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히말라야바위취는 추운 겨울,테라코타로 마감한 계단참에서 만난 분홍색꽃이다.

한겨울에 느닷없이 만난 꽃이 신기하고 대견하긴 했어도 오래 들여다 보고 있기엔

발이 너무 시려웠다.

이름도 나중에 들어 알았다.

 

몇 달 뒤,이번에도 또 뜬금없이 맞닥뜨리게 된 히말라야바위취.

친구가 히말라야트레킹을 다녀와 쓴 글에서 그 꽃 얘기를 했다.

"아버지의 꽃"으로만 알고 있었던 꽃 이름을 그 먼 곳에 가서 알았다고 했다.

그녀가 올린 사진 속,축대 위에 다닥다닥 붙어 핀 분홍색 꽃의 무리가 아! 하는 감탄을 불렀다.

 

2003년에 등단한 소설가인 그 친구가 이번에 책을 냈단다.

아직 서점에 나오기도 전이라는데 고맙게도 직접 싸인까지 해서 보내주어 읽기 시작했는데

흔한 말로 도저히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다.

흥미진진한 스릴러도 아닌 단편들을 엮은 소설집인데 말이다.

 

"노을"--분명 경기도 어디쯤이 고향이라는 그녀의 소설속 인물들이 구사하는 제주도 방언은

거의 외국어로 느껴질 정도라서 소설 한 편을 쓰기 위해 수집한 자료의 양과 질이 짐작된다.

더 신기한 것은 소설의 맥락을 짚어나가다 보면 그토록 진한 사투리가 다 이해가 된다는 점이다.

작가의 내공이라 할 밖에...

 

"묵티가 온다"는 아마도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온 후에 쓴 작품인 듯 하다.

묵티는 작가와의 개인적 인연으로 알고있던 이름이라 소설 속 허구와 사실의 정교한 짜임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극으로 치닫는 순간 드러나는 반전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게 되고

공항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아들 대신 얻게 된 묵티를 기다리는 부부의 가슴떨림까지

실감나게 전해져 오며 눈물이 핑 돈다.

 

"솔밭 사이"--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니 온실 속의 꽃,삶이라는 과제에서 매번 그른 답을 골라내는

저항력 부족의 인생.

결국은 사이코 패스처럼 무의미한 살인을 저지르는 존재로 바뀌어 간다.

특별할 것 없는 한 남자의 자살 뒤에 숨은 이야기가 읽는이를 끌어들인다.

 

작가의 말처럼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히말라야바위취를 닮았다.

하나같이 아픈 상처를 끌어안고 응어리진 슬픔을 어쩌지 못해 속에 품고 산다.

안정된 환경에서 제대로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 보다는

피난민의 후예,지독한 가난에 휘둘리며 살거나 자신보다 더 아끼며 키운 자식들의 이기심 때문에

버려진 사람,부부간의 소통부재에서 오는 오해와 의심을 어쩌지 못하는 인간군상...

과거의 상처들이 얽히고 설켜 사람들에게 잊혀진 채 박스 안에서 뿌리끼리 엉켜 형태마저

박스 모양으로 박제된 감자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삶이란 것은 그렇게 만만하고 쉬운 게 아니라는 것.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의 순간에도 사랑과 이해의 실마리를 놓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히말라야의 강추위에도 살아남는 바위취의 강인함,끈질긴 생명력을 배워야 한다.

절망 끝에서 발견하는 것이 희망이니까.

 

어느 때부터인지 소설은 잘 읽지않게 되었다.

오랫동안 취미로 삼은 방면의 책 위주로 읽는 편이기도 하고

나이 탓도 있겠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확인하고 분석하고

받아들일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는 성향이 강한 편이라 허구의 이야기보다는

아무래도 사실쪽에 치우져 있달까...

글재주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일상의 기록들이 길게 보면 나름의 개인사가 될 것이고

한 두 명이라도 필요한 이들에게 자료로 쓰이면 좋겠다는 바램도 있어

검색만능의 시대에도 드문드문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입장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읽는 소설에 빠져들어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니 결말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이 마음을 저만치 앞서 나간다.

 

11편이나 되는 소설들을,스포일러가 될 수는 없기에 두리뭉실하게 풀어 보자니

답답하고 모호해졌다.

오늘 저녁 모임에서도 궁금해 하는 친구들에게 "정말 잘 썼더라!"라고 밖엔 할 수가 없었다. 

 

작가가 등단한지 10년이라고 한다.

1년에 한 편 꼴로 썼다는 계산은 너무도 평면적이라 작가 입장에선 억울할 듯 하다.

사실 한국의 50대 주부들이라면 자식들 먹이고 입혀 키우고 공부시키는 일 자체가

전쟁터의 전투병 같은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남편들은 명예퇴직이라는 허울 아래 조기은퇴를 강요당하니 뒤늦게 생활전선에 나서기도 한다.

살 만 해졌다 싶으면 병든 노부모 간병이 기다리고 있다.

자식들 결혼시키고 나면 그들의 자식을 돌봐주는 일이 이어진다.

이런 것 만으로도 기진맥진 할 일.

열망 하나로 주변이 잠든 한밤중,기도하듯 심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을 글들이어서일까.

읽는 사람도 작가의 집중과 몰입에 동참하게 된다.

 

피를 토하듯이 쓴 글을 너무 빨리 읽어버렸나...

작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 세대에겐 소설 속 삶의 모습들이나 풍경,지명들이 너무도 낯이 익으니...

작가가 펼쳐보여주는 세계에 마냥 공감하면서

그때는 고통이었으나 지금은 그리움으로 다가와 고개를 주억거리며 책장 넘기는 손길을

바쁘게 만드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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