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교회를 가는데 남편이 느닷없이 노래를 불렀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질때,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란 노래였다.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것은 중학교 1학년 체육시간이었다.  원형교사 옥상에서 모여 앉아서 말하자면 orientation 시간이었는지 정인숙 선생님의 지시사항은 금방 끝났고 우리는 오락시간을 가졌다.

 

이때 아이들은 '전백향' (이렇게 실지 이름을 거론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에게 노래를 하라고 했더니 이 예쁘고, 키 크고, 보조개를 가졌고, 교양있고, 공부 잘하는 아이는 우아하게 일어나서  봄의 교향악을 불렀었다.  곡조도 처음 들었지만 가사는 얼마나 수준이 있었는지.   '봄의 교향악'도 그렇지만 사실 '청라'라는 말은 뭔 말인지 아직도 잘 모른다.

 

난 저 아이는 대체 어떤 학교를 나왔나?  호기심을 가지고 알아 보았더니 '박문'이라는 사립학교를 나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사립학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당췌 관심도 없고 몰랐었다.  그저 나에겐 창영, 송림, 서림, 축현, 신흥 아니면 숭의 정도 숫자로 계산되는 강호 세계만 존재했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겠지만 내가 다닌 창영학교가 제일 좋은 학교인지 알았다.  우선 빨간 벽돌위에 담쟁이 넝쿨이 올라가던 학교 건물도 멋졌지만 중공군의 숫자를 방불케하는 숫자는 숭의동에 있는 공설운동장에서 여러 학교가 모여서 운동회를 할 때 우리 창영의 함성을 따를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창창하다 우리학교' 이렇게 부르는 교가의 후렴 부분에 '창영' 하면서 남자 학생들이 일어나고 또 '창영' 하면서 여자 학생들이 일어나면 그 외침은  백마부대 용사들보다 더 씩씩했었다. 

 

게다가 옆에 가까이 있던 송림학교에선 불이 나서 4학년인가 5학년 때 마치 패잔병처럼 줄줄이 우리 학교로 공부를 하러 왔으니 우린 교실을 빌려 주면서 월세방 주인모냥 어깨에 힘을 주곤 했다.

 

더더욱 흔들리지 않는 결정타를 날린 것은 인천여중에 합격한 학생 수 였다. 

 

그러나 내가 문화적 충격을 받은 것은 중학교에 가고 난 후였다.  그곳에 가 보니 창영은 변방의 무리만 많아서 포장되지 않은 길에서 왁왁대는 나라였고, 작지만 고급스럽고 이미 한 차원 앞선  환경에서 온 '사립학교' 아이들이 힘이 있으면서도 조용히 포진되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일주일에 한 번 있었던 특별활동 시간에 우리 교실에는 바이올린, 아코디언 을 가지고 와서 하이든의 '장난감 교향곡'을 연습하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 아이들이 거의 사립학교 출신이었던 것이었다.  이 음악이 얼마나 멋졌는지 나는 나의 특별반은 가지도 않고 매번 이들의 연습장면을 지켜 보고 있었나보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무슨 반에 신청을 했는지 생각이 전혀 나질 않으니 말이다.

 

남편이 부른 노래 한 구절은 날 어린 시절로 가게 했는데  이렇게 옛날 기억만 생생하니 뇌의 전두엽이라나 측두엽이라는 어느 부분이 고장이 난 것이 틀림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