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_E4251.JPG 나의 수요일 저녁 독서모임 이번 주제는 ‘젠더’다.

젠더에 관한 책은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은 것이  다였는데 이 책을 읽으니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읽는동안 리베카 솔닛이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내내 감탄을 하며 읽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희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친구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마음에 인상 깊었던 부분을 발췌해본다.


이름에 힘이 있다.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이다.

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숨겨져있던 잔혹함이나 부패를 세상에 드러낸다. 혹은 어떤 중요성이나 가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무지는 일종의 용인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죽는지, 왜 그러는지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 것이다.


투표는 일종의 말하기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 보고 싶은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말하는 한 방법이다.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 또한 역할을 가진다는 것, 주체성을 가진다는 것,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말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성이 화를 내면 사람들은 성격결함으로 간주한다. 세상은 수십년동안 페미니스트를 화난 여자로 정형해 왔고 그럼으로써 여성의 경험에는 마땅히 화낼 측면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해 왔다.

분노의 표현은 타인에게 통제력을 행사하여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는 수단이고, 우위를 차지할 권리인데 그 권리는 보통 부모나 상사, 경찰관이나 남편 그리고 백인 남성에게 만 있었다.

분노는 성장하면서 넘어서야하는 감정이다.


젠트리피케이션 ㅡ 외부인이 유입되면서 본래 거주하던 원주민이 밀려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


읽으면서 리베카 솔닛은 현상의 문제점들을 어떻게 이리 잘 짚어내고 생각의 방향을 잡아가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이책의 마지막 ‘간접적 영향을 칭송하며’는 읽고 또 읽어도 명문이다.


내가 희망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2003년이었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직 후의 암담한 나날이었다.

희망은 낙천주의와 비관주의 라는 두가지 거짓된 확신의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준다. 낙천주의는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가정한다.

비관주의는 모든 것이 구제불능 이라고 가정한다.

둘다 우리를 그냥 집에 머물면서 손을 놓게 만든다.

내게 희망이란 늘 미래가 예측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뜻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어쩌면 스스로 미래를 써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희망은 앞을 내다 보지만 과거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역사를 알면 현재 너머를 볼 수 있다.


생각은 전염되고, 감정도 전염되고, 희망도 전염되고, 용기도 전염된다.


지는 것도 과정의 일부다. 대영제국의 노예제 폐지 법안은 연거푸 통과에 실패 했지만, 그 속에 담긴 생각은 계속 펴져나갔고 그래서 결국 첫 법안이 제안 된지 27년 만에 새로운 형태의 법안이 통과 되었다.


독재와 파괴를 막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시민사회다. 그것은 우리 중 대다수가 자신의 힘을 기억하고 한데 뭉쳐야 한다는 뜻이다.

평등, 민주주의, 포용, 완전한 참여와 같은 가치들을 품은 시민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 시민사회란

말하자면 ‘ 여럿으로부터 하나를’ 의 원칙을 급진적으로 구현하고 더불어 연민까지 갖춘 존재일 것이다. 이일은 언제나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이야기를 들여주는 일이다. ‘이야기들의 싸움’ 이다. 스스로 이야기를 짓고, 기억하고, 다시 들려주고, 기념하는 것은 우리 일의 일부다.


희망이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세상의 모근 것은 불가분의 관계로 엮여 있기에 모든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가능성을 붙잡고 희망을 현실로 바꿔 나갈 수 있다.


아래는  ‘인터넷 교보문고’의 서평이다.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는 솔닛의 ‘희망 3부작’으로 불리는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어둠 속의 희망』을 잇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뉴욕 타임스』가 세계의 진보 운동을 대표하는 “저항의 목소리”라고 칭한 솔닛의 사회운동가적 면모가 특히 돋보인다. 솔닛은 이 책에서 여성혐오, 기후변화, 국가폭력, 민주주의 등 다양한 범주의 문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날카롭게 짚어내며, 지역과 운동의 역사를 통해 시대의 흐름을 꿰뚫고, 정치적 세계와 사적인 세계, 지성의 세계와 일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읽는 이의 사유를 확장시킨다. 

1부에서는 미투 운동,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에서 드러난 여성혐오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민주주의를 손상시키는 혐오와 차별, 그리고 투표권 박탈을 논한다. 2부에서는 현대 정치 지형의 밑바탕에 깔린 신념, 감정, 태도, 망각을 다룬다. 우파의 개인주의가 사회라는 결합체를 간과함으로써 시장 지상주의를 존속시키고, 극단적 허무주의까지 야기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흑인의 목숨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과 월가 점거 운동 등의 성과를 논하며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패를 단언하고 냉소하는 것이 오히려 변화를 가로막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사회변화를 추동하는 힘으로 여겨지는 ‘분노’라는 감정이 때로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눈멀게 한다고 지적하며, 서로 다른 정치 진영을 향한 분노를 넘어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의 교유와 연대의 필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3부에서는 기후변화가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타깃으로 하는 지구적 규모의 폭력이라는 점을 꼬집으며, 송유관 반대 운동의 승리를 통해 패배하는 싸움이라도 이어나가야 하는 이유를 역설하고, 경찰의 시민 살해와 노숙인 문제를 연결해 도시의 젠트리피케이션이 원주민을 몰아내고, 끝내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는 점을 보인다. 서부시대 캘리포니아 개척의 역사를 현대의 이민자와 국경 문제로 이어내고, 남부연합과 노예제의 흔적을 그대로 담은 도시의 동상, 건물, 거리 이름 등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사유함으로써 역사를 끊임없이 재의미화할 필요성을 환기하는 글에서는 솔닛의 역사가적 면모가 돋보인다. 4부에는 모교인 UC 버클리 저널리즘 대학원 졸업식에서 전한 축사가 수록되어 있으며, 역사 속의 변혁적 순간들을 톺아봄으로써 절망과 냉소를 몰아내고, 희망을 불어넣는 글로 끝맺는다. 


“모든 것을 그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하려고 애쓴 일이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범죄 고발로 시작되어 미국을, 더 나아가 한국은 물론 전세계를 뒤흔든 미투 운동은 만연한 여성혐오와 젠더위계를 드러냈다. 미투 운동의 ‘나도’(too)라는 동의가 보여주듯, 솔닛은 봇물처럼 터져나온 고발들이 각각의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패턴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한다. 남자를 고발하고 나선 여자들은 미친 여자나 앙심을 품은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아왔다. 사회는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이야기를 재구성함으로써 여성들이 공격당하는 패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만성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피해망상에 시달린다고 말한다. 

모든 성폭행 보도의 이면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을 둘러싼 싸움, 젠더와 폭력에 관한 믿음들을 둘러싼 싸움이 깔려 있다.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로 전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솔닛답게, 그는 지금 벌어지는 싸움은 언어의 싸움이라고, 정확한 이름을,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전쟁이라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리벤지 포르노’를 ‘보복성 동영상’으로, ‘묻지 마 살인’을 ‘여성혐오 범죄’로 새로이 명명하는 것처럼, 이름을 바꾸고, 이야기를 바꾸고, 새로운 용어나 표현을 만들고 퍼뜨리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핵심적인 작업이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는 숨겨져 있던 잔혹함이나 부패를, 혹은 어떤 중요성이나 가능성을 세상에 드러낸다. 


다양한 주제와 시기를 오가는 이 책의 글들은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한다. 우리가 겪는 위기는 언어의 위기이며, 이를 극복할 무기 역시 언어라는 것이다. 언어는 갈등이 없는 곳에서 갈등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복잡하게 엉켜 풀리지 않는 문제를 단칼에 풀어내기도 한다. 언어를 정확하고 조심스럽게 쓰는 것은 의미의 분열에 대항하는 방법이자 공동체를 격려하고 대화를 독려하는 방법이다. 어떤 병에 걸렸는지 진단해야 치료를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대면한 문제의 정체를 알아야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잘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그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 그것이 솔닛이 제안하는 변화의 시작이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