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0년이 훌쩍 지나버린 중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슬픈 이야기들이다.

정말 재밌는 일도 있었고 추억이 돋는 행사도 많았는데 그런 것들은 슬픈 이야기 뒤에야 떠오른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인일여고 교정을 여러번 둘러보았을 때도 먼저 슬픈 이야기가 떠올랐고 그 속에서 힘들었던 작은 아이가 생각나곤 했다.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 얘기한다. “애썼어


우리집은 6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공부시키기에는 너무나도 가난했다.

당시 우리 동네 대부분의 가정의 딸들은 아들들 교육을 위해 중학교나 고등학교만 마치고 취업하는 추세였다.

그럼에도 엄마는 등록금도 못내면서 우리 33녀의 교육을 위해 막무가내로 학교를 보내셨다.

선생님에게 우린 가난해서 등록금 못내니까 그냥 가르쳐달라고 하라고 자꾸 얘기하시곤 했다. 그런 얘기를 등록금 독촉하는 담임선생님에게는 도저히 할 수가 없는데...


한번도 제때 등록금을 낸 적이 없는 나는 분기마다 교무실로 불려가는 학생이었다.

등록금을 못내는 학생들을 대하시는 선생님들의 태도는 정말 모욕스러웠다.

엄마가 등록금 주신 것 네가 까먹었지, 거짓말하는 거 아냐?, 부모님이 어떻게 그렇게 염치가 없냐, 등록금도 안 주시면서 그게 아버지냐, 니네는 등록금도 못받아오면서 학교는 왜 오냐...

그럼에도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이 그 시간을 견딜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마음이 상해 집에 오지만 엄마의 근심어린 얼굴을 보면 등록금 재촉을 할 수 없었다. 동네 작은 구멍가게를 하는 우리집은 하루 팔아서 다음날 먹을 한 봉지쌀을 사야 하는 고단한 삶이었다.

수학여행도 한번도 간 적이 없다.

친구들은 너무나도 좋아하고 계획을 짜고 하는데 나는 늘 소외되어 있어야 했다.

다녀와서도 한동안 수학여행 얘기가 꽃피울 때마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야 했다.

제일 힘든 건 친구들이 수학여행 간 동안에도 학교에 출석해야 하는 일이었다.

불쌍하게 보시는 선생님들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초월한 듯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으니까.


단체 영화도 거의 못갔다. 영화비도 마련하기 어려웠지만 시력이 나쁜데도 안경을 맞춰 주지 않았기에 자막을 읽을 수가 없어서 더 그랬다.

게다가 한번도 새 교복을 입은 적이 없다. 언니가 입던 빛바랜 교복을 언니보다 체격이 큰 내게 맞게 늘려 고친 교복.

조회설 때마다 내 교복색이 다른 친구들 것과 달라서 이상해서 너무도 부끄러웠다.


이런 가난한 어린애가 터득한 것은 성적이 오르니 선생님들의 대우가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등록금을 안가져오는 게 아니라 못가져오는 내 마음을 이해해 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앞의 아이에게는 그토록 모욕적인 말씀을 하시던 선생님이 내게는 오히려 위로를 해주시는 것을 느끼면서 공부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보니 성적이 오르고 공부가 재밌어져서 좋은 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좋은 학교에 가니 사람들이 내가 하는 말을 신뢰해준다는 사실이 너무도 좋았다.


이런 어린 시절은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요즘 생각해 보면 정말 참기 어려운 모욕적인 시간들을 참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나의 감정에 대해 둔감함을 배운 것 같다.

오래 전 <둔감함이 힘이다>라는 책 제목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책 제목을 보면서 너무도 공감이 되었다. 너무 예민해서 스트레스를 받지만 둔감해질 힘이 없기에 그 문제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가끔 주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눌 때 자신들이 얼마나 예민하고 민감한지를 얘기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그 민감함으로 탁월한 감각을 발휘하며 산다.

나는 나의 둔감함을 얘기한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냐고 하지만 나는 너무 민감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둔감하게 사는 것은 나에게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뿐 아니라, 싫은 사람이 별로 없고 관계를 끊을 사람도 거의 없다. 상대방이 분명하게 표현해주지 않는 한 그냥 잘 지낼 수 있다.

상대방이 힘들었을까?


나는 이런 둔감함으로 인해 목사의 아내로서의 삶을 살아내기가 비교적 수월했다고 생각한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한 사람의 목사를 잘 돕는 사모가 되겠다고 서원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곧, 그렇게 지긋지긋한 가난한 삶을 다시 살아야 하는구나 라는 걱정이 밀려들었다.

여러 날 기도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 나는 가난에 잘 훈련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어렵지 않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목사의 아내로 사는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며 준비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게 되고 결혼 2개월 후부터 단독목회를 하게 되었다.

물론 순간순간 어려울 때도 많았지만 예의 그 둔감함으로 상황을 이겨내기가 비교적 수월했다.


어느새 목사의 아내로 39년째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켜주심, 인도하심, 함께하심의 은혜로 여기까지 이르렀지만 나의 둔감함도 큰 역할을 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그 둔감함이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등록금으로 인해 불려다니던 교무실에서부터 자라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멋진 훈련 프로그램이었다.

돌아보니 너무나도 감사한 시간들이다. 나의 부끄러움을 통해 나의 단단함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부끄러운 시간들을 웃으며 얘기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