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냉장고에서 유리로 된 찬그릇 두 개를 한 번에 꺼내다가 놓쳐서 유리 파편에 발가락이 찍혔다. 아프다는 느낌보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번지는 피를 보며 당황스러운 나머지 정신까지 아뜩해졌다.

일요일 저녁이라 대충 압박하고 종합병원 응급실에 가서 꽤 오랫동안 여러 바늘을 꿰매고 왔다. 다행히 치료는 동네 병원을 다녀도 된다고 하였다.

이틀에 한 번씩 동네 외과에서 상처 치료를 받고 새 붕대로 감고 오는데 처음엔 조심해서인지 이틀이 돼도 그대로이던 붕대가 며칠이 지나니 이틀을 못 버티고 돌아가고, 풀어져버려 난감하게 되어버렸다. 할 수 없이 붕대를 풀고 내가 다시 감아보았다. 어머나! 붕대를 생각보다 잘 감고 있었다. 그동안 잊었었는데 내 손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거의 4~50년 전에 배웠던 응급처치 시간의 붕대 감는 법이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우리가 여고를 다닐 때 교련 시간이 있었다.

제식 훈련과 응급처치 교육을 받았는데 초시계로 시간까지 재며 각종 붕대법을 익혔다. 어찌나 많이 연습을 했는지 거의 기계적으로 할 만큼 숙달이 되었었다. 그 때의 기능이 나도 모르게 나왔나보다. 오죽하면 대학 1학년 교련 시간에 인일여고 출신들은 따로 불리어 나가 강당에서 시범을 보였을까? 우리의 응급처치 법은 대학에서도 알만큼 소문이 자자했었던 것이다.

 

그 땐 월요일 아침마다 학교 운동장에서 제식훈련 애국조회를 했었다.

키가 큰 친구들이 맨 앞에 서고, 키가 작을수록 뒤에 서는 것이다. 키 큰 친구들은 대대장, 소대장도 하고 기수도 한다. 그런데 나는 키가 작아 늘 뒤에서 행진을 했다. 중학교 땐 키 순서로 2~30번 정도는 했는데 고등학교 와선 10번대로 내려간 것이다.

 

2때던가?

전국의 교련 담당 선생님들을 모시고 교련 시범학교 보고회를 하게 되었다. 몇 달 동안 매일 제식 훈련을 하고 가끔 4층에서 탈출하는 화생방 훈련도 하였다. 수업 시작 전이나, 점심 시작 전 짬나는 대로 훈련을 하였다.

햇볕이 내리쬐는 뙤약볕 속에서 시작한 훈련이 제법 선선해 질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행인지 불행인지 뒤에 선 키 작은 아이들은 제식훈련에서 제외가 되었다.

 

선머슴 같은 제식훈련에서 제외가 되고부터는 무슨 기준으로 뽑혔는지 모르지만 신부(?) 수업이 시작되었다. 과학관 2층에 생활관이 있었는데 그 때부터 생활관에서 방석내기, 반절하기, 큰절하기, 차 따르기 등을 가정 선생님들의 지도 아래 맵시 있게 할 때까지 교육을 받고 맹연습하였다. 큰 절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일어서다가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였지만 혼자 사뿐히 일어설 수 있게 되었고, 밟지 않고 무릎을 들어 방석에 앉는 법, 뒤통수를 보이지 않도록 물러나는 법도 배웠다.

이 신부 수업은 딱 한번 결혼식 날 폐백 할 때 진가를 발휘했다.

시범학교 보고회가 가까워서는 밤늦게 까지도 연습을 하였다.

암튼 선생님이 시켜주신 자장면도 얻어 먹어보았다! 집으로 돌아갈 때 오랜만에 먹은 자장면 때문인지 갑자기 배가 싸르르~ 아파와 집까지 정신없이 뛰어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시범학교 보고회 당일.

운동장에선 왕왕대는 스피커 소리와 절도 있는 교련 선생님의 목소리가 뒤섞이고, 시나리오에 맞춰 진행되는 제식훈련과 소방차까지 동원 된 화생방 훈련이 있었다. 색색의 연막탄이 터지고 응급처치 시범 환자와 간호사로 나뉜 친구들이 들것을 들고, 뛰고 정신없이 바쁠 때, 조리실에선 여선생님들과 친구들이 손님들께 대접할 점심 준비와 차 준비로 바빴다.

점심 식사 후 손님들은 생활관에서 우리의 예절 시범을 보셨다.

삼호장 흰 저고리에 연두 치마를 입고 갈고 닦은 맵시를 선보였다.

 

우리의 2학년 가을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

교련이 교과로 도입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교련 교과는 1970년에 시작하여 제 5공화국이 막을 내린 1988년 이후 폐지되어 서서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