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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지도

이미 인천 인근의 섬들이 매우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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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배를 타고 참 기가 막힌 항해를 하던 당시의 일을 구술하신 함하나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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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를 구하고자 사진을 보내고 사진을 받고.

이런 과정에 웃지 못할 기막힌 사연이 너무나 많았다고 한다.

오죽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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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맥시코로 가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서 용설란을 가르고 속을 빼어 밧줄을 만드는 재료를 만드는 작업을 했던 동포들.

노예라는 말로도 부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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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던 해설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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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추웠지만 옷도 단단히 입고 목도리도 두르고 웃으며 즐겁게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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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문화의 거리를 걸은 친구들

언제나 배려심있게 12기를 지키는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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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을 한 경애가 편안하고 따스한 모습을 보여 주며 나타났고,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 좋아지는 금자도 나타나 아주 기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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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화요일인 4월 9일, 월미산 걷기로 한 날이다. 

오늘 고맙게도 또! 정인순이 모든 것을 안내했다.

11시에 월미도 이민사 박물관 앞에서 모여서 이민사 박물관을 관람(마침 우토로라는 일본의 조선인 마을의 역사 특별전 중임)하고, 월미산 전망대와 월미산 정상까지 걷고, 월미 돈대쪽으로 하산해서 칼국수 먹고 월미도 문화의 거리를 걷기로 했다.



한국 이민사 박물관은 700만 해외동포들의 이민 역사가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2003년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인천시 시민들과 동포들의 뜻을 모아서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사 박물관인데, 인천이 우리나라 첫 공식 이민의 출발지였으므로 인천에 자리잡게 되었단다.

 

서구 열강의 이권 개입 경쟁으로 사회적 혼란과 계속되는 가뭄으로 혹독한 굶주림이 지속됐을 때 하와이는 설탕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선택했단다. 중국인은 말을 잘 듣지 않고 믿을 수 없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성실하고 시키는대로 말 잘 듣는 사람들이라 했다던가?


최초의 이민선 갤릭호(S. S. Gaelic)의 조선인 승선자는 102명이었다.

1902년 12월, 인천 제물포항에서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903년 1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질병자 16명을 제외하고, 86명만이 상륙허가를 받았다. 승선자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천 출신 교인들이었는데, 이는 인천에 있던 내리교회 존슨 목사가 교인들에게 이민을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다.

 

1903년 1월부터 1905년 8월까지 총 64회에 걸친 항해에 이민자는 7,414여 명이었다. 1920년까지 하와이에 온 한인 7,400여명 중 2,000여 명은 미국 본토로 이주했고, 약 1,000여명만이 조국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남아 있는 대다수는 한국의 정세 불안과 일본의 강점 등으로 부득이 정착을 택했다. 이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독립운동 기여도가 매우 컸다 한다. 임시정부를 비롯해 여러 독립운동가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아까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 멕시코, 쿠바 이민사, 러시아 이민사, 중국 이민사, 일본 이민사는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여서 절로 눈물이 났다.

나라가 있어야 국민도 있고 정치가들이 국민을 사랑해야 국민도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또한 파독광부와 간호사는 1960년대 한국의 실업률 해소와 외화 획득의 필요성, 독일의 부족한 노동력 공급과 경제 원조라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독일 이주가 본격화 됐다. 247명의 1차 파독광부를 시작으로 1970년대 말까지 약 8천여 명의 광부들과 약 1만여 명의 간호 여성들이 독일로 떠났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게 됨을 알게되니 새삼 고맙고 그들의 아픔을 헛되이 하지 않아야 하는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인하대는 인천 + 하와이의 약자다. 미주 한인 이민 50주년을 기념하고 모국의 공업화를 돕고자 첫 이민을 떠났던 인천에 인하공과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단다.


이민사 박물관 안내자가 한 ‘국민은 과거를 바라볼 수 있어도 정치가는 미래를 봐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위정자들이 진정 국민을 위하는 일이 무엇인가 잘 생각하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국민의 희생만 강요하지 말고 그들이 먼저 솔선수범까지는 아니어도 양심있는 행동을 하길 바래 본다.


우리는 이민사 박물관을 나와 일단 간식을 먹고 월미산을 향했다.

친구들은 인천에 대한 기억을 어찌나 잘 하던지 매일 아무 관심없이 땅만 보고 다녔던 내가 참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독(dock)은 제방이나 그밖의 다른 방법에 의해 물로부터 격리시켜놓은 건조 저수지(dry basin)일 경우에는 배를 건조하거나 수리하는 곳으로 쓰였고, 반면 물이 들어오는 저수지일 경우 배의 통행과 물자수송 등이 이루어지는 동안에 배가 정박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는데, 후자의 기능은 차츰 그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다른 계통의 구조물들에 의해 대체되었고 부두 제방(quay-wall)·선창·부두 같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다.-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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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순이와 은화가 기억하는 연안부두 인근이 매립되던 시절,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넓은 땅을 걸을 때면 너무 바람이 세서 둘이 팔을 꼭 끼고 걸었다는 이야기며, 인순이가 말한 갑문 활용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꼭 적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화야 네가 기억하는 그때의 모습 꼭 적어 놓고 다른 친구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월미산 정상에서 빙 둘러가며 인천의 모습을 보니 뿌듯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하고 그랬다.

앞으로는 아마 거의 모든 곳이 아파트로 변할 것 같은 예감이 너무나 강하게 들었다.

철갑을 두른 듯 둥그렇게 조여오며 서 있는 아파트를 보니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린 시절을 함께 하며 숨 쉬듯 자연스럽게 우리 몸에 스며든 인천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함께 한 친구들.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이 나이에 이르도록 어느 곳에 있든 그 곳에서 나름 열심히 살아온 친구들이 참 대단하기만 하다. 그리고 인천도 대단하다.

너희는 어쩜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그렇게 보석 같이 빛이 나는지 한편 존경의 마음이 든다.

고마워 친구들아! 너희랑 시간 보내다 보니 앞으로의 삶을 어찌 살아야 할지 조금씩 눈에 보이는 듯 하다. 

물론 힘든 일도 있겠지만 우리가 지금껏 열심히 살아 왔듯 앞으로도 순간순간에 감사하며 의미있는 삶을 살아보자!

사랑해 친구들아, 너희 덕분에 내일도 살 맛이 날 것 같다!*^_^*

 

참 오늘의 점심은 환상이었다.

해물 부침개, 겉절이, 알타리 김치, 배추 김치, 바지락 해물 칼국수...

인순아, 탁월한 선택이었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