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내내 최악의 외래품,미세먼지에 휘둘리다 3월을 맞았다.

폐사지만이 갖는 힐링(Healing)의 휠링(Feeling)은 너무도 강력해서 매번 답사일정이 나오면

그때부터 가슴을 두근거리며 기다리곤 한다.

 

옛선비들은 동짓날부터 매일 벽에 그린 매화꽃송이에 칠을 해가며 봄을 기다렸단다.

구구소한도.

81개의 꽃송이에 칠을 하고나면 봄이라 했던가. 

꽃에다 칠을 하다니,아낙들의 일이었을 듯 한데 남정네가 그러고 있었을 땐 뭔가 깊은 뜻이 있었겠다.

그랬거나 말았거나.

꽃은 꽃...

피어나는 꽃을 보며 새봄을 맞는 기쁨을 누리면 되는 것을~~

 

3월,꽃소식이 일찍 전해지는 남녘,산청 일대의 폐사지에서는 무엇을 보게될까...

 

지곡사 터에서 답사가 시작된다.

귀부 두 기가 어지간한 거리로 떨어져서 남아있을 뿐인 절터다.

다른 것은 흔적도 없는데 귀부에 남아있는 조각이 그나마 볼 만 하니 위안을 삼는다.

옛절터의 일부였을 자취는 펜션의 족구장으로 덮여 영영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폐사지는 그냥 빈터가 아니다.

몇 년 전에 남아있던 자취도 어느결에 사라져 버리니 변화무쌍,살아있음에 틀림이 없다.

 

 

 

 

윗쪽 저수지 때문에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그 양이 많지 않은데 물가 바위에 새겨진 세진교라는

각자가 당당하다.

속세의 먼지를 씻고 다리를 건너가면 해탈의 경지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염원이 실린 다리였을 터.

다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길가에는 개가 웅크린 형상의 바위 위에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자연석에 연꽃무늬를 새겨 알뜰히도

이용하고 있다.

 

삼장사 삼층석탑을 보러 간다.

원래는 5층의 통일신라 탑이었을 거라고는 하나 홀쭉한 몸돌의 균형이나 세부의 수법에서 아마도 후기의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무너져 흩어진 것을 논 한가운데에 수습해 놓아 마을 사람들의 기도처가 되고 있다.

 

 

사림의 거두,남명 조식의 산천재.

담장 밖 산수유가 노란색으로 화사하다.

남명매라 불리는 나무에 다닥다닥 맺힌 봉우리들이 슬슬 열리기 시작했다.

겨울에 질린 탓이겠지,너도나도 카메라를 들이대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다음 주 쯤엔 만개해 화려하게 빛을 발할 것이다.

 

 

 

단속사 가는 도중,광제암문이라 새겨진 바위를 찾았다.

일설에는 그 바위에 짚신을 벗어놓고 절구경을 하고 나오면 그 신이 썩어있었다고 할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백발 삼천장 같은 과장이다.그래도 뻥이 세야 임팩트가 있는 법.

당간지주와 쌍탑의 크기로 미루어 꽤 큰 규모였을 것 같긴 하다.

 

 

 

 

탑을 보러 낮은 축대 위로 올라서는 순간 코끝을 놀래키는 향기.

올려다 보니 핑크색으로 물든 홍매화 한 그루가 반겨준다.

향은 바람에 실려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지만 그 여운은 한참 간다.

행복 엔돌핀이라 할까.

찰나의 스침이 두고두고 마음 속에 향기를 되살리며 행복감을 재생산해줄  것이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쌍탑이 늠름하다.

바로 옆의 정자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볼 수 있을 것도 같다.

턱을 받치고 앉은 집들이 답답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이것도 폐사지의 운명이려니. 

 

 

 

애재라!

정당매는 입적을 하였다.

꽃 자체보다 의미가 더 중요한 사람들에겐 그 애석함이 더 크게 다가올 듯 하다.

작년까지도 꽃을 피웠다고 하는데 600년의 긴 삶이 버거웠던 모양이다.

대신 주변에 심어놓은 나무에서 꽃들이 다투어 피고있어 서운함을 달래준다.

한쪽에는 정당문학 강회백을 위한 비석과 비각이 남아있다.

 

 

 

 

남사예담촌의 목련도 꽃망울에 봄이 잔뜩 들어있어 일촉즉발,터뜨릴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하다.

스토리 텔링이 대세인 요즘,그럴 듯한 이야기가 얽힌 나무와 고택이 어우러져 오후 시간의 여유를

채워준다.

 

 

 

 

 

마지막 코스 도전리 마애불상군.스타는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알고보니 여기가 하이라이트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란다.

길가에 설치해놓은 130 개 쯤의 계단을 올라가며 도대체 뭐가 있길래..했는데,

모두가 탄성을 지르며 선 자리에 올 스톱!

코를 박고 들여다 보며 움직이질 않는다.

경사진 바위에 올망졸망 마애불들이 나란히 앉았다.

각각의 불상은 옆에다 이름표를 달고 있다.

희한하게도 OO선생이다.

시공을 휙 날아 렘브란트의 야경이란 그림이 떠오른다.

돈을 받고 당사자들의 얼굴을 화폭에 그려넣었다던가...

그 비슷한 것이었을까.

마을의 유지들이 멤버쉽을 사서 자리를 배당받았을런지도.

많이 낸 사람은 윗쪽에 크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랫쪽에...

29기나 된다고 하는데 가장 작은 것은 키가 6 cm.

6cm 짜리 불상은 뭐지?

무슨 생각으로 그 좁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돌을 쪼았을까...

그들의 정신세계가 궁금해지는 작품(!)들이다.

저무는 해는 노란색 빛줄기를 보내주니 세월의 풍상으로 흐릿하고 뭉개진 얼굴의 불상들이

한층 신비롭게 보인다.

잠시 그러고들 있다가 정신이 돌아오자 얼른얼른 뒷사람한테 자리를 내주며 보라고

재촉 아닌 재촉을 한다.

감동을 나누고 싶었던 거다.

40명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라 느껴졌다.

이게 바로 폐사지 답사의 묘미.

폐사지 답사의 중독성은 비할 데 없이 강하다는 걸 또 한 번 실감한다.

 

 

(가운데 맨 아랫단에 6cm의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