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학교마다 거의 통일동산이 있었다. 그 산에는, 아니 언덕이라 해야하나? 몇 그루의 무궁화가 있고 흰색 바탕에 검거나 붉은 글씨로 통일동산이라고 간판 같은게 서 있었다.

아마도 통일을 향한 염원이 너무 강렬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통일이라는 큰 뜻을 심어주기 위한 교육방침이었으리라. 그러나 나의 학창시절 그 통일동산은 통일의 염원을 키우기 보다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싶던 어린 여고생의 꿈을 키우고 마음을 달래주던 행복동산이었다.

 

칠 남매의 넷째인 나는 집에 있으면 약간은 천덕꾸러기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바로 위의 언니는 나와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 한참 어른이었고 고만고만 동생 셋은 늘 내가 혼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럴 때 늘 써먹는 핑계는 학교에 가서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학교로 오는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학교에 간다면 허락을 해 주셨다. 좁은 집안에 지금처럼 따로 공부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인지 학교에 오면 누군가는 와 있었었고 친구와 아니면 혼자라도 통일동산 한구석에 앉아있거나 걷거나 무언가를 해도 좋았다. 한쪽 구석에 앉아 풀냄새 맡으며 앉아있다 보면 나는 행복한 한 마리의 새가 된 듯 자유로웠다. 책가방은 교실에서 나를 기다리며 부모님께 대한 핑계의 확실한 이유가 되어주었고, 나는 통일동산으로, 분숫가로, 운동장으로 쏘다니며 행복을 맛보았다. 그 시절 우리는 왜 그리도 할 이야기가 많았는지, 종일을 이야기 하고도 또 내일을 기약할만큼 쉼없이 떠들었다. 하얗게 피어있던 데이지꽃, 온 교정을 뒤덮었던 장미, 아카시아 향기……. 그곳은 나의 천국이었다.

 

19731023

지금은 없어진 공휴일 UN데이 전날.(그래서 더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그 날, 아니 그 며칠 전부터 우리의 화제는 온통 올리비아 핫세와 크리스토퍼 미챰 주연의 영화 ‘ Summertime Killer’ 였다. 근처의 여고생들 치고 안 본 사람이 없다는데 우리 학교 만 단지 제목에 ‘Killer’ 가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관람을 못하게 하고 있었다. 별로 모범생은 아니었어도 하지 말라는 건 하지않던 내가 그날은 무슨 객기 였던지 종례시간에 가지말라고 다시한번 주의를 들었음에도 친구 둘을 잘 설득(?)하여 하교 후 애관극장으로 향했다. 표를 사서 막 계단을 오르는 순간 왼쪽에서 잡아당기는 느낌. οο수첩을 가지고 다니시는 교련선생님이었다. 그 때의 놀람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우리는 그냥 가겠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인일여고 학생이 생돈을 버리면 되겠느냐며 굳이 함께 보자고 하셨다. 어차피 이렇게 된거 영화나 보자는 심정으로 보았는데 지금도 그 때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장면 장면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선생님만 아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 날, 미림극장으로 간 친구들은 내 덕에 (?) 아주 잘 보았다는 후문이 있었다.)

다음 날 휴일은 종일 걱정이 되어 엉망으로 지냈다. 내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언니의 추궁에 사실을 얘기했고 그 소식은 곧 온식구가 알게 되었다. 엄마는 애들을 여럿 키우다보니 어디서 저런게 다 나왔다고...” 온 식구의 비난을 받으며 자는둥 마는 둥 날을 지새우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방송으로 호출을 받고 들어선 교무실에는 얼마나 많은 학생이 줄을 서 있는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전날 공휴일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수첩에 이름이 적혔던지 교무실의 긴 쪽의 벽을 거의 채울만큼 많은 학생들이 서 있었다.

학칙을 위반한 우리에게 내려진 벌은 일주일 동안 통일동산 주변을 쓸며 청소하라는 것이었다. 3교시가 끝나면 얼른 도시락을 먹고 점심시간 시작종과 함께 운동장에 모여 열심히 청소했다. 벌이라기보다는 즐거운 행사였다.

다음 날 담임선생님이 잠깐 부르시길래 갔더니

뭐 그 정도 일로 어머니를 학교에 오시게 했니 ?”

나도 모르는 사이 낮 시간에 용서를 빌러 오신 어머니, 내게 물어라도 보시면 좋았을 것을……. 그 때는 창피한 마음에 어머니께 죄송하다는 말씀도 못드렸는데 이제라도 용서를 빈다.

 

교련이라는 생소한 과목을 공부하던 시절. 인일여고가 문교부 지정 교련 시범학교여서 발표를 위해 거의 매일 열심히 훈련을 하였다.

키가 큰 친구부터 앞에 서서 줄을 맞춰 제식 훈련을 하였다. 키가 작은 나는 뒤에 섰고, 평소 훈련할 때는 운동장에서 함께 했지만 시범을 보이는 날에는 줄에서 잘려서 통일동산에서 줄을 맞춰 앉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통일동산에 앉아있는 신세라도, 줄도 맞추고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으며 색색의 연막탄이 터져 화생방 훈련을 할 때는 통일동산에서도 비닐 우의를 뒤집어쓰며 운동장 못지않은 훈련의 열정을 보였던 인일의 키 작은 훈련생들이여! 누가 우리를 열외라고 말할 수 있는가?

꿈을 키울 수 있었고, 벌을 받으러 일주일을 오갔으며, 산에서의 훈련을 실전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그곳. 교실에서 해 넘어가는 산 한쪽을 보며 노을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던 나의 여고 시절. 지금은 비록 그 모습이 조금은 변했을지라도 언제나 내 마음속에 그 시절의 즐거움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