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아모, 루나레나와 필라르를 가르치다


출판사라도 되는 듯 책이 이리 저리 쌓여있는 연구실에서, 안명옥 교수는 인터넷 검색에 열심이었다. “이렇게 내용이 부실해서 어떻게 찾아가라는 거야?”

기자가 10분쯤 늦은 틈을 타서 강연할 학교 길찾기에 나섰는데 생각같지 않은 모양이다. 결국 ‘대충 위치만 알고 부딪혀야겠다’는 혼잣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모습은 공식석상에서 보던 그대로 핑크색 안경에 화사한 옷차림이다. 교통편이 여의치 않은 탓에 꽤나 걸은 기자에게는 여름에서 봄으로, 갑자기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 느껴진다. 중년을 넘긴 나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소녀 같은 인상이다. 그런 인상답게 안 교수는 바쁜 시간을 쪼개 일을 하나 벌였다. 소녀들을 위한 성교육서인 <루나레나의 비밀 편지>를 출간한 것이다.

루나 프로젝트, 한쪽이 마련되다

책을 잠시 들춰보는 것으로도 기존에 출판된 성교육서와는 상당히 다르다. 인터넷 서점에 오른 서평을 보니 이유가 나온다.

‘내 평생 이렇게 쿨~한 성교육책은 처음이다’, ‘너무 자세하게 나와서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책인데 서평은 모두 어른이 쓴 듯하다. 그만큼 다른 성교육서에서 가볍게 넘긴 부분까지 세세하게 다룬 ‘실용서’라는 느낌이 강하다.

게다가 그림을 그린 만화가는 우리나라 순정만화의 대가인 황미나 선생. 남녀노소,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봤을 SF만화 ‘레드문’의 등장인물인 ‘루나레나’를 주인공으로 소녀들이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한 구성이 돋보인다.

“10년 전, 레드문이 댕기(만화잡지 제호)에 연재 될 때부터 루나레나를 내 프로젝트의 주인공으로 점찍었죠. 달(루나)로 표현되는 여성의 의미가 깊이 다가왔거든요. 이 만화는 그 프로젝트의 작은 부분이죠.”

‘생명과 안전’, 한 가지만 한다

지금 안명옥 교수가 관여하고 있는 조직은 10개를 훨씬 넘는다. 의협 대외협력이사부터 시작해 피임학회, 산부인과학회, 모자보건학회, 골다공증학회 등 여성과 조금이라도 관계되는 조직에는 모두 몸담고 있는 셈이다.

“처음 대학 들어갔을 때 도서관에서 ‘소의는 질병을 고치고, 중의는 인간을 고치고, 대의는 사회를 고친다’는 글을 봤어요. 그래선지 의사가 질병을 고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어요. 환자를 보면서도 질병보다 사람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 일, 저 일이 다 맞물려 돌아가니까 여러 가지 일을 해도 힘들다는 생각은 없어요.”

사회를 고치는 대의가 되겠다는 결심은 생명과 관계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건 관심을 가지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의협에서 원전 수거물 관리시설이 들어설 위도에 대한 공청회를 연 것도 생명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사람들, 심지어 과학기술부나 산업자원부에서도 의사들이 왜 이 문제에 나섰는지 의아해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생명과 안전’에 대한 일에 의사가 빠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from the womb to tomb

산부인과로 전문의를 따고, 미국에서 예방의학 전문의와 보건학박사 학위를 따면서 생각했던 것은 여성의 건강이 바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라는 사실이었다. 대학에 들어와 우리나라 여성들의 형편없는 지위를 느끼게 되면서, 자신의 몸에 대해 제대로 알고 조절할 수 있다면 그것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단다. 이는 모자 보건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됐고, 학위과정을 한꺼번에 두 개씩 밟을 수 있는 원동력도 됐다. 그렇게 정신없이 공부하고 포천중문의대로 돌아와 벌인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산전관리센터 관리, 라마즈 분만법 도입, 이름만 있던 소녀 클리닉을 ‘소녀들의 산부인과’로 다시 살려내는 일까지 정신없이 해치웠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부터 ‘자궁에서 무덤까지’라는 개념을 갖게 됐고, 지금 작업은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과정이에요. 그걸 가능하게 해준 학교에는 정말 감사하죠. 대학에서 아무리 좋은 기획이 있다고 해도 행정에서 협조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니까요. 다른 대학과 일해보면서 그런 것을 뼈저리게 느꼈죠.”

내가 우주의 중심

그가 원장으로 있는 ‘소녀들의 산부인과’도 중요한 ‘과정’ 중 하나다. ‘소녀들의 산부인과’는 우리말을 하는 전세계 한인 소녀를 위해 온-오프라인에서 동시에 문을 연다. 오프라인은 전국 네트워크로 확장할 욕심도 부리고 있다고.

“<루나레나의 비밀 편지>도 이런 기획으로 만든 거예요. 어릴 때부터 자존감을 가지고 자기 몸을 사랑하고 보살핀다면, 얘네들이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됐을 때 우리나라가 변한다고 생각해요. <루나레나…>에서 보내는 끊임없는 메시지는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 나를 존중하지 않는 이 세상의 모든 폭력에 대항하라는 거죠. 오빠가 떠날까봐? 그런 오빠는 차버리라는 거지. 이건 ‘소녀들의 산부인과’를 만든 계기이기도 해요.”

Dr. Amour

“황미나 선생은 거의 3개월 이상을 쫓아다녔어요. 데뷔작품부터 다 읽은 팬이라서도 그랬지만, 황미나, 루나레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10년 전부터 생각해온 거니까요. 쫓아다닌 보람이 있어서, 제 머릿속에 들어있던 그대로를 뽑아내 주시더라구요. 작업하는 동안 정말 행복했죠.”

루나레나가 소녀들 곁으로 찾아가는 것은 이번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대생을 대상으로 한 2편, 임신출산을 그릴 3편, 완경(월경의 완성, 폐경)의 루나까지 여자의 성을 꼼꼼히 다룰 생각이다. 그리고 루나의 남자친구로 나오는 필라르를 주인공으로 한 교육서도 만들 예정이다. 목표는 필라르를 진짜 ‘젠틀맨’으로 키워내는 것이다. 소년들이 쉽게 접하는 왜곡된 성지식을 완전히 바로잡는 책이 될 거라고. 그의 목표는 루나 시리즈와 필라르 시리즈가 각 가정마다 자리잡는 것이다. 최소한 몰라서 겪는 불편함과 불행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책 속에서 루나는 닥터 아모의 가르침으로 조금씩 자기 몸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아모(amo)는 그의 닉네임이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아모는 스페인어로 사랑이란 의미라구요. 사랑을 나누고 살라는 말씀도요. 그래서 닥터 아모라는 캐릭터가 사랑이 가득한 의사의 이미지로 창출될 수 있다면 좋겠고, 저 역시 의사라는 축복받은 지식인으로 내 자리에서 내 일에 충실할 수 있으면 하는 게 바람이죠.”

대상을 사랑하기 위한 가장 큰 전제는 대상에 대한 이해다. 남자와 여자, 나라와 나라, 인간과 자연이 대척점에 서있는 것은 서로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오해를 푸는 방법은 상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은 상대에게도 잘못 전달되는 법이다. 닥터 아모가 하는 일은 ‘여성’이라는 존재에서부터 시작되는, 사랑하기 위한 준비다.■

김민아 기자 licomina@fromdoctor.com
사진 김선경 기자 potopia@fromdoctor.com |+ 목록보기 |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10-23 1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