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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이 출시되던 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그가 낸 책이다.

그러니까 그 시칠리아 여행은 그보다 앞섰던 것이고.

아이폰이 없던 시절이니 모든 것을 전화로 혹은 이메일로 혹은 직접 물어 보고 알아 보며

다녀온 마지막 여행일 것이다.

다녀온 후 그때 책을 내고 지금 2020 아주 조금 보완하여 다시 출판했다.


작가는 서문에서 -내게는 '과거의 내가 보내온 편지' 같은 책이지만 어떤 독자에게는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약속 같은 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라고 썼다.


시칠리아는 늘 영화 대부를 연상시킨다.

아직 조직의 그 무거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이클이 마지막 청춘을 보낸 곳,

날것 그대로의 햇빛과 화면을 통해서도 느낄 것 같았던 공기, 야생적이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여자와의 달콤하고 가슴 설레는 사랑.

이 모든 것이 한방으로 끝나던 곳.

그래서 시칠리아를 생각하면 동경과 함께 비극의 쓴 맛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 책은 그야말로 태평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어울린 아날로그식의 여행 기록으로 무척  읽기에 고달프고도 재미있다.


책 마지막에 쓴 에필로그를 같이 읽고 싶어 길지만 옮겨보기로 한다.

다시 이런 글을 읽게 해 준 작가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또 이렇게 귀한 비가 오는 날 친구들에 대한 서비스로.

또 오랜만에 워드 연습도 할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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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P295~298


아드리아해에 면한 항구도시 바리에서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페리가 떠나는 터미널에는 동유럽 악센트로 떠드는 승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몇몇은 의자에 누워 잠을 청하며 배가 떠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밤이 깊어 커다란 배가 떠날 준비를 마치자 승객들은 짐을 챙겨 보세구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보세구역 입구의 전광판에는 영어로 'Memory Lost'라는 문구가 거듭하여 점멸하고 있었다.

누군가 이탈리아어를 영어로 그대로 직역한 모양이었다.

짐작건대 '유실물에 주위하세요''잃어버린 물건이 없나 잘 기억해 보세요' 쯤 되는 경고를 하려던 것 같았다.


그것은 아마도 라틴어 'Memento Mori'와 같은 구조를 가진 문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번역이 잘못되면서 그 안내문은 돌연 시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되었다.

영어로는 '기억상실' 혹은 '잃어버린 기억' 정도로 읽힐 그 문장이 내게는 이렇게 보였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돌아보면 지난 시칠리아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 긴 여행에서 그 어떤 것도 흘리거나 도둑맞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다시 짐을 점검해 보았다. 있을 것들은 모두 있었다.

오히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전광판을 보며 나는 지난 세월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편안한 집과 익숙한 일상에서 나는 삶과 정면으로 맞짱뜨는 야성을 잊어버렸다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도 잃어버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들에서 평화를 느끼며 자신과 세계에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건달의 세월을 견딜  알았고 어떤 것도 함부로 계획하지 않았고 낯선 곳에서 문득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새삼 깨닫고 놀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변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비슷한 옷을 입고 듣던 음악을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느새 그토록 한심해하던 중년의 사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
 
아니애써 외면해왔을지도 모른다정말 젊은 사람들은 젊은이의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니라 젊게 생각할  있는 사람이다젊게 생각한다는 것은 늙은이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늙은이들은 걱정이 많고 신중하여 어디로든  움직이지 않는다그리고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이제는 아주  알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 젊은이들은 자신의 취향도 내세우지 않으며 낯선 곳에서 받는 새로운 감흥을 거리낌없이아무 거부감 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우리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든 질문하게 하고 이미 알려진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니까.

 

'Memory Lost'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페리는 이탈리아를 떠나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 옛날 그 도시에서 한 사내가 동쪽으로 가면 황금의 도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설을 믿고 길을 떠났다.

우리가 올라탄 배는 그의 이름을 좇아 선명을 지었다.

마르코폴로는 두브로브니크에서 멀지 않은 코르출라 섬에서 태어났다.

두브로브니크를 비롯한 달마티아 지방은 오랜 세월 강력한 도시국가 베네치아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마르코 폴로 역시 베네치아의 상인으로 통했다.

그 사람이야말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는 대신 자기가 보고 들은 진기한 것들을 적어 남겼다.

타고난 상인이자 여행가인 그와 달리 어쩔 수 없는 먹물에 책상물림인 나는 보고 들은 진기한 것들에 더하여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보태 적는다.

그리고 또 한 권의 책을 세상으로 흘려보낸다.

나도 다시 흘러간다.

그 어디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