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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 묵상하며, 동네 한 바퀴

 

우리가 걷기를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되어 간다.

그동안 우리의 걷기는 계절도 좋아서 걷기에 시원했고, 자연도 아름다워서 날마다 바뀌는 꽃들의 모습을 사진 찍어 단톡방에 올려 공유하곤 했다.

6월 들어 부쩍 날씨가 더워지니 걷는 일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친구들은 열심히 걷는다.

아침 새벽부터 걷는 친구도 있고, 저녁 해진 뒤에 나가서 걷는 친구도 있다.

한꺼번에 만 보 이상 걷기가 부담스러워 아침저녁으로 나누어 걷는 친구도 있단다.

아무튼 열심히들 걷고 있다.

의사 선생님이 내 준 숙제 때문에 걷기도 하고, 코로나19로 헬스장 가기가 부담스러워 걷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원래 걷는 일을 잘하던 친구도 있고, 걷기라면 질색을 하는 나 같은 친구들도 있다.

 

나는 걷기를 무척 힘들어했다.

그동안 승용차를 25년 이상 사용해 온 버릇 때문이기도 하고, 직장 다닐 때는 구두 신고 걷는 일이 힘들어 차가 없을 때는 가까운 거리도 택시를 타야 했다.

그러던 내가 걷기에 참여했다.

친구들도 내가 걷기를 힘들어 하는 것을 잘 알기에 모두들 놀라기도 하고, 걱정도 많이 했다.


우선은 신발부터 준비하라고 했다.

그동안 워킹화나 로퍼 같은 편한 신발을 신던 그대로 걸으러 나갔는데 무릎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옥규가 걱정하며 트레킹화를 소개해 주었다.

처음에 트레킹화를 신으니 발이 답답하고, 조이는 것 같아서 힘들었다.

그런데 2, 3일 후 무릎의 통증이 많이 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걷기를 시작하고서는 발이 훨씬 가벼워졌다.


다음으로는 만보 이상 걸으려면 하루 2시간 정도 걸리는데, 지루할까 봐 걱정해 주었다.

옥규는 책을 읽어주는 앱을 핸드폰에 깔아서 무선 이어폰으로 들으며 걷는단다.

어떤 친구는 음악을 들으며 걷고, 어떤 친구는 기도문을 외며 걷는단다.

내겐 이 시간이 참 좋은 묵상 시간이다.

본래 불교의 묵상은 자기를 비우는 거라는데, 나는 이 시간에 많은 것을 되새김질한다.

물론 음식이 아니라 나의 지나간 시간들, 나의 현재, 미래를 생각하며 돌아보는 시간이다.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그동안 풀지 못한 일도 떠올려보고, 사람들도 떠올려 본다.

그러면 많은 생각이 실타래처럼 이어지고, 내가 기도해 주어야 하거나 찾아봐 주어야 할 사람도 떠오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이 참 좋다.

 

또 하나 코스가 문제였다.

우리가 걷기를 시작한 4월 중순에는 코로나19 상황이 좋지 않아서 유명한 공원이나 산책 코스는 모두 폐쇄되어 있었다.

래서 나는 내가 사는 인천의 중구, 동구의 옛길들을 걷기로 했다.

짧은 코스를 계속 반복해서 돌아도 좋지만 그것은 너무 지루한 일이었다.

TV프로그램 <동네 한 바퀴>를 좋아하는데, 나 나름의 동네 한 바퀴를 시작했다.

먼저 내가 사는 신포동, 답동, 신흥동, 도원동.

걷다 보니 자꾸 멀리 가게 된다.

송월동, 자유공원, 월미도, 만석동, 북성동, 화수부두, 수도국산, 송림동 도화동......


아, 그런데 이 모든 곳이 우리 친구들에겐 어린 시절 살던 곳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올리는 풍경 사진은 비록 지금은 구도심이라 초라하기도 하고, 때론 조잡하게 변화하거나, 대단지 아파트촌으로 확 바뀌어 버렸다 하더라도, 친구들의 가슴을 추억과 그리움에 잠기게 해 주었다.

특히 초등학교의 교문 사진들은 어린 시절 그곳을 드나들던 친구들에게 그리움을 주었고, 코로나19로 학교에 오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너희가 와야 학교는 봄날, 보고 싶다 얘들아!” 라고 쓰여 교문에 걸린 현수막 사진은 오늘의 현실과 함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상황이 좋아져서 학교도 일부분 등교 수업을 시작하고, 닫혔던 공원들도 개방되자 걸을 수 있는 곳이 많아졌다.

월미공원과 월미산을 자주 올랐다.

처음에는 엄두도 못 내던 곳인데 이제는 쉽게 돌아 나온다.

숭의 축구장 둘레길도 걷기에 좋았다.

신흥시장 주변의 주택가와 시장 거리도 정감이 가는 거리다.

주말에는 멀리 소래포구 생태공원도 다녀오고 부평의 구시가지도 걸어 보았다.

자유공원은 시간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

나무가 많고 길이 많아서 생각하며 걷기에 시원하고 좋다

청라의 공원길도 깨끗하고 걷기에 좋은데, 내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한번 밖에 못 가 보았다.

 

6월 들어 인천의 코로나 상황이 많이 심각해져서 공원들이 다시 폐쇄되었다.

어제는 월미산에 가고 싶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월미도에 갔다.

공원 입구가 닫혀 있어서 주변도로를 따라 걸었다.

햇볕을 피해 그늘 아래로 걷는데, 익숙한 아니 그리운 향기가 나서 고개를 돌렸다.

'이 향기가 무얼까?' 생각하며 주변을 살피니 해안을 따라 둘린 담장에 새빨간 줄장미가 한창이다.

그래 이 향기.

인일여고 학교로 들어서면 둥근 아치에 양쪽으로 붉은색과 흰색의 줄장미가 이맘 때 한창이었고 이 냄새(향기)가 났었다.


냄새는 기억을 소환해 준다.

3 때인가 그 아치 밑에서 합창대회를 했다.

날은 더웠는데 1, 2, 3학년 같은 반이 모여서 연합 합창대회를 했다.

그 언덕 바닥이랑 잔디에 전교생이 앉고, 우리 반은 도레미송을 부른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 합창대회는 가을에 했다.

낮에 예선을 치르고 밤에 달빛 아래서 본선을 했었던 기억(중학교 때인지도 몰라)도 있다.

아무튼 아름다운 기억들이 향기와 함께 떠오른다.


월미도 한 바퀴 돌고나서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다.

요즘 생긴 내 걷기 취향 중 하나가 걷다가 끝나는 곳에서 시간이 넉넉하면 아무 버스나 올라타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곳에서 내려 걷기를 계속한다.

처음 타보는 버스 노선, 처음 가보는 곳에서의 걷기가 또 하나의 재미다.


어제의 걷기는 모험이었다. 아침에 청소를 하다가 미끌어지면서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물건에 걸려 약간 다쳤다. 그래서 걷기가 힘들었는데 걷다 보니 나아진 듯했다.

그래도 걷고 걸어서 집에까지 무사히 왔다.

 

오늘은 새벽부터 걸었다 오후에 비가 온다기에 아침 내내 걸었다.

때론 힘들고 하루쯤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함께 걷는 친구들이 있기에 힘을 내서 걷는다.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새로운 길을 찾아 걷는 즐거움도 누린다.

길가의 예쁜 까페에서 커피도 한잔 하면서 쉬기도 한다.


나의, 우리들의 동네 한 바퀴는 이렇게 계속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