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197911

-장소: 창덕궁 문 앞

-준비물: 모자, 선글라스, , 만원

 

어제 창덕궁 걷기모임이 있었다.

사정이 있어 함께하지 못했지만

친구들이 지금 쯤 어디를 걷고있을까?

무엇을 먹고 마시고 무슨 얘기들을 나누고 있을까? 내내 궁금했다.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며

, 여기여기를 다니고,

콩국수 칼국수를 먹었나?

차를 마시고 있네. 하며 따라갔다.

하여 어제 친구들이 둘러봤을 창덕궁 전각과

후원에 대해 창덕궁 홈피를 참조해서 따라가 본다.

 

어제 둘러본 사람들은

서울 궁궐 나들이는 지난번 덕수궁도 좋았는데

창덕궁도 너무 좋았고

이렇게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따라가다보니

우리 문물에 대한 자부심과 조상들의 슬기로움을 알게 되며

앞으로의 날들도 지혜롭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서울 나들이는 앞으로도 자주 했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

 

사진 속 우리 문화를 살피는 친구들의 눈빛은 사뭇 진지하다.

식사하는 모습과 차 한 잔 같이하는 표정들은 편안하기 그지없다.

구석구석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는 순수함은 더 아름답다.

친구들아, 함께 하지 못해 아쉽지만 너희 참 멋지다!

다음엔 함께 하지 못한 친구들도 시간 허락하면

무조건 무조건이다! 다들 고마워!

 

^^ 아래는 창덕궁 홈피에서 가져왔습니다. 참고하세요.

 

* 돈화문(敦化門:보물 383)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으며,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 금천교(錦川橋)(보물:1762)

금천교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1411)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 궐내각사

궐내각사 왕과 왕실을 보좌하는 궐내 관청

 

* 인정전(仁政殿:국보225)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 * 혹한기, 혹서기 후원 관람동선

 

후원입구-부용지-애련지-관람지-연경당-비각길-후원입구-퇴장 (옥류천코스 제외)

 

* 후원입구

후원입구 성정각 일원에서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을 따라 올라가면 왕실정원의 초입부인 부용지에 이른다.

 

* 부용정(보물:1763)

부용정 휴식과 학문적 용도로 쓰인 아름다운 건물들

이곳은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300(1000)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奎章閣)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로 쓰였고, 영화당(暎花堂)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 불로문(不老門), 애련지

불로문(不老門), 애련지 군자의 성품을 닮은 경치

1692(숙종 18)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섬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새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 존덕정(尊德亭)과 폄우사

불로문(不老門), 애련지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

이 일대는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모습은 네모나거나 둥근 3개의 작은 연못들이 있었는데, 1900년대 이후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관람지라고 부른다. 연못을 중심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觀纜亭),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砭愚榭), 관람정 맞은편의 승재정(勝在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 연경당(演慶堂)(보물:1770)과 선향재(善香齋)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순조 28)경에 창건했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 낙선재(樂善齋)(보물:1764)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이 낙선재는 2012년 보물 제 1764호로 지정되었다.IMG_3911.JPG IMG_3905.JPG IMG_3874.JPG IMG_3875.JPG IMG_3876.JPG IMG_3877.JPG IMG_3878.JPG IMG_3879.JPG IMG_3880.JPG IMG_3881.JPG IMG_3882.JPG IMG_3884.JPG IMG_3885.JPG IMG_3886.JPG IMG_3887.JPG IMG_3888.JPG IMG_3889.JPG IMG_3890.JPG IMG_3891.JPG IMG_3892.JPG IMG_3893.JPG IMG_3894.JPG IMG_3895.JPG IMG_3896.JPG IMG_3897.JPG IMG_3898.JPG IMG_3899.JPG IMG_3900.JPG IMG_3901.JPG IMG_3902.JPG IMG_3903.JPG IMG_3904.JPG IMG_3906.JPG IMG_3910.JPG IMG_3908.JPG IMG_3909.JPG IMG_3912.JPG IMG_3914.JPG IMG_390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