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들...
토요일 오후 네게 잠깐 편지 쓴다며 부대 홈페이지에 들어갔었다.

 쓰다보니 점점 길어져서 시간 가는 줄 몰랐더니
글쎄나.... 또 자동으로 로그아웃이 되어서 다 날아갔네.

 아이고 벌써 몇번 째인지.....


.1년 중 저녁 노을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가 요즘이란다.

가끔은 노을도 바라보고, 밤 하늘의 별도 바라보라는 말을 하려고 시작한건데

옛날 생각이 나서 길어졌던 거지.

엄마가 지금의 바로 네 나이 때였다.
생각 없이,  거의 장난삼아 산골마을 자원한건데

아무도 자원하지 않는 곳이니 당연히 발령이 원대로 나서, 산골선생님이 된 셈이지.
그곳은 공기 맑은 곳이니 노을도 별빛도 유난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T.V는 물론 전화도,  변변한 가게 하나도 없고,
젊은이들은 온 동네에 눈 씻고 봐도 없고,  그곳엔 교회조차 없었단다.

그 적막한 곳에서 저녁이면  노을 감상하느라고 석유 곤로 위의 밥을 얼마나
자주 태워 먹었는지 몰라.ㅋㅋㅋ (예나 지금이나 엄마 건망증..너 지금 그러면서 웃고 있지?)

그래도 처음엔 혼자만 쓰는 방이 있어서 좋았고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딸이 넷인 집에서 자라느라고 혼자 만의 방을 가진 적이 
없었거든.), 아무도 참견하는 사람 없어서 편하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잠깐...날이 갈수록 가족과 친구와 화려한 도시의 번잡함이 그리워
기회만 되면 튀어나올 궁리만 했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 같던 그곳이,  

미국에 가 있던 몇 년 동안에도
가장 그리운 곳이고 가고 싶은 곳이 되더라.
엄마 평생에 그곳에서만큼 편지를 많이 쓰고,  받고,
책 많이 읽고, 음악 많이 듣던 때도 없었어.
문화적인 공간이 하나도 없던 그곳이

가장 문화 생활(?)을 알차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셈이니 아이러니칼 하지? 
그리고 그곳의  제자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엄마를 찾아오더라.

진정으로 마음을 주고받아서일거야.
지금도 잠시나마 지극히 단순하고 사람 그리웠던 그 시절,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드는 걸

이해할 수 있겠니?

아들아....의미가 있든 없든
하루가 모여서 세월이 되고 그 세월이 흘러 한 인생이 되는 거 맞지?
 
대학 1학년 때 엄마는 엄청난 허무주의자였다. 
신앙심도 거의 없었으니 받은 것,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함은 전혀  없고, 온통 불만 투성이였어.
그때 쓴 일기를 꽤 오래 보관했었는데.... ..
이제서 말이지만 그땐 주제 넘은 상념에 공부를 너무 안 해서 낙제 직전이었단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해보면 쓴 웃음이 지어진다.

다행히 2학년 때부터는 '내가 지금 뭐하는 거야..'하면서 정신을 조금 차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여러가지로 아슬아슬한 시간들을 보낸 것 같다.


그렇게 엄마 평생 가장 시건방졌던 그때..
엄마는 내 모든 불만과 문제를 책 속에서 해결 받으려고 했었지.
그래서 닥치는대로 이책 저 책 읽으며
노자, 장자, 불교 서적 등등 까지....강의 빼 먹어가며,

심지어는 강의 시간에도 다른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단다.


좀더 현실에 충실한 시간들로 채웠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음이

나중에 보니 객기에 불과하더라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독서에 빠져 위험하지는 않은(?) 방황이었다고나 할까? 

그때 생긴 '문자중독증(?)'은 유익이 있기도 했지만
후에 신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교만 그 자체였더라.

다솔아...엄마는 네가 스무 살이 넘으면  너와 이런 이야기들을 하게 될 줄 알았어.
그리고 네 사소한  고민들이나 여자 친구 이야기 등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었지.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지만 내 욕심일까?
어떤 유행가 제목이 '서른 즈음에'던가...? 
오늘 엄마는 '스물 즈음에'라는 제목의 회고(?)를 네게 보내는구나.
바로 네가

지금

그 나이이고, 

자주 얼굴 볼 수도 이야기 할 수도 없는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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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생각에, 군대에 있는 지금이야말로
네가 많은 생각을 하며, 너 자신과 깊이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한다.
고로 힘들어도 지루해도 갑갑해도 의미가 있는 거라는 생각이다.

그래 정말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렇게 믿고 기도할게.

크리스마스날이면 대학로에서 동아리 친구들과 연주하는 걸 그리 좋아서 하던 네가
올해도 그 일을 못하며 성탄절을 맞이하겠구나.
그래도 힘내. 이젠 제대날짜가 매일 다가오고 있으니....ㅎㅎㅎ
무지 보고 싶다.. 아들아...오늘도 건강하고 평화롭기를...!
아주 오랫만에 엄마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