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민진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월 미국에 사는 친구가 단톡방으로 보내온 이민진 작가의 유투브영상을 통해서였다.


MIT대와 하버드에서 했던 강연의 일부를 편집한 내용은 작가에 대한 매력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작가에게 질문을 던진 하버드생이라 밝힌 젊은이가 인옥이 조카라 더욱 친근감을 느끼며 그녀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2월은 미우라 아야코의 <자아의 구도>를 읽을 예정이었으나 이 책이 갓 나온 따끈한 신상이라 책 확보를 위해 3월로 미루며 2월엔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읽기로 했다.


파친코는 1910년에서 1989년까지 4대에 걸친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부산 영도에서 시작하여 주로 오사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책의 장점을 꼽자면 이야기가 술술 읽힌다는 점이 아닐까? 빠른 전개가 특징이다.


박경리선생님의 <토지>와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일제시대에서 해방, 근대사라는 시대의 격동기를 살았던 한 가족과 그 주변 사람 이야기라는 점에서 유사하게 느꼈다는 친구가 있었고, 선자와 일본 소설 <오싱>의 주인공이 참 닮았다는 말도 나왔다.


비록 선자가 힘든 삶을 살았고 억척스럽게 일을 해야 했으며, 고난도 많이 겪었지만 한편으론 엄청 운이 좋은 사람이란 지적에 공감한다.

그 시절 결혼도 안 한 처자가 아이를 가졌으니 인생 폭망일 수 있는 처지에 젊고 잘 생긴데다 집안 좋고 배운 사람에 마음까지 따뜻한 백이삭이 짜잔 등장해 결혼으로 그녀를 구해준다.

그 뿐인가? 위기 때마다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그녀를 돕는 고한수라는 인물은 평생 선자의 곁을 맴돌며 울타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의순이는 선자가 이토록 꿋꿋하고 강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아빠 훈이에게 받았던 전폭적 사랑의 힘이 아니었을까 하면서 어린 시절 아낌없이 받는 믿음과 사랑이 일생의 힘이 됨을 강조해 주었다.


이 책에는 여러 유형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나는 양진, 선자, 경희 세 여성의 살아가는 모습과 모자수의 아내인 유미, 솔로몬의 여친인 피비가 선택하거나 꿈꾸는 방식이 크게 다름이 흥미로웠다.

또 모자수의 여친인 에쓰코와 그녀의 딸 하나도.....

(은혜는 경희의 삶에 관심을 보이던데, 개인적으로 경희와 은혜가 닮았다고 생각했어. 

예쁘고 지혜롭고 사랑스런 여인이잖아)


여전히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들의 자기 희생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어머니였기에 할 수 있었던 그녀들의 쉽지 않았던 선택들과 짊어진 책임, 고통에 대해 깊이 감사하지만, 이젠 어머니, 아내, 딸 역할 외에 자신만을 위한 시간과 힘도 남겨두라고 말하고 싶다.

우린 너무 오래 미덕이란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무거운 굴레를 씌우고 당당하게 희생을 요구하며 산 것은 아닐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물론 여전히 우리는 사랑으로 기꺼이 자기 희생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겠지만...


경애는 이 책을 읽으며 오늘날 일부 노동자들의 삶의 현장이 1930년대보다 별반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을 지적했다. 선자네가 영도에서 하숙을 칠 때 낮밤 근무 교대에 맞춰 하숙생들이 좁은 방에서 교대로 잠을 자는데, 거제 조선소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지금도 실제로 그렇게 생활한다는거다. 

사실 많은 작업현장이 안전에 소홀하여 작업자들이 다칠 때 참으로 안타깝다. 소설이 아닌 삶의 현실에서 이웃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좀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말한 것 중엔 노아의 자살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노아는 왜 자살할까?

노아에게는 쌍뚱이 딸과 아들, 딸 네 명의 자녀가 있는데 노아가 죽고 난 후 왜 이 가족은 그애들을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나는 노아는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참 성실하고 총명한 사람이었지만 평생을 긴장과 모순, 자기 부정 속에 살아갔다.

완벽을 꿈꾸는.....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요셉은 노아가 떠난 후 노아의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노아에게 용서를 말해주고 싶어했다.

사람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무엇이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며 용서없이 사는 삶이란 숨을 쉬고 살아도 죽은 것과 같다고 말해 주고 싶어하는데 그 말이 가슴에 닿았다.


아쉬운 것은 그 때 선자가 한수의 만류대로 그저 멀리서만 노아를 보는 것에 만족했더라면 노아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좀 더 기다려 주었다면 어땠을까?

엄마는 자식을 목숨보다 사랑하지만 자식을 잘 모른다. 지금 우리들도 그렇지 않을까?


이 책이 쓰여지게 된 배경에 관심을 보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작가가 재일교포가 아닌 미국 이민자에 대한 이야기를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그런데 미국의 언론들은 어째서 이 책을 그토록 찬사했을까?

그들은 자이니치로 살아간다는 것을 얼마나 이해했을까?


후배가 오사카에 있는 건국중고등학교에 5년간 파견교사로 근무할 때 그 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을 만났던 적이 있었다. 민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학비가 일본인 학교를 다니는 것보다 비쌌지만 가난한 부모들은 비싼 학비에도 자녀들을 한국인 학교에 보내려 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정작 한국에 큰 관심과 기대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겐 한국이 조국이란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일본도 한국도 조국이 될 수 없는 그들의 현실이 가슴아프게 여겨진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들도 그럴까? 피비를 보면 재미교포들은 좀 다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일본이란 나라에 분노가 생겼다.


조국에 대한 빅토르 휴의 말을 떠올리면 난 여전히 어린아이 수준인 모양인가 보다.


'자신의 조국만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와 같다.

어디를 가도 자신의 조국처럼 느끼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세상 모두가 다 타국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 말로 완성된 사람이다.'


책 읽기를 마치며 왜 작가는 책의 제목을 파친코로 했을까에 대한 의문에 나름 답을 구했다.

파친코는 일본에서 공인된 사업이지만 사행성으로 인해 올바른 인간이 선택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일본인이 꺼리는 일이기에 상대적으로 조선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이 직업을 노아는 무척 혐오했고 모자수는 자신의 일을 좋아했지만 아들인 솔로몬은 좋은 교육을 받아 다른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와세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던 노아나 미국 유학까지 마친 솔로몬도 결국 파친코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을 보며 내국인이지만 외국인으로 살아야하는 자이니치들의 한계를 상징하는 것이 파친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 첫 문장의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가 참 뜬금없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다시 이 말이 생각났다.

상관없다는 말은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우리는 살아간다는 말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힘든 시기를 헤치고 여기까지 살아온 우리 윗 세대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인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책임감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3월 독서는 미우라 아야코의 <자아의 구도>

김인숙(이과) 신랑이 번역한 책인데 번역을 참 잘했더라.

책이 얇고 술술 읽히면서 던지는 메시지도 있어서 좋은 독서토론이 될 것 같아.


오랫만에 줌에 나타난 강인숙이가 모처럼 독서를 하려니 처음엔 잘 읽히지 않더니 이틀쯤 지나 발동이 걸리더란다. 신랑에게 책 내용을 말해주는데 인숙이 말빨을 우리가 알잖아. 신랑이 얼마나 재미있어 했을까? 덕분에 우리도 많이 웃었다.


책 읽으며 가장 가까운 이와도 대화를 풍성히들 하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