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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당선작--배꼽산/신금재  


금이가 사는 동네에는 작은 산이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그 산모양이 배꼽처럼 튀어나왔다고 배꼽산이라고 불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배꼽산을 바라보면 마치 누워있는 사람 모양이 보이고 가운데 배꼽처럼 톡,튀어나온 것이 아주 잘보였다.

어, 정말 배꼽산이네, 그런데 저 아래 쪽 펑퍼짐한 곳은 꼭 내 엉덩이를 닮았네

금이는 산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때, 하면서 오늘도 친구들하고 산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떠올렸다.

오늘은 도토리를 따는 날

배꼽산에는 여러 종류의 도토리나무들이 자라고있다.

상수리 나무, 종가시나무,졸참나무,돌가시나무 등이 산전체를 둘러싸고 있는데 가지고 간 기다란 장대로 나무를 툭툭 치기만하면 도토리들이 떨어지기를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금이네 엄마는 도토리묵을 잘 만들었다.

봄,여름에는 뒤란에서 잠을 자던 맷돌이 도토리묵을 만드는 가을이면 어김없이 앞마당으로 나왔다.

멍석 위에 누워서 며칠 동안 해바라기를 하던 도토리들을 엄마는 맷돌에 갈아 그 물을 가라앉혀서 도토리묵을 만들었다.

금아, 금아, 도토리묵 먹어봐라,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쫀득하게 잘 만들어졌네.

금이는 엄마가 만들어주는 도토리묵도 맛있지만 더 맛나고 재미나는  것은 도토리팽이 놀이였다.

도토리로 팽이를 만드는 일은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주어야하기 때문에 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야하지만 오늘은 앞마당 국화 손질에 바쁜 아버지를 차마 

부르지 못하고 혼자서 해볼 작정을 하였다.

도토리 아래에 붙어있는 열매 받침을 떼어내고 송곳으로 도토리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그 구멍에 이쑤시개를 꽂아주면 되었는데

이번에는 나 혼자 해봐야지.

송곳으로 도토리 구멍을 뚫다가 갑자기 송곳이 도토리 아래로 쑥 나가면서 손가락을 찔렀다.

아야.

국화밭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용수철처럼 튀어서 어느 사이 금이 곁에 서있는데 다행히 손가락을 조금 찔려 피는 금방 멎었다.

도토리 팽이 놀이는 혼자 해도 재미있고 친구들과 함께 팽이 게임을 하면 더 재미있는 놀이였다.

아랫집 영자에게는 늘 져도 윗집 사는 재수와 팽이 게임을 하면 언제나 금이가 이겼다.


여름이 갈 무렵 텃밭에 심었던 김장배추, 무우를 캐는 날이면 온 식구들의 손이 바빠졌다.

한 손에 배추, 다른 한 손에 무우를 들고 텃밭에서 앞마당까지 옯겨놓으면 엄마는 커다란 양동이에 소금을 풀어 절여놓고 배추속을 버무려  빨간산처럼 만들었다.

겨우내 김장김치로 엄마가 해주던 찌개, 부침 그리고 별미 만두 특히 청국장을 넣고  끓여주던 김치찌개는 새 봄이 되면 금이 얼굴을 뽀얗게 만들어주었다.

눈 내리는 배꼽산은 그대로 자연 눈썰매장

아버지가 텃밭에 비료를 주고 다 쓴 비닐봉지는 우리들의 눈썰매가 되어주었다.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 힘을 주고 밀어내면 언덕 아래까지 주루룩 밀려내려오는 썰매

바지가 다 젖어 물이 뚝뚝 흐르고 해가 서산 너머 질 때까지 하루종일 놀다가 엄마가 얘들아, 저녁먹어라, 하며 부를 때까지 지칠줄 모르고 타던 비닐 눈썰매

새해가 시작되면서 해가 좀 더 길어지고 산골짝에 눈들이 녹아가면 금이는 남자아이들하고 칡캐기에 나선다.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겨울나기를 하는 굵은 칡을 캐내면 아주 맛있는 간식거리가 되어주었다.

어느 사이 배꼽산 골짜기에 돌돌돌 물 흐르는 소리 들려오면 진달래 꽃망울이 하나둘 피어나기시작하였다.

진달래 꽃잎을 따서 먹기도하고 엄마에게 갖다주면 진달래 화전을 부쳐주기도 하였다.

원추리등 산나물을 따서 한바구니 가져온 날 저녁에는 나물무침에 나물 된장찌개 등으로 가난한 저녁 식탁이 풍성해지곤 하였다.

그날도 금이는 아랫집 영자와 나물을 캐러갔다.

오동배기로 올라가는 지름길 양 옆으로 미류나무들이 키재기를 하는 곳을 지나면 배꼽산으로 올라가는 약수터 계곡에 우리만이 아는 샛길이 나있다.

나물캐러 가는 길에는 자연 시간에 배운 여러가지 식물들이 길가에 있어서 우리는 서로 식물이름 알아맞추기 놀이를 하곤하였다.

그런데 한창 신이나서 산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금방 식물이름 알아맞추기 놀이를 하면서 보았던 패랭이꽃 사이로 알록달록 무늬를 한 독거미가 우리 발등 위로 지나가고있었다.

걸음아 날 살려라.

바구니를 내팽겨치고 영자가 먼저 달리기 시작하였다.

조금 굼뜬 금이는 던져진 바구니를 바라보다가 이내 영자 등뒤를 따라 뛰어가기 시작하였다.

오동배기를 지나 다다른 우리 동네 입구에 서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휴우, 한숨을 쉬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우리는 한동안 산에 가지 못하였다.

왠지 발뒤꿈치를 물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자꾸 그쪽으로 손이 갔다.


여름방학이면 해도 뜨기 전에 잠자리채 하나들고 곤충채집을 하러 다녔다.

논메뚜기를 잡으러 화교 춘서방네 논에 갔다가 빠지기도하고 배꼽산에 날아다니는 방아깨비, 따다깨비등을 강아지풀에 꿰어와서 소금 뿌린 후라이팬에 

구워먹었다.

금이는 고기를 먹지않아서인지 발육이 늦었다.

다른 또래들에 비하여 키가 작은 금이를 보고 영자네 할머니는 꼼이야, 꼼이야 하고 부르셨다.

느이 아버지 어머니는 저렇게 키가 큰데 너는 워째 이렇게 작다냐 하면서.

금이 동생들이 키가 훌쩍 커버리자 동네 사람들은 아예 동생들을 금이 오빠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어느 여름날 영자네 엄마와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바다에 나가 조개를 잡아오자고하였다.

금이네 엄마도 따라나섰다.

그시절에는 바다에 나가기 전에 서해안 조수 간만시간을 미리 알아보고  만조 밀물 시간과 간조 썰물 시간 등을 잘 따져서 나갔지만 무언가 착각이 있었던지

 금이 엄마 일행들이 조개를 담은 자루를 둘러메고 돌아서 나오는데 저만치 등 뒤에서 만조  밀물이 몰려오고 있었다.

네 명의 아낙들이 차례로 걸어나왔다.

나이순으로.

조개 자루를 버리면 조금이라도 걸음이 빨라질텐데 버릴 수가 없었다고 영자네 엄마는 나중에 회상하였다.

송도 앞바다 앞에는 그당시 방송국 안테나가 높이 솟아있어 네 명의 여자들은 그것을 등대삼아 걸어나왔는데 그중에 가장 젊었던 새댁이 아기를 갯벌 바위에 내려놓고 갔다가 그만 아기를 잃고 말았다.

우리 동네에는 봄이 되면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던 젊은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바로 그 새댁이라는 풍문이 떠돌았다.


캘거리로 이민온 후 금이는 매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민올 때 전화기 너머로 꺼이꺼이 울던 친정어머니가 아무래도 치매기가 있는지 전화기 너머에서 동문서답을 하곤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큰아들 집 문간방에서 친정어머니는 화장실 휴지를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곤 하였다.

배꼽산 너머 치매를 잘 치료한다는 어느 병원에 모시고갔을 때 의사는 이미 늦었네요, 하면서 간단한 검사를 하였다.

그리고 친정어머니는 우리가 살던 옛날집--검둥이들이 뛰어놀던 캔터지 옛집 같은- 텃밭에 가셨다가 넘어지셨고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큰아들 집에서 요양병원으로

요양병원에서 작은 아들집으로

그리고 다시 요양병원으로.


어머니의 굳어진 다리는 다시 펴질줄 몰랐다.

장작개비처럼 굳은 다리를 펴려고 주무르면 신음소리를 내면서 아파하였다.

배꼽산 아래 텃밭이 달린 작은 축대집에서 우리 삼남매를 키워내시던 강인한 어머니의 그 힘은 다 어디로 간것일까.

축대 아래 우물가에서 기숙사의 그 커다란 빨래감을 빨래방망이로 두드리던 그 팔은 어디로 가고 저렇게 앙상한 가지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몸.


배꼽산을 걸어보았다.

예전에 보았던 모습이 많이 바뀌어서 등산로가 많이 개발되었는데 유독 눈길을 끄는 노란꽃이 보였다.

금이는 노란꽃 위로 어머니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산길 

배꼽처럼 생겼다고 우리는 
그 산을 배꼽 산이라 불렀다
예쁜 이름 연경산을 두고도 

어린 시절 온산을 불태우던 진달래 
골짜기로 내려가 옹기종기 군불 지피는데 
노란 산수유꽃 지천으로 피어났다

생전에 좋아하시던 산수유꽃 보시려고 
어머니는 
그렇게 허망하게 산길로 가셨을까.

 

어머니는 그렇게 가셨다. 

배꼽산 아래 피어나는 산수유꽃 따라서.

금이는 지금도 가끔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곤한다.


어려서 할머니에게 장화홍련전을 들으면서 한글을 깨우쳤다는 어머니

감성이 풍부하여 페르시아 왕자라는 노래를 부르며 눈물짓던 분

당신이 더 배우고 싶었어도 고지식한 할아버지 때문에 교육받을 기회를 놓쳤으니 너라도 많이 공부하라고 격려해주셨는데---


사진을 들여다보며 금이는 옛생각에 젖어보곤한다.

아마도 그런 시간에는 어머니의 영혼이 배꼽산 눈꽃처럼 내려와 금이 어깨에 내려앉은 듯 가벼운 솜털이 날아다니는 느낌이 든다.


금이는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하였던 날을 떠올려본다.

아무래도 어렵겠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 나가버렸다.

금이는 의식을 잃고 헛소리를 계속하고 어머니는 소아과 병동 침대에 누워있는 딸을 위하여  밤새워 기도하는데 간호사가 들어왔다.

어머니 날이 밝는대로 이 아이를 큰 병원으로 옮기셔야합니다. 여기서는 살릴 수 없어요. 서두르셔야합니다.

금이는 여고 이학년, 입시준비가 한창일 무렵 원인모를 황달이 찾아오면서 학교를 휴학하고 인천 시내 병원을 순례하기 시작하였다.

심장판막증이다, 악성빈혈이다 하면서 의사들은 오진을 하였고 마침내 찾아간 부평성모병원에서 내복이 반으로 잘려나간채 대장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은 것이었다.

멀리서 개짖는 소리와 엿장수 가위소리가 들려오는 환청을 들으며 금이가 깨어났을 때 어머니는 병실 침대에 엎드린채로 기도하고 계셨다.

중환자실 바로 옆방이어서 매일 수술실로 들어가는 환자를 실은 수레의 바퀴소리가 여름장마 빗소리처럼 들려왔다.

꿈을 꾸듯 매일 들려오던 저 빗소리는 바로 환자를 실은 수레바퀴 소리였네.

금이는 천장에 매달아놓은 줄을 잡고 걷는 연습을 시작하였다.

너무 오랜 동안 누워있어 다리의 근육은 굳어졌고 엉덩이에는 욕창이 생겨 수술을 해야한다고 하였다.

마취를 하여 수술할 때는 의식이 없어 고통을 모르고 지나갔지만 욕창 수술은 마취하지않고 죽은살을 떼어낸다고하였다.

금이는 타월로 입을 막고 신음소리가 나가지않게 하였다.

그것만이 어머니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지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금이가 퇴원하던 날에도 오늘처럼 첫눈이 내리고있었다.

금이야, 너는 어머니를 평생 업고 다녀도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할거야.

금이야, 삼 년 동안은 연시감 조심해라.








배꼽산 골짜기로 내려가는  평평한 산허리에는 여러 개의 기름탱크들이 놓여있었다 

숫자와 영어 알파벳이 다른 나라 부호처럼 기름탱크 전면에 표시되어있었고 철조망을 두른 울타리에는 초소마다 얼룩무늬 군복의 미군들이 총을 들고 삼엄한 불침번을 서고있었다.

동네사람들은 저 탱크들 안에는 엄청난 기름이 들어있고 북한이 쳐들어와 전쟁이 일어나면 저 기름을 비행기에 넣어준다고 하였다.

어린 마음에 어떻게 날아가는 비행기 안으로 기름을 넣어줄까, 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려서부터 금이 눈에 각인된 배꼽산은 동서냉전의 이념처럼 거대하지만 차가운 얼굴로 늘 우리를 내려다보고있었다.

그리고 저 기름탱크라는 것은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거지, 금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내처 무시하며 진달래 피는 봄을 몇 번 더 맞이하고 뻐꾸기 진종일 울어대는 여름날이 몇 번 더 가버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해  겨울 너무 추워서인지, 아니면 기름탱크에 결함이 생겼는 지 기름이 새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새벽이었다. 

잠결에 금이 몸이 서늘해지며 추워지는 한기를 느꼈을 때 아랫집 영자네 엄마가 문 밖에 서서 우리 엄마와 무엇인가를 귓속말로 속삭이고있었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엄마가 겨울 외투를 두르고 목도리, 장갑등을 찾기시작하였다.

곁에 서있던 아버지의 근심어린 표정으로 보아 두 여인들은 무언가 당당하지않은 일을 모의하러나간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엄마의 구부러진 등 뒤에 대고 조심하라우, 아버지의 황해도 사투리 섞인 억양이 차가운 별빛에 떨어져내리고있었다.

그리고 금이는 겨울 햇살이 창호지 안쪽을 뚫고 방 아래까지 찾아온 늦은 아침, 두런두런 말소리에 잠이 깨었다.

동상이구먼.저런 쯔쯔쯔...

더운 물에 담그면 안되지, 손이 시려워도 찬 물에 담그어 얼음을 빼 내라우.

엄마는 세수대야에 손을 담그고 있었고 아버지는 연신 대야의 물을 갈아대고 있었다.


배꼽산 기름탱크에서 간 밤에 기름 유출사고가 나서 흘러내린 기름들이 송도 앞바다 갯벌로 고인 것이었다.

미군부대에 다니던 영자 아버지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듣고 영자네 엄마는 우리 엄마와 함께 그 새벽 송도 앞바다로 나간 것이었다.

얼음장처럼 겨울 바다 물을 가르고 동동 떠오른 기름을 걷어내는 작업을 한 것이었다.

엄마가 떠왔다는 기름이 문 밖에 있는 통 속에 담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선홍색이 감도는 맑은 피색이었다.

휘발유라고 하였다.

그러나 금이 눈에는 그것이 휘발유로 보이지않고 지난 겨울  밤새 엄마가 막내동생을 낳느라 진통하며 흘렸던 붉은 피로 보였다.

엄마는 한동안 손에 걸린 동상으로 고생을 하셨다.


 마당이 아주 넓었던 돌축대 위의 금이네 집 마당에는 여전히 겨울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이웃집 재수네 집에 놀러가서 이와 서캐를 옮아오면 아버지는 양지쪽 마당에서 금이의 머리를 뒤져가며 서캐를 잡아주셨다.

엄마의 동상걸린 손이 점점 나아져가면서 그렇게 봄도 다시 왔다.

그해 봄에 금이는 무슨 알러지에 걸렸는지 잔기침을 시작하였다.

아기 때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하던 금이를 엄마는 미군부대 앞에 있는 소아과에 데려가셨는 데 가기만하면 배아프던 것이 낫는다고 병원 이름 00의원 대신 골통대라고 불렀다.

그런데 금이의 잔 기침은 골통대를 가도 낫지 않았다.

어느 날 금이 아버지 이발소에 자주 오시는 최샨이라 부르는 고향분-나중에 피난을 함께 온 사촌오빠와 그분의 딸이 맺어져 사돈간 이 되었다- 잔기침에는 그저 진달래 술이 좋지요.

이 한 마디에 금이는 담배 두 곽 손에 들려져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는 배꼽산 철조망 안으로 넘겨졌다.

철조망을 넘느라 몸이 거꾸로 된 탓도 있지만 배꼽산에 펼쳐진 분홍빛 진달래가 눈 앞에 흐드러져  보이는데  금이는 그만 현기증이 일어나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질 뻔 하였다.

동네에서 바라볼 때는 무더기, 무더기 피어보여서 마치 꽃송이를 던져놓은 것처럼 보이더니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건 한송이 한송이 나풀나풀  모두가 하나의 얼굴을 가진 꽃송이들이었다.


자 이제 금이의 임무는 진달래 꽃송이를 따는 일,  게릴라 임무를 띠고 적진에 던져진 척후병처럼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산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눈에 띄는대로 뱀도 잡아먹고 쥐도 잡아먹는 그 군인처럼 금이는 손에 잡히는대로 꽃잎을 따서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산언덕 아래서 아까 담배 두 곽을 받아 주머니에 급히 집어넣었던 군인아저씨가 소리쳐부른다.

아직 멀었나... 빨리 따지않고 뭐해...

자그마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옆에서 스르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내려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보이는 뱀의 머리, 순식간에 보이던 뱀의 꼬리

와--아--악

진달래  꽃 바구니 집어던지고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아래로 아래로 달려 내려왔다.


큰 일 날 뻔 하였구나. 다행히 물리지는않았구나.철조망 밖에서 기다리던 아버지가 날 안아주었다.

안되겠네요, 군인이 다가오더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면서 재빠른 동작으로  산으로 올라가 진달래 꽃잎을 한 바구니 따다 주었다.

그러나 진달래 뱀사건은 다음 사건을 알려주는 전초전이었다.

진달래 꽃잎을 엿과 함께 섞어 항아리에 넣은 다음 땅 속에 묻었다가 거기서 우러나온 액을 마시면 된다하여 며칠의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는 금이에게 그 물을 마시게하였는데

금이는 그 진달래술을 마시자마자 그만 기절을 해버린 것이었다.

온 식구들이 마당으로 뛰쳐나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하며 금이를 깨웠지만 진달레 술이 너무 독했던 지 금이는 한참 만에 깨어났다.


그 후로 배꼽산에서 미군들이 철수해나가고 이제는 산림녹수 계획으로 그 일대는 그린벨트 지역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미소냉전이 무언지 잘 몰랐고 그린벨트는 더더욱 몰라서 그저 사시사철 배꼽산이 변해가는 모습을 즐기면서 산나물도 뜯고 바위 아래 멱감고, 가재 잡으면서 도토리따고 겨울 칡을 캐면서 한 해 한해를 그렇게 보내었다.


기름탱크가 있었던 넓고 평평한 자리에는 이제 인천시에서 개발한 여러가지 운동시설이 들어서있고 금이와 친구들이 그 옛날 멱감고 가재잡던 골짜기에는 약수터가 들어서있다.

서울로 가던 사신들이 이 쪽 봉우리에서 저 쪽 으로 걸어갔다던 능선에는 막걸리 파는 아주머니들이 진을 치고있었다.


상전벽해라고 하였던가.

배꼽산 아래 금이네가 살던 오동배기 동네-오동나무가 많았던 그 동네에 지금은 은행나무 밭이 들판처럼 서있고 화교 춘서방네 농장이 있던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우뚝 서있다.


그런데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로 금이의 눈길이 머물렀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GNP가 얼마라고 해도 수치에 어두운 금이는 저게 무슨 소린가ㅡ 하듯이  그 사이로 보이는 낮아질대로 낮게 보이는 판자촌의 그림자들.


배꼽산의 기름탱크 사라져가듯이 저 판자집들 사라지는 날은 언제 오려나, 하며 생각에 잠겨본다.

어린 시절을 함께 나누던 배꼽산 대신 지금은 로키가 보이는 캘거리에서 중년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금이는 언제나 추억 속의 배꼽산을 잊지못한다.

로키로 넘어가는 저녁노을이 오늘따라 왠지 배꼽산을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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