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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후배가 봄날 단톡방에 올린 시를 보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옥수수      -14기 박찬정


야야!

등에 업은 얼라

허리 좀 잘 동여매 봐라.

뒤로 자빠지긋다.


괘안습니더.

오뉴월 바쁜 철에

바닥에 눕혀 놓고

어메가 토닥토닥 해 줄

형편 안 되는 거 얼라도 압니다.


그래도

빈집에서

혼자

울다 자다 하는 거보다

땀에 절은 무명 적삼

어메 등드리가 좋다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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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는 멀리 사는 후배가 농사를 짓다가 뒤로 자빠져 자라는 옥수수를 보고

문득 엄마 등에 업힌 아기를 연상하며 쓴 시다. 

저게 언제 익을까 생각만 하고 입맛을 다시는 나 같은 사람도 있지만,

이렇게 옥수수처럼 달콤하고 따뜻한 시를 쓰는 이도 있다.


마침 무한 재미와 감동 속에서 위 만화를 보는 중이어서 위 시가 더 따스히 다가왔다.

-땀흘리며 이렇게 옥수수 농사 지어놓으면 다 먹고 옥수수 뼈대로 어머니 가려운 등 긁기도 좋지 않습니까 ?-

이런 말도 들리는 듯해 시가 더욱 훈훈하게 느껴졌다.


오륙십 년이라는 세월은 길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긴 역사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 어린 시절의 정서와 지금 아이들의 정서, 소중한 것에 대한 생각이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책을 보며 많이 했다.

이런 만화를 보며, 혹은 저런 시를 보며 요즘 우리 아이들은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을까?

어려운 상황에서 가족 사이에 흐르는 정이나 절실함 같은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아마 잘 모를 것이다,

이렇게 남겨놓지 않으면 우리의 소중한 것이 잊혀질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도 많이 했다.


만화는 생각보다 보기가 편치 않다.

눈이 쉽게 피곤해진다.

얼마 안 되는 글씨와 그림을 돌아보는 일이 왜 피곤한 건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냥 책 보는 것보다 나는 만화 보기가 더 힘들다.

또 책 크기도 보통 책보다 조금 더 크니 손에 익숙지 않다.

그럼에도 네 권으로 된 수동식(?) 이 만화책을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팔십이 넘어 노쇠해가는 엄마와 같이 사는 중년의 작가가, 기억력이 뛰어나고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들처럼 힘든 시절 그야말로 온몸으로 세월을 살아온 자기 엄마에게 질문을 하며 적은 것을 만화로 만든 책이다.

때로는 역사와 맞물리며 때로는 역사를 비껴가며.

7년 이상의 작업이다.



나 어렸을 적 엄마 옆에 누워 듣던 이야기, 새벽녘에 아버지와 엄마가 도란도란 나누던 이야기(평소에는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던 부부가 새벽에는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잠에 빠지곤 했다), 먼 친척이 오셔서 며칠 집에 머무실 때 듣던 이야기, 결혼 후 다른 문화에서 산 시댁 어른들께 듣던 또 다른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작가의 엄마가 쓰시는 함경도 사투리도 무척 재밌다.

사투리의 말맛을 아주 좋아하는데 이 책에서는 최대한 엄마의 함경도 사투리를 잘 살려 놓아 좋았다.

어린 시절 동네 마실 나온 주로 황해도 출신 여인들의 독특한 어투도 기억에 있고, 고등학교 때 내 짝궁이었던 인숙이 아버지의 칼칼한 평안도 사투리도 참 재미있게 듣던 기억이 있다.

평안도의 말맛은 김동인이나 황순원의 소설에서 제대로 느꼈는데 이렇게 다른 말이 이렇게 자연스럽고 맛있게 읽히다니 하며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토지-가, -태백산맥-이 서울말로 쓰여졌다면..... 

아마 느낌이 전혀 다를 것이다.


이 만화를 보면서 놀라운 것은 엄마와 딸의 정말 솔직하고 뭐랄까 어쩌면 친구 같은 대화인데 예를 들면 이런 것.

김치 담그는 장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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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다.   

통깨가 없어서 아이 놨는데 나중이 볶아서 여야겠다.  

꾀도 무섭다. 여자라는 기 틈틈이 깨도 볶아놓고 마늘도 쪄놓고 그래야지, 이기 무시기야!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구십이 다 되는 내가 깨도 볶고 살림도 다 해야 아니야. 씹이 구역질을 하겠다. 하하하하.  

나중에 볶아 넣고 맛있게 해놔. 안 그러면 나한테 혼날 줄 알아.  

하하하하, 내 너한테 혼나고는 살지를 않는다.  

좀 쉬다 해야지.  

아구, 아구! 나도 좀 쉬다 해야지.  

김치 담그느라 수고가 참 많았소.  

그렇기 말을 해주이 다 풀리오. (2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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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좋아하던 남자 아이 이야기-


시흥이 : 나 너 집이 좋아서 너 집이 장개와야겠다.  

놋새 : 너 미쳤니야?  

시흥이 : 아이 미쳤다.  

놋새 : 아이 미쳤는데 왜 자꾸 미친 사램 소릴 하냐?  

시흥이 : 놋새야, 오빠 아이 보깁었나?(안 보고 싶었나?)  

놋새 : 내가 왜 보깁어!  

시흥이 : 내는 무지 보깁었는데. 놋새 마이 이뻐졌다이.  

놋새 : 내 바쁘다.  

시흥이 : 놋새야, 내 간다. 내 보깁어도 우지 마라이.  

놋새: 아이 운다. (2p.35)

 


이렇게 엄마와 딸은 할 수 있는 모든 대화를 솔직하게 한다.

 

엄마의 사랑이야기도 그렇고, 남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얄미운 남편이 군대로 끌려갈 날만 기다리던 엄마가 해방이 되어 해제가 되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남편이 안 가게 돼서 해방이 좋은 줄도 몰랐다.

이렇게 말한다는 게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쉬운 일이 아닌데 이 모녀는 거침이 없다.

평생 가정을 돌보지 않던 아버지의 무책임에 대한 비판이 아주 직선적이다.

-엄마, 아버지는 개새끼야. 어떻게 가족을 그렇게 돌보지 않고 무책임할 수 있어?

 그래 나쁜 놈

 ㅎㅎㅎㅎ



어린 시절부터 시간 순으로 내용이 이어져 우리 근대사에 얹혀지는 우리네 여인들의 생활과 나라의 모습을 보면 참 많은 생각이 절로 난다.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나. 가난이며 노동, 일제 강점, 전쟁, 피난....


물론 개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지역에 대한 편견 같은 일반화의 오류를 느끼는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엄마의 이야기니까 넘어가기로 한다.

스무 살 넘어 서울에 갔을 때 우리도 인천에서 왔다고 하면 짠물이구나 이런 소리를 얼마나 자주 들었던가.


나도 오래 전에 아버지에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어 여쭤 봤는데 그때는 벌써 아버지가 정신이 분명치 않아서 시간을 뒤죽박죽 넘나들며 말씀을 하셔서 아! 늦었구나 했던 적이 있다.


아직 부모님의 살아계시면 어머니 혹은 아버지, 그들의 주위, 혹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만화를 그리는 딸을 보며 엄마가 노상 하는 말은

-뭐 나같은 사람이 말하는 이런 것도 책이 됨?-이었다.



딸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느끼는 바가 컸어요. 살면서 땅에 다리를 굳건히 두고 사는 느낌 별로 없었는데 얘기를 듣고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 삶이 있구나’를 느끼면서 저도 이상하게 이 땅 위에서 굳건하게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뿌리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요. (2019. 0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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