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고 우리는 나이들고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어간다.

우리가 먹이고 가르치고 보호했던 아이들이 어느 새 우리들을 보호하고 있다.

나 같은 경우에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이 또 그러하다.

 

중학교 2학년 때 만난 도이는 벌써 서른 다섯이 되었다.

그 아이와 책 이야기, 영화 이야기를 참 많이 나눴는데

언젠가부터 내가 항상 묻는다.

도이야, 요즘 무슨 책 보니?

도이야, 요즘 무슨 영화 봤니?

도이야, 그 일은 어떻게 된 거니?

 

얼마 전 책꽂이를 정리했다며 책을 여러 권 나에게 주었다.

하나같이 모두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

아이들이 이렇게 컸네 싶었다.

그 중에서 골라 읽은 책이다.

 

언제부턴가 소설을 잘 읽지 않게 되었는데

오랜만에 이 소설을 무척 재밌게 읽었다.

사랑, 민족, 외로움, 종교, 정체성, 그리움, 믿음, 신화.......

뭐랄까, 정말 너무 오랜만에 보는 그런 먼 먼 지난 날의 노트처럼

그 소설이 주는 향기가 독특하고 귀하게 느껴져 무척 따뜻한 마음으로 읽었다.

 

작가는 레일라 아브렐라

수단인 아버지와 이집트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아일랜드에서 자라고

수단의 하르툼 대학과 영국의 정경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이다.

결혼 후에는 스코틀랜드 에버딘에 살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이 소설의 배경도 스코틀랜드이다.

춥고 어둡고 우중충한 날씨가 이어지는. 

 

이 소설에서 이슬람 여자인 주인공은 대학에서 정교한 이슬람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번역사 일을 하고 있다.

번역이라는 것은 단순한 언어의 옮김이 아니다.

한 지역의 문화를 다른 문화권으로 옮기는, 혹은 그 반대의 일을 하는 것이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에는 이런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조용하고 진중하고 정체성이 확실하며 우울하고 맑다.

중동 문학을 연구하는 레이라는 남자와 일 때문에 자주 접촉하게 되고,

둘 사이에 물 밑의 아직 보이지 않는 파문처럼 일렁임이 일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엔 둘에게 너무나 방해물이 많고

그런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서로 스스로 움직이질 않는다.

소심함이나 무력감일 수도 있지만 상대에 대한 존중일 수도 있다.

이 경우엔.

 

이 남자가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선 개종을 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 과정은 그야말로 인생 전체가 휘청 하는 일이므로 쉽게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순수한 이 두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의문을 갖고, 고뇌하는 그 과정이

무리하지 않게 참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이 값진 소설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연애소설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연애소설이라고만 말하기가 어렵다.

여러가지 주제가 섞여 있는데, <번역사>라는 이 소설의 제목이 바로 이런 여러 내용을

표현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스코틀랜드를 떠나 고향인 수단으로 가서

끝없이 자기의 감정을 확인하고 믿고 포기하고 받아들이고 하는 과정도 그렇고

떠난 그녀에 대한 감정을 다시 생각하고 고뇌하고 행동하는 레이의 모습도 순수하게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살면서 타인에게 나의 마음을 얼만큼 그대로 전할 수 있는 것일까?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은 가족들과의 대화에서도 얼마나 엄청난 벽을 느낄 때가 많았던가.

그런데 <내 마음을 그대로 전한다는 것> 그것이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키나 한 일일까?

그야말로 그리워하면서도 마음에만 담고 있고, 악연이어도 얼마나 강하게 끈질기게 이어지는 일이 많은가?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도 느끼지 못한 채 그냥 정신없이 흘러가는 관계는 또 어떻고....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우리는 한탄하지만.

상대방은 또한 내가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투덜댈 것이다.

작은 실수로도 깨지는 관계나, 지겨워하면서도 이어지는 관계는

마음 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보여 준다.

 

글쎄......

얼마 전에 본 다큐 <공대생들의 연애 방식, 원제  Love, Enginieering>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은 수 천년 (수 억년이겠지?) 진화해 온 최상의 유기체이기 때문에

어떠한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측정 도구나 판단 도구보다도 뛰어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그래서 모든 결정은 만난 후 3초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의 만남도, 헤어짐도, 갈등도, 기쁨도...... 다 서로의 마음을 번역하는데

성공하였거나 실패하였거나 했다는 건 아닌지....

 

 

암튼 이 책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았고

중요한 것은 시종일관 재밌게 읽었다는 것.

그런데 읽은지 오래 되어 벌써 다 잊어버리고 아슴아슴,

그저 살풋이 분위기만 기억에 남아 있다. 

 

읽으면서 재밌어서 친구들에게 이야기해 줘야지 했던 기억이 남아있고

그래서 요즘 아! 소리나는 그야말로 가을 날씨에 홀려

가로늦게 이렇게 친구들과 글 한자락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