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옥수수빵/신금재  


며늘아기가 찐빵 한 조각을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지난 번에 아버지 좋아하신다고 바나나빵을 만들었는데 오븐이 갑자기 되지않아 실패하였는데 이번에는 잘 될까 걱정하더니 아주 근사한 옥수수빵이 되었다.

노릇노릇 익어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 오르는데 옥수수빵을 한 입 베어물자 어느덧 나는 초등학교 1학년 1반 교실,

 안황자 선생님 옆에 가있었다.


정월생이라 초등학교를 일찍 들어갔는데 키도 작아서 언제나 맨 앞줄이었다. 

게다가 늦은 홍역을 치루게 되어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학교에도 못가고 집 담장 아래 양지쪽에서 해바라기를 하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찾아오셨다.

한 손에 옥수수빵을 가득 들고서.


앞치마에 물묻은 손을 닦으며 연신 고개숙여 인사하는 어머니 뒤로 학교에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한 선생님을 우리집에서 본다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개중나무 뒤로 숨기를 거듭하였다.

-금재가 많이 아프구나... 우리 금재 좋아하는 옥수수빵 먹고 얼른 나아야지---


그때 마음 속으로 나도 커서 저런 선생님이 되어야지, 하는 마음이 자리하게 되었을까.

앞 마당에는 가을 국화가 하나 가득 피어있었고 어머니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노란 국화 한다발을 드리며 수줍게 웃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 집 마당은 돌축대 위로 넓은 마당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 아버지가 기념으로 심었다는 개중나무를 비롯하여  작은 열매 따먹다가 우물가로 떨어지게 한 앵두나무, 

아버지의 명명으로 -잠시나마 그 이름이 나이롱나무가 되었던 내 유년시절의 라일락 향기 등.


우리집 마당은 사계절 내내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하루종일 종종대던 어머니는 저녁 무렵 애들아, 밥 먹어라, 소리쳐부르시면서 늘 하던 말씀--얘야, 애 본 공, 새 본 공 없다더라, 하셨다.


그래도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아이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왔고 눈오는 겨울이면 비료 푸대를 들고왔다.

어머니의 일거리를 더 많이 만들어주던 우리 집 마당, 늘 애 본 공 없다고 하시던 어머니.

그래도 뒤늦게 유아교육 공부하여 유치원 교사가 되었을 때 제일 좋아하시던 분은 어머니시다.


친정집과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면서 차를 몰고 지나다가 우연히 걸어가던 어머니를 만났던 날

집에 까지 모셔드리고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행복하였던지.


초등학교 일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가져다 주셨던 그 옥수수빵의 그 향기가 태평양을 건너와 새 둥지를 튼 이곳  캐나다에서도 방안 가득 퍼지고있다.


유년시절에 맡았던 달콤한 옥수수빵의 향기가 손자를 보아 할머니가 된 이즈음에 고향의 마당처럼 포근하기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