥일 집안일 구분하는것도 구태의연한 소리가 되어

있는 실정이고 자동차운전을 꼭 남자가 잘하라는법이 없듯이

여자가 솥뚜껑운전이라 불리우는 부엌살림을 꼭 잘하라는법도없는것이다.

자동차운전이든 솥뚜껑운전이든 남녀 모두 잘하면 좋은시대가 되어가고있다.

 

내가 병원서 퇴원한뒤 우리집 부엌살림은 자연스럽게 분업이 되었다

밥짓는일은  산이할아버지가  스스로 무쇠솥밥을 짓는데 누구보다 출중하게

밥을 지었고 며느리도 그 솜씨를 아직까지도 흉내를 못낸다.

병원퇴원후 나는 불편할게 뻔한 무쇠솥밥짓기를 하는 본인에게

전기밥솥 하나면 만사 편하게 할일을 만들어서 힘을 쓴다고  툴툴 거렸지만

그건  앉아서 받아먹기 미안해서 공연히 하는소리였던게 되었고

분명한건 무쇠솥에서 잘 잦혀지고 뜸도 은근하게 잘들여져 지어진 밥에

 노릇노릇 누른 누룽지는 긁어 손주산이의 솥과자란 이름의 간식으로 불리우고

 구수한 숭늉도 매일 먹게되니 식구 어느누구도 이젠  전기밥솥 타령은 아예 꺼내지도 않는다는거다.

그리고 부엌에 드나들지않고 어머니의  대접만  받던  그 어렵던 시아버지가

손수 밥을 짓는데 우리집 산이에미 예전처럼 손놓고 있지는 못하는 처지가 되었고

더불어서  시집온지 사년여만에 며느리는 반찬  만드는 일을 조금씩 전수 받아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고 지금은 솜씨가 많이 좋아지고있다.

아마도 내년 6월달에 살림 나기전 까진 우리집 대부분의 반찬 만들기에 전념 하지 않을가싶다.

내가 다치고 난뒤 서로 힘들어서 한동안 뒤숭숭 하던 집안분위기도 잘 잡혀가고

조금씩 환자에서 벗어나고 있는 나 또한 심신이 편안 해져 가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솥뚜꼉 대리운전수는 산이 할아버지 이다.

본인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무쇠솥 솥뚜껑 대리운전은 아직도 유효하다.

아니 앞으로도 상징적인 뜻으로 알려진 솥뚜껑이 아닌

실제의 상투끝 모양세의 손잡이가 달린

무쇠솥  솥뚜껑 운전수를 영구히 한다해도 말리지는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