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 잘 생긴 전나무 숲 사이로 난 길 )
트롤 요정의 길을 따라 게이랑하르 피요르드를 건너서 릴레함메르로 오는 길에는
위대한 트롤의 벽도 있고 잘 생긴 전나무 숲도 있었다.
트롤의 벽은 어느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웅장했고
전나무 숲 길은 금방 화폭에서 튀어 나온것 처럼 환상적이었다.
이번 여행길은 모든 것이 다 좋았다.
비가 오면 촉촉한 풍경이 무드가 있어서 좋고
해가 반짝 나면 그 환한 빛에 생기를 발하는 풍광이 좋았다.
길을 잘 못 들면 보너스로 경치를 보게 되어 좋았고
배를 놓치면 여분의 자유시간을 갖게 되어서 좋았다.
아니,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은연중에 다들 긍정의 힘을 발휘하여 어떤 상황도 불평하지 않고 즐겁게 받아들였다.
좋게 생각하니까 정말로 모든 것들이 다 예상치 못했던 기쁨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우리가 이번에 복이 많은 여행객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출발하여 러시아와 핀란드와 스웨덴과 노르웨이까지
숨 가쁘게 달려 온 긴 여정의 마지막 밤은 동계올림픽 개최지였던 릴레함메르에서 맞게 되었다.
이제 하룻밤만 더 자고 나면 우리는떠나왔던 곳을 향해 다시 발길을 돌릴 것이다.
그렇게 서둘러 왔는데도 릴레함메르에 도착을 한 것은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우리는 여행지에서의 마지막 밤을 와인을 곁들인 랍스터를 먹으며 마무리 하였다.
이제 남은 여정은 내일 아침 일찍 오슬로로 이동하여
바이킹 박물관과 비겔란 조각공원을 구경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뭉크의 그림을 못 보고 가는 것은 너무도 아쉬운 일이어서
우리는 되도록 예정된 일정을 서둘러서 소화하고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뭉크의 작품들까지 보고 떠나기로 했다.
우리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건 단지 밤 12시가 넘도록 여전히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는 노을 탓 만은 아니었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모든 여정이 끝나고 있다는 사실이 아쉽기도 하면서
두고 온 사람들에게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설레기도 해서
빛이 새어 들어오지 못하게 커튼을 단단히 쳐 놓고도 밤새 뒤척이다 아침을 맞았다.
아침이 되자 우리는 여행 가방을 다시 한번 단단히 잘 챙겨서 쌌다.
오늘 우리는 오슬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런던을 경유하여 서울로 돌아간다.
그래서 비행기에 짐으로 부칠 가방을 미리 야무지게 단도리 해 가지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평소보다 조금 빨리 오슬로를 향해 출발했다 (계속 )
우야꼬....
그래도 어여 매듭을 짓기는 해야 하니까 그냥 쓸랍니더.
오늘 저녁 내내 음악 찾아 헤맸는데 그냥 이걸로 낙찰을 볼랍니더.
아주 근사한 팬 풀륫 연주곡을 찾았는데 링크가 안되네요.
그거면 참 좋은데....
암튼 음악도 깔았으니 진도 나갈랍니더.
오슬로는 <주의 광장>, <주의 세계>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현재 노르웨이 인구는 약 480만 ~ 490만 명 정도인데 그 중에 약 50만 명이 오슬로에 산다.
붉은 벽돌로 지은 시청사 건물에서 노벨 평화상 시상식을 한다.
다른 모든 상은 스웨덴에서 시상을 하고 오직 평화상만 노르웨이에서 주관을 하는데
오슬로의 왕궁 앞거리에 있는 그랜드 호텔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는 사람이 묵는 노벨 스위트가 있다.
그 방은 오직 수상자만이 묵을 수 있어서 일년 내내 거의 비워 둔다고 했다.
우리나라 대통령을 지낸 어떤 양반도 그 상을 받고는 이 곳에서 묵었다며
가이드가 콕 찍어 그 방을 알려 주었다.
호텔은 외양으로 보아서는 그리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은 수수하고 낡은 건물이었다.
노르웨이가 낳은 세계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작곡가 그리그와 화가 뭉크, 극작가 입센과 조각가 비겔란, 그리고 탐험가 아문젠이 있다.
이번 방문 길에 우리는 이미 베르겐에서 그리그를 만났고
이곳 오슬로에서 비겔란과 뭉크를 만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우선 바이킹 박물관을 먼저 들렀다.
오슬로의 바이킹 박물관은 왕족들이 사는 동네에 있었다.
겉보기에는 그리 호화롭지 않는 동네였는데
박물관 바로 앞에 있는 집들은 평당 2억원이 넘는단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비싸다는 강남 집값은 감히 명함도 못 내밀 가격이다.
노르웨이의 물가는 살인적으로 비쌌다.
우리도 이번 여행 경비의 절반 이상을 3박 4일간 머무른 노르웨이에서 썼단다.
얼마나 비싸냐 하면 보통 500원짜리 생수 한 병이 여기서는 5000원이었다.
숙박비는 물론이고 음식 가격도 아주 비쌌다.
그러니 집값도 비싼 것은 당연하지만 박물관 주변은 해도 너무했다.
박물관은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수수하고 단단하게 지은 건물이었다. (계속 )
( 바깥에서 본 바이킹 박물관 )
옛날 옛적에 살았던 바이킹들은 사후 세계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이킹이 죽으면 생전에 타던 배를 시신과 함께 땅에다 묻어 주었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배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보물이며 집기는 물론 심지어 부리던 종까지
그 배에 가득 담아 가지고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바이킹은 죽은 후의 세상에서도 배를 타고 다녀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죽음 이후에 대한 의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이 공통으로 지녀온 화두인 모양이다.
지금껏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결론을 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죽으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두고 몸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누리던 것들을 다 끌고 다음 세상으로 간다고 믿은 것은 어리석음일까, 지혜일까?
박물관 안에 전시된 것이라고는 달랑 배 두 척과 약간의 소품들 뿐이었다.
이 배는 1000여년 전에 살았던 어느 왕과 왕비의 배였다.
바이킹의 장례 풍습을 근거로 고고학자들이 땅에 묻혀 있던 배를 발굴하였고
묻을 당시의 원형을 복원시켜 박물관에 전시를 하였다. (계속 )
( 땅에 묻혀 있는 배를 발굴 당시의 모습 ) ( 원형을 복원시켜 전시해 놓은 배 )
박물관에서 나와 오슬로 시내에 있는 한국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원래 오슬로에는 한국 식당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하던 대만 사람이 따로 식당을 차려 가지고 나온 바람에 지금은 두 군데란다.
마침 원조 한국 식당은 지금 휴가를 떠나느라 문을 닫았단다.
우리는 대만 사람 Mr. Tang 의 식당으로 갔다.
여기 주방장은 이라크 사람이라는데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한국 음식을 더 잘했다.
김치 찌개, 제육 볶음,무 생채, 오이 무침, 숙주 나물 등
입맛이 확 돌아오게 칼칼한 토속적인 한국 음식에다가 싱싱한 연어회가 같이 나왔다.
연어회는 입에서 살살 녹았고 찌개 국물은 뜨끈한 것이 아주 시원했다.
특히 손수 반찬을 들고 다니면서 일일이 챙겨 주는 주인의 서비스 매너가 아주 정중하고 친절해서 좋았다.
여행지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한국 음식으로 할 수 있게 계획해 주신 분께 감사의 박수를 드리고
우리는 서둘러 행장을 수습하고 차에 올랐다.
비겔란 조각 공원을 들러 미술관에서 뭉크 작품을 보고 공항으로 가려면 촌각도 아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정을 하루 정도 더 잡고 올 걸.... ( 계속 )
비겔란 조각공원은 해마다 200만명 이상의 국내외 관광객이 찾아 오는 오슬로의 관광명소다.
오슬로 시에서 제공한 약 10만평의 부지에다 비겔란의 작품으로 조성한 이 조각공원은
연중 매일 24시간 동안 방문객에게 무료로 개방을 하고 있는데
조각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은 물론 운동과 휴식을 취하러 오는 시민들도 많다.
이 공원 안에 구스타프 비겔란의 조각 작품 212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비겔란은 조각품의 배치는 물론 가로수와 화단의 위치까지 모두 기획을 하였다.
이 조각공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한 사람의 조각가가 한 가지 주제에 집중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구스타프 비겔란은 <인간의 삶>에 대해 골똘히 연구한 작가였다.
공원 가득 전시되어 있는 모든 작품 속에는 인생의 사이클이 담겨 있었다.
하나의 작은 씨앗이 잉태 되어 사람으로 태어나 자라고,
때가 되면 적당한 짝을 찾아 자식을 낳아 기르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기쁘고 슬픈 순간들을 겪으며 늙어가고,
그러다 결국엔 유골이 되어 땅에 묻히는 인생.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 유골에서 다시 생명이 움트고 싹이 돋아나 새로운 태어남의 사이클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대개 처음과 끝이 맞닿게 배열되어 있었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기독교적인 사상과 불교의 윤회사상이 합쳐진 듯한 내용이었다.
사람을 유혹하고 시험하는 존재를 뱀으로 묘사를 한 것은 기독교적인 생각인데
죽음으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묘사한 것은 윤회설을 근거로 한 것이 분명했다.
그가 생각하는 삶의 여정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끝이 나는 직선이 아니라
출발점과 도착지가 서로 맞닿아 있는 원이었다.
나는 그의 작품 <삶의 수레바퀴>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공원의 후문 쪽에 있는 그 작품은 이 공원에 있는 모든 작품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듯했다..
정문에서부터 그의 작품에 매료되어 가이드의 작품 해설을 꼼꼼히 메모하며 봤는데
이 작품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내 영혼이 본능적으로 작가의 의도를 파악했다고나 할까..
이것은 네 명의 어른과 세 명의 어린이가 한데 뒤엉켜 있는 모습의
직경 3미터 짜리 원형 조각품이었다.
이 바퀴와 원의 형상은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의미와 삶의 영원성,
요람에서 무덤까지 연결되는 인간의 삶과 계속 돌고 돌아 이어지는 윤회사상까지 내포하는 듯했다.
이러한 삶의 수레바퀴는 중앙에 위치한 청동 분수대에도 있었다.
이 분수대는 공원에서 제일 오래된 작품이면서 비겔란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역작이라고 했다.
분수대 중앙엔 6명의 건장한 남자가 거대한 물쟁반을 받치고 있는데
모두들 하나같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는 분수대 테두리 위에다 20여개의 사람과 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조각상도 세워 놓았는데
이 또한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삶의 여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테두리 옆면은 칸을 나누어 작은 액자를 만들고
조상들의 유골을 줍는 어린아이부터 청장년기 모습을 거쳐
노년을 지나 결국은 죽음에 이르러 유골로 돌아가는 과정을 새겨 넣었다.
그림을 따라 한바퀴를 빙 돌면 한바탕 꿈을 꾼 것같이 인생이 끝나는데
끝나는 지점은 바로 출발점으로 이어졌다.
완벽한 순환이었다.
조각공원에서의 첫 작품인 이 분수대를 만들면서
그는 공원에 전시할 모든 작품의 주제를 <인생의 행로>로 설정한 듯했다.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삶의 수레바퀴들 덕분에 나도 사색에 잠겼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우리의 삶은 결국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희노애락의 소용돌이는 왜 항상 따라오는 것인가?
잘 모르겠다.
내 생각의 수레바퀴도 계속 돌고 돌 뿐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계속)
비겔란의 작품 - 삶의 수레바퀴 ( Wheel of Life )
비겔란 작품 - 조각공원 중앙에 있는 분수대
분수대 테두리에 세워 놓은 조각품 - 나무와 인간 (청동으로 만든 작품 )
조각 공원에 있는 비겔란의 작품 중 하이라이트는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모노리스 석탑이다.
총 높이 17.3미터, 총 무게 180톤의 거대한 돌에다 121명의 사람들이 엉켜 있는 형상을 새겨 놓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보기 힘든 작품이 모노리스 (Monolith) 석탑이다.
이 석탑의 돌은 노르웨이 동남쪽 해안의 산에서 캐서 오슬로 피요르드를 통해 운반을 해 왔단다.
이 돌은 1827년에 지금의 조각 공원 현장에 도착하여 1929년부터 3명의 석공이 14년간 작업을 한 끝에
비겔란이 죽기 바로 직전인 1943년에 완성되어 1944년에 일반에게 공개하었다.
비겔란은 화강암에 직접 조각은 하지 않고 똑같은 크기의 석고 모형만을 만들었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돌을 쪼는 작업은 당대의 솜시 좋은 석공에게 시켰다.
이 모노리스에 대한 작품 해석도 분분한데
혹자는 이것이 남근을 형상화 한 것이라 하고.
혹자는 삶의 투쟁,
혹자는 영혼세계에 대한 인간의 동경 내지는 인간의 부활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단다.
내 눈에는 그것이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보였다.
벌거벗은 인간의 몸이 뒤엉켜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이 괜히 힘들었다.
원통을 빙 둘러서 차곡차곡 포개진 裸身들의 지친 얼굴에 드리운 절망은 삶의 무게에 짓눌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 작품을 삶의 투쟁으로 보는 견해에 동의하는 것인가?
한 개의 돌에다 121명을 새겨 놓은 < 모노리스 (Monolith) 석탑 >
다리 위에 있는 여러 조각품들 중에
비겔란의 대표작에는 들지 않고 그 규모도 작지만
이 조각공원과 오슬로 시의 상징이 된 작품, < 화가 난 아이 >가 있었다.
이 작품은 도난을 당했다가 다시 찾는 바람에 더 유명해졌다는데
세살 정도 된 아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이다.
화가 난 아이 바로 옆에는두 남녀가 꼭 껴안고 서 있는 작품이 있다.
가이드 말이 아이의 부모가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아이가 질투하여 화를 내는 것이란다.
그 해석을 그대로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화를 내는 아이의 표정이 너무도 생생한게 재미있다.
사랑을 나누는 남녀 (아이의 부모?) 화가 난 아이
나는 이 조각공원에 오기 전에는 비겔란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워낙 내가 미술에 문외한이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비겔란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다.
나 같은 사람도 미켈란 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익히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이 그의 작품들을 보았다.
공원에 전시된 작품들 대부분은 제목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작품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다 알것 같았다.
그냥 느낌이 통했고 공감이 갔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인생에 대한 성찰과 삶에 대한 깊은 고뇌에 공감을 했고
단단한 돌과 청동을 가지고 살아 숨쉬는 인체를 만들어 낸 그의 솜씨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젊은이의 힘줄과 근육은 물론 기름기가 다 빠진 늙은이의 쭈글쭈글한 피부와 주름 까지
그는 뛰어난 관찰력을 토대로 생동감 있게 표현을 해 놓았다.
어떤 것은 따뜻한 온기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비겔란은 정말 대단한 작가였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사람들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는데 조금도 외설스럽거나 보기 민망하지도 않았다.
( 계속 )
이게 이게 마지막은 간단히 끝나려나 했더니만~~~~~~~~~~~~~~갈수록 어려워지네~~~~~~~
121명을 조각해 놓은 건 좀 멀미가 난다.
자세히 보면 사람인데 그냥 건성 보면 뭔가 우굴우굴 징그러운 느낌이야.
난 화가 난 아이가 제일 맘에 드네 .ㅎㅎㅎㅎㅎ
노르웨이에 대해서 솔직히 관심도 없었는데 엄청 문화적 저력이 있는 나라구나.
오늘아침은 시벨리루스에 대한 기사가 나오면서 핀란드 소개가 신문에 났었는데
거기도 굉장하더라구.
에고 무식한 게 다 뽀록이 나네요.
나는 어떤 운명의 힘에 이끌려서 이렇게 삶의 수레바퀴 앞에 까지 오게 되었을까?
비겔란은 너무도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조각가였다.
실제로 그는 여러 종교 서적과 성경, 신화를 깊이 연구하였다고 했다.
덕분에 나도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 들고 말았다.
- 엄마,
내가 꼭 태어나야 할 영혼이었다면 말예요.
엄마가 아니었어도 세상에 태어났을까요?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자식으로 말예요.
그럴 경우에 말예요.
그 사람도 저라고 말할 수 있나요?
비록 겉모습은 지금과 다르지만 제 영혼은 같은 것이니까요.
그런데요.
제 영혼은 어디에 있다가 엄마에게 왔어요?
언젠가 우리 작은 아이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나는 그 때 딱 부러지게 대답을 못하고 우물우물 넘기고 말았다.
아들이 말하는 꼭 태어날 영혼이란 것과
잉태되기 전의 씨앗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막연히 우리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이 땅에 잠시 머물다가
육신의 옷을 훌훌 벗는 날 영원한 처소가 있는 하늘로 간다고 생각한 내게 아들의 질문은 기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그 문제의 답을 생각하느라 끙끙거렸다.
아직도 명쾌한 답은 얻지 못하고 있지만.....
비겔란도 여러 생각 끝에 그 문제에 봉착을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기독교 사상의 근간에다가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사상을 접목시켜
자기 나름대로 삶의 수레바퀴를 만들어 보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비겔란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 사이클을 다 돌고 난 후에 새로운 사이클이 또 시작을 하는 것이라면
그 생명의 씨앗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누가 씨앗을 가지고 있다가 한 시대가 가고 난 자리에다 새로 싹을 틔워 주는 것일까?
그냥 야생화처럼 자생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에는 인간의 삶이 너무도 오묘하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굴러가는 것이 삶의 수레바퀴가 아닐까?
내 생각은 거기서 멈추었다.
그 화두는 만만한 것이 아니니까 다시 숙제로 넘겼다.
어느새 시간은 5시 10분에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러 곧장 가기에도 빠듯한 오후 세시가 다 되었다.
우리는 서둘러 국립 미술관으로 이동했다.
뭉크의 <절규>는 꼭 보고 가야한다고 우리들이 아우성을 친 덕분에 덤으로 가게되는 코스였다. ( 계속 )
우리는 오슬로 시내에 있는 국립 미술관 계단을 뛰어서 올라갔다.
박물관은 울타리도 정원도 없이 달랑 건물만 있었다.
버스를 길가에 잠시 세워 놓고 우리는 꽁지에 불이 붙은 사람들처럼 서둘렀다.
수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여러 방들은 못 본척 하고
가이드의 꽁무니를 따라 곧장 뭉크의 방으로 갔다.
뭉크의 작품은 하나같이 흐물흐물 흘러내리는 듯한 선의 터치와
섬뜩하게 느껴지는 흰색의 사용으로 묘한 느낌을 주었다.
사진으로 많이 보던 그림들이라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전시장 한복판에 그 유명한 <절규>가 걸려 있었다.
다른 그림들은 보통 액자에 넣어 걸어 놓았는데
절규는 아크릴 보호판으로 덮어 놓았다.
게다가 혹시라도 훼손시킬까봐 그러는지 정복을 입은 경비원이 감시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덕분에 사진은 한 장도 못 찍었다.
사진은 커녕 카메라도 꺼내지 못하고 그냥 그림에다 눈도장만 콱 찍고는 서둘러 나왔다.
벌써 세시 반.
까딱하다간 비행기를 놓치게 생겼다. (계속 )
( 울타리도 정원도 없이 건물만 달랑 있는 오슬로 국립 미술관 )
노르웨이 여행 기간 동안 우리와 동행을 한 가이드는 매사에 침착하고 능숙했다.
시간에 쫓겨 부리나케 왔지만 그녀는 결코 허둥대지 않고 차근차근 일을 마무리 해 나갔다.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한국까지 곧장 가게 부쳐 놓고는
유럽에서 우리가 산 모든 물건의 세금을 환급받을 수 있는 서류에 확인 도장까지 금새 받아다 주었다.
드디어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녀와 함께 베르겐에서부터 피요르드를 거쳐 오슬로까지 오는 동안 정이 많이 들었다.
우리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그녀와 꽉 껴안고 작별 인사를 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핑 돌자 모두들 덩달아 목이 메었다.
다시 만날 기약을 할 수 없어서 더 서운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이로써 모든 여정이 다 끝났다.
러시아에서 시작하여 노르웨이까지 온 나그네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는 런던을 경유하여 우리 나라 비행기로 갈아 타고 인천공항으로 갈 것이다.
떠나올 때의 설레임과는 조금 다르게 마음이 설렌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맞다.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들이 곧 내 집이다.
그들에게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떠나올 때보다 더 좋다.
이 여행에서 나는 버킷 리스트 중 많은 것을 지웠다.
러시아와 백야와 자작나무 숲과 오페라와 크루즈와 핀란드와 스웨덴과 베르겐과 피요르드와 빙하와 멋진 산장의 밤 등....
이번 여행은 내가 평생 동안 막연히 꿈꾸며 그려 왔던 소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벼르다 큰맘 먹고 떠나왔던 여행에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그런데, 막상 비행기에 오르자 모든 것이 다 꿈이었던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여행에 관한 기억은 집에 가서 차근차근 떠올려 보리라 생각하고 비행시간 내내 깊이 잠들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밤 9시 30분에 출발한 대한항공 여객기는 우리를 무사히 인천 공항에 내려 놓았다. ( 끝 )
이렇게 해서 3개월 동안 써 온 여행기를 다 마쳤습니다.
우리 봄날이 없었으면 이 여행기도 없었습니다.
저 혼자 썼으면 반도 못 쓰고 포기했을 이야기였습니다.
글 쓰는 동안 제게 많은 격려를 해 주신 모든 봄님들과
특히 명옥 언니랑 화림 언니, 순호 언니, 순희 언니, 경선 언니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말 없이 눈팅만 하신 그대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그대의 관심 덕분에 모처럼 긴 호흡으로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일은 제 삶에 찾아온 보너스요 기쁨임을 고백합니다.
작가님~!
수고 많이 했어요.
역쉬 그대는 가슴에 그대만의 낭만과 정열을
끌어 안고 사는 인재요.
이글들을 <봄날>에서 만이 아닌 인일동문 전체가 볼수
있었으면 좋겠소.
귀한 글을 올려주고 사진과 함께 즐거움을 준
춘선작가에게 다시한번 경의를 표하며 ~~~!!!
춘선아~
유장한 너의 기행문 잘 읽었어.
소재만 있으면 언제라도 느낌을 되살릴 수 있는 그대!역시 프로다워
나는 여행 갔다온지 벌써 수백년은 된 것 같네.
그래서 가끔 네 글 읽으며 그 때를 떠올리며 음미하련다.
비젤란이란 조각가가 있는지 나도 그 여행 때 처음 알았거든.
작품 소재를 죽어라 사람으로 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들더구나.
주제는 `삶의 수레바퀴 앞에서` 생기는 인간사라고나 할까.
어차피 사람들 문제가 사람들의 흥미를 야기시키는거지 뭐.....
유장한 글 쓰느라 수고했다.
보는사람들을 꿈속으로 몰아넣는 자연의 아름다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이루어낸 또 다른 의미의 자연들
사진을 보며
글을 읽으며
가슴으로 느끼며
참으로 즐거웠네.
하늘이 붉은빛으로 피어오르고
은빛물이 하늘빛을 닮아가던
오늘 새벽
춘서니의 여행기 끝자락을 읽고난후
내 어깨가 가벼워지고
홀가분한 느낌이 드는건 왠일일까?
기억과 감동을 살려
이렇게 멋진 여행 이야기를 내 추억속에 담게 해줌에
감사해.....

명옥인 언제나 글 쓰는 사람들 학~~실하게 기운 돋아주고 ~
춘선아~
잠들었던 우리 감성을 다시 깨워주고 네가 다녔던곳 꼭 가보고 싶게 한 글 감동이었어.
사진까지 곁들여 실감나고 언젠가 네가 갔던 곳 가면 네가 많이 생각날꺼야.
꼭 책으로 펴내기 바란다.
너무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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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것 같아서
당분간은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여행 얘기 쓰는 게 싫은 날에는
괜히 쓰기 시작했나 하는 후회도 많이 했었는데.....
순희 언니가 제 맘을 잘 들여다 보셨네요.
어깨가 가벼워진 느낌,
홀가분한 기분이 많이 들어요.
스스로 나를 묶어 놓았던 포승줄을 풀어버린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 글을 쓰다보니까요
서포 김만중 생각이 나더라고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기 위해서 글을 쓰는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김 만중이 어머니에게 들려주려고 쓴 글이 구운몽이었다지요.
암튼 언니들 정말 고마워요.
공감해 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이 글이 나왔어요.
처음부터 읽어보면 저도 새로워요.
여행 중에 이런 일이 있었네 하고 말예요.
남이 써 놓은 것을 보는 기분이 드는거 있죠.
오 ~ 나의 건망증....
벌써 인쇄가 다 된 곳도 있단다.
우리 친구는 너무 재미있는데 찾아보는 게 번거롭다고 계속 인쇄를 해두고 있대.
이렇게 알려 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보기만 하는 독자도 많을 꺼 아니니?
정말 어깨가 으쓱해진다니까.
춘선아 우리 친한 사이지? ㅎㅎㅎㅎㅎ
춘선양, 그대의 건승에 박수를 보내오.
기행문을 석달에 걸쳐 달릴 수 있었슴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오.
수니언니말처럼
"사진을 보며
글을 읽으며
가슴으로 느끼며
참으로 즐거웠소."
그대는 버킷 리스트 중 많은걸 이루었는데
나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소.
멋진 친구가 이렇게 멋지게 이루는것을 보며
대리만족의 기회를 갖게 된 것 만으로도
감사에 또 감사하는 맘이오.
우리의 춘선양, 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