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핀란드에서 스웨덴으로 가는 배 위에서 아침을 맞았다.
우리는 조반을 먹기 전에 바다 풍경을 보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바깥에 나가니 배가 가는 쪽에서 바람이 제법 세게 불어왔다.
이른 아침인데도 어느새 하늘 가득 퍼진 햇살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눈이 부시다.
북유럽에서는 선글라스가 필수품이란다.
태양의 고도가 낮아서 해가 바로 코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햇살을 맨 눈으로 보면 우선 눈이 찌르듯이 부시고, 오랫동안 그렇게 보면 백내장에 걸리기 쉽단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인데도 색안경을 챙겨 썼다.
거기 바다는 우리나라 남해를 닮았다.
그 바다에는 아주 많은 섬들이 점점이 박혀 있어 동해같은 망망대해가 아니다.
바다라기 보다는 그냥 호수나 강이라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는 풍경이다.
그 섬들 사이로 심심찮게 배가 보인다.
우리가 타고 있는 것보다 큰 배도 있고 작은 배도 있다.
배가 가는 것이 느껴지지 않게 아주 조용히 움직인다.
바다가 잔잔하고 하늘도 조용하니 내 마음도 평화롭다.
섬.
섬들이 바다를 화폭 삼아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빈섬도 있고 누군가가 살고 있는 섬도 있다.
섬과 섬이 서로 이마를 맞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가깝기도 하고 드문드문 벌어져 있기도 하다.
섬과 어우러진 때문인지 바다가 전혀 두렵지 않고 늘 보던 풍경처럼 정겹다.
우리는 엊저녁에 만찬을 즐겼던 그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는 배가 정박하자마자 일찌감치 서둘러서 내렸다.
오늘 일정은 스톡홀름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는 것이다.
노벨상과 골프 여제 소렌스탐, 사회복지로 유명한 나라에 도착을 했건만 환호가 나오지 않는다.
나이 탓(?)인지 광란의 밤이 가고 새 날이 밝았는데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천근만근 무겁다.
우리는 부두에서 새 가이드와 버스를 만나 스톡홀름 시내로 향했다.
한참을 꾸벅꾸벅 졸다 보니 가이드가 내리란다.
도착한 곳은 <바사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은 바다와 육지를 연결해서 지은 특이한 건물로
대전의 <아주 미술관>처럼 누드 공법으로 지은 건축물이었다. (계속)
울 언니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큰 힘을 얻어 조금이라도 쓰고 나갈게요.
이제 스웨덴을 지나 노르웨이만 가면 여행이 끝나는데....
메모해 놓은 것 좀 읽어보고 쓸게요.
언니들 ~
알 라 뷰 쏘 마치 ~
<바사 박물관>은 1600년 경에 만든 거대한 전함 <바사호>의 실물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바사 왕의 치세 중에 아주 멋진 배를 한 척 만들었다.
나무로 지은 이 배는 견고하고 아름다우며 수 많은 적들을 물리치기에도 적합하게 설계를 하였고
많은 시간과 돈과 인력을 들여 완성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그 큰 배의 웅장한 모습이 만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왕은 온 귀족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아 놓고 성대한 진수식을 거행하였다.
풍악이 울리고, 온갖 찬사와 덕담이 오고 가는 속에 배의 돛을 올렸다.
배의 이름도 왕의 이름을 따서 <바사 호>라 지었다.
이 배는 바다를 정복하게 되리라.
우리 바이킹의 후예들이 바다를 장악하고 세상을 제패하리라.
그들은 그 배에다 이러한 염원을 담아 돛을 올리고 바다에 띄웠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배기에 모인 백성들도 모두 뿌듯한 마음으로 이를 지켜 보았다.
드디어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한 300 m 쯤 앞으로 나아가 배에 장착된 대포를 쏘아 올렸다.
전함으로서의 위엄을 널리 알리고 진수식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준비해 둔 대포를 다 쏘기도 전에 배가 옆으로 기울어지더니
순식간에 그 어마어마한 배가 그대로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바다를 제패하고 온 세상을 지배하기는커녕 불과 수백 미터도 못 가고 만 것이었다,
그것도 왕을 비롯한 모든 귀족들과 백성들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계속)
그렇게 배가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린 사건은 사람들이 쉬쉬하며 온 나라에 다 퍼뜨렸다.
모두들 얼굴을 맞대기만 하면 그 이야기를 하느라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진수식을 하는 중에 배가 가라앉은 사건은 한동안 소용돌이 치며 전설처럼 번져 나갔다.
하지만 배가 가라앉은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그 사건 이후에 그들의 역사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나도 모른다.
비몽사몽 피곤한 상태에서 내 눈과 귀로 보고 들은 이야기는 이것 뿐이다.
이렇게 바닷 속에 묻힌 배는 오래도록 치욕스러워 감추고픈 존재였을게다.
불운을 예고하는 재수없는 애물단지였다고나 할까.
그 배는 수 백년을 바닷 속에 처박힌 채 수면위로 떠오를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것을 물에서 끌어올려서 1956년부터 1961년까지 5년 동안 공을 들여 복원하여 놓으니
시커멓게 색이 변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배가 되었다.
변변히 물 위에 떠 있지도 못했던 애물단지가 보물이 된 것이다.
- 그러고 보니 이 배는 내가 태어나던 그 해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네.
단지 그 해에 복원을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배가 내게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었다.
이건 또 무슨 심리란 말인가.
아주 작은 연결 고리만으로도 동질성 내지는 일체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내 마음 말이다.
아무튼 진수식 때 가라앉았던 재수없는 배는 수백년 세월의 강을 넘어 화려하게 부활했다.
어쩌면 이 배는 물 위에서 힘을 발휘할 운명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배로 지어지긴 했으나 뭍에서 쓰임을 받을 사명을 띠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초 계획했던대로 바이킹의 발이 되어 바다를 오가는 사람들의 재물을 약탈하지는 못하였지만
박물관의 주인공이 되어 온 세계 사람들에게 비싼 입장료를 받아 내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침몰했던 큰 배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는 희귀성을 내세우며
무기도 싸움도 없이 앉아서 남의 돈을 합법적(?)으로 약탈해 가는 현재의 후손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해적, 바이킹의 후예답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세월 짠물에 절어서 나무 색이 시커멓게 변한 배를 제대로 보존하려면
햇빛도 적당히 차단을 해야 하고, 온도와 습도와 통풍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단다.
그래서인지 박물관 내부는 음침하게 느껴질만치 어두컴컴하고 서늘했다.
그 어둠 속에서 여전히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박울관 한 쪽에 배가 침몰하는 장면을 직접 본 마을 사람들의 경악하는 모습과
귓속말로 그 소문을 전파하는모습을 담은 인형과 그림으로 꾸며 놓은 마을이 있으니 말이다.
- 자기는 그 얘기 들었어?
글쎄 말야,
그 큰 배가 진수식을 하는 도중에 물에 가라앉았대.
세상에 이런일이 어디 있대?
지금 궁전에서는 이 일을 쉬쉬하고 감추느라 난리가 났대.
이러다가 나라에 뭔 변고가 나는게 아녀?
이 얘기를 내가 했단 말은 말고 자기만 알고 있어.
알았지?
(계속)
바사호의 선미.
화려한 색채와 정교한 조각으로 한층 멋을 부렸다.
이것은 설계도와 당시의 기록을 토대로 바사호의 축소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러시아에서 듣기로는 북유럽에 가면 한국 음식을 먹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해서
당분간은 입맛을 현지식에 맞추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왔는데
우리가 간 곳은 뜻밖에도 한국식당이었다.
마침 휴가철이어서 일반 손님은 받지 않고
우리처럼 미리 예약을 한 단체 손님만 받아 주었는데
전라도 출신의 안주인이 주방에서 직접 만든다는 반찬이 입에 착착 감기고
깔끔하고 절제된 실내장식도 품위 있고 나무랄 데가 없었다.
서울에 있는 웬만한 음식점은 명함도 못 내밀만큼 정갈하고 맛깔스런 음식을 먹고 나니
누적되었던 여행 피로가 확 풀리고 정신이 버쩍 들었다.
얼큰한 대구 매운탕이 시원한게 아주 맛있고 김치 또한 일품이었다.
기대하지 않고 갔던 곳에서 제대로 된 한식을 만난 기쁨에 나는 그 집 이름을 수첩에 메모했다.
혹시라도 후일에 스톡홀름에 갈 일이 있으면 잊지 않고 다시 찾아 가려고....
그 집 이름은 <남강 회관>이었다. (계속)
한국어로 남강회관이라고 했어요.
저는 그 이름이 안 외워져서 버스 안에서 가이드에게 수차례 되물어봤어요.
다음에 가실 분들을 위해서 그랬나 봐요. ㅋㅋ
그 집 음식 덕분에 원기를 충전하고 다음 여정을 즐겁게 할 수 있어서 참 고마웠어요.
이게 VISTA 라 평소에도 방패막이 좀 많긴 하지만 하루에 한번정도인데
이렇게 반복적으로 뜨니까 신경질나서 죽겠다.
여행기에 이런 하소연해서 미안해유 계속하세유~~~~~~~~~~~~~~~~~~
요즘 너무 바빠서 차분히 여행기를 쓸 수가 없었어요.
그 사이에도 울 언니들의 성원은 계속되었네요.
내게 힘 주시는 아름다운 분들....
오늘 저녁에 계속 이어 가도록 해 볼게요.
참 ...
황 인경 언니 ~
이 글 보고 계세요?
여행기를 쓰노라면 동행하셨던 언니들 생각도 많이 해요.
그럼 지금은 잠시 나갔다가 다시 올게요.
처음부터 허용하시겠냐는 질문도 없어졌어요.
너무 편하다.
춘선아. 계속 재미나게 쓰셔이~~~~~~~~~~~~~~~~~~~~
스톡홀름은 크고 작은 호수가 많아 아름다운 靜的인 도시였다.
바이킹의 후예들은 늘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 침략 전쟁을 일으키기는 했어도
한번도 남의 침략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지금도 옛도시의 면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건물은 대개 돌로 지어 견고 하고 200 ~ 300년 된 건물들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웃하고 있는 핀란드가 남의 전쟁터 노릇 하느라 변변한 유적 하나 남아있지 못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핀란드는 우리와 비슷하고 스웨덴은 일본과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온 역사의 흐름이 말이다.
스톡홀름 시내 한 복판에 건물만 덜렁 있는 왕궁이 있었다.
국왕이 집무를 하는 왕궁 옆에 교회가 있고 그 옆에는 예쁜 노천 카페가 두 곳 있다.
교회는 왕의 대관식이나 장례식, 세례식 등 모든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였고
왕궁은 현재의 국왕이 여름 궁전으로 이사를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국왕이 사는 곳이었단다.
거창한 울타리가 없어도 왕이 살기에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 신기했다.
왕궁과 교회와 카페에 둘러 싸인 중앙에 돌로 바닥을 깔아 놓은 네모진 빈 공간이 있는데
결코 넓지 않은 그 곳이 이름만 거창하고 무시무시한 < 피바다 광장 >이다.
여기가 그들의 역사책 한 페이지에 나오는 잔혹한 살육의 현장이다.
어느 왕이 왕권을 잡기 위해 귀족들을 대관식 명목으로 불러 들여서는
사흘간의 질펀한 향연 끝에 그들을 모두 끌어 내어 이 광장 한복판에서 목을 베어 버렸다고....
그날 죽은 귀족의 수가 82명이어서 거의 모든 가문의 씨가 다 말라버렸고
그들이 흘린 피가 바다를 이루어서 이곳을 < 피바다 광장 >이라고 부른단다.
아직도 바닥의 돌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핏물이 배어 있다나 뭐라나.
그때 유명한 바사왕의 아버지도 죽었는데 바사왕은 간신히 몸을 피했다가
후일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하여 다시 쳐들어와 왕권을 잡고 강력한 왕정을 이루었단다.
그 막강한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전함도 만들었는데 진수식 도중에 가라앉아 버렸고....
그런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이 지금은 아주 예쁜 카페와
각종 기념품과 장신구를 파는 상가가 늘어 선 번화한 거리로 탈바꿈해 있었다.
이 거리는 마치 우리나라의 명동이나 인사동 같았다.
골동품 가게도 있고 고급 옷집도 있고 직접 세공을 해서 파는 보석상도 있어서
지나가며 눈요기를 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하지만 너무나 골목이 많아서 자칫 잘 못 들어가면 길을 잃기 쉽상이라는 말에
우리는 작은 골목을 다 들여다 보지는 못하고 지금은 골목처럼 되어버린 옛 큰길만을 따라 걸었다.
그 시절에는 귀족들이 마차를 타고 거들먹거리며 다녔을 길이
지금은 그저 뒷골목 길로 전락하여 관광객들이 떼를 지어 걸어가고 있으니
세월 앞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모양이다. (계속)
( 왕궁 앞의 피바다 광장. 광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공간이다. )
(구 시가지 감라스탄. 우리나라 인사동 같은 거리였다. )
스톡홀름 시청은 관공서 건물인데도 불구하고 입장료를 톡톡히 받았다..
처음엔 무슨 관공서가 입장료을 받을까 하고 불평이 나왔는데 안에 들어가니 이내 마음이 바뀌었다.
스웨덴 출신의 건축가가 심혈을 기울여 지었다는 이 건물은
돌로 근간을 이룬 중세풍의 디자인이 독특하였고
오랜 시간을 두고 지어서 견고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1900만개의 금박 모자이크로 장식을 한 내부는 보물상자 처럼 빛났다.
마치 바르세이유 궁전 같기도 하고 바티칸의 성당 같기도 한 복합적인 분위기였다.
내부의 아주 넓은 홀은 텅 비어 있었다.
여기는 돈을 내고 빌려서 쓸 수도 있는 공간이라고 했는데
이 자리에서 치르는 가장 대표적인 행사가 바로 노벨상 시상식 후의 만찬이라고 했다.
해마다 열리는 노벨상 시상식이 끝나고 난 후에
수상자를 비롯하여 각계의 인사들을 초청하여 만찬을 여는데
이 파티에 초대를 받는 사람은 그야말로 목에 힘을 좀 주어도 좋단다.
건물 한 쪽에 가니 그릇이 한 세트가 진열상자 안에 전시 되어 있었다.
노벨상 만찬때 쓰는 집기란다.
평화상을 제외한 모든 수상자들을 다 불러 들여서 파티를 할 때 쓰는 그릇을 보니
노벨상에 목을 매는 많은 사람들 생각이 난다.
우리나라 어느 고등학교에는 미래의 노벨상 주인공의 흉상을 놓을 좌대를 미리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만큼 간절하게 노벨상을 원하다는 표시다.
새삼 노벨이란 인물이 존경스럽다.
죽은 후에 돈을 가지고 그만한 권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 노벨상 만찬 때 쓰는, 실제로 지금도 쓰고 있는 그릇들 )
특히 복지 정책이나 교육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었다.
자연 환경도 쾌적하고 1인당 국민소득도 6만불이 넘는다니 부러움이 절로 솟는다.
그러나 내가 스웨덴에서 가장 매료된 것은 하늘이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그날 유독 하늘이 고왔는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하늘만 보였다.
여름 궁전에 갔을 때에도 어느 건물보다도 하늘에 눈이 많이 갔다.
시청 건물 안에서 내다 본 경치도 하늘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웠다.
내가 이렇게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본 것이 얼마만인가?
언제부턴지 몰라도 나는 정신없이 땅만 보고 살았다.
하늘은 커녕 옆을 돌아 볼 여유조차 없이 살아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마음으로는 늘 하늘을 소망하면서도 내 관심은 언제나 땅 위에 머물러 있었다.
살아야 했고, 헤쳐나가야 했고, 이겨야 했으니까.
내 발이 닿아 있는 곳을 바라보지 않으면 허방다리 짚을까봐 불안했으니까.
그랬는데 스톡홀름에서는 하늘이 보였다.
그저 멀리 보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늘이 내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하늘을 품으니 내 마음이 부풀어 날아갈 것만 같다.
내가 그토록 하늘을 좋아하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집에 와서 보니 디카로 찍은 풍경 사진마다 화면 가득 하늘이 담겨 있다.
먼 여행의 선물로 스웨덴에서 챙겨 온 것은 하늘 풍경이다.
(계속)
( 현재 스웨덴 국왕이 살고 있는 여름 궁전의 풍경 )
하룻밤을 머물고 나서 우리는 아침 일찍 스톡홀름 공항으로 향했다.
여기서 비행기를 타고 베르겐으로 가기 위함이다.
어제 하루 우리를 안내했던 가이드가 사정이 있어서 못 나오고
호텔에서 공항까지 에스코트를 하러 다른 가이드가 나왔다.
제일 고참 언니들과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그녀에게서는 베테랑 냄새가 물씬 풍겼다.
버스를 타고 가는 짧은 시간 동안에 그녀는 우리 모두를 아주 유쾌하게 해주었다.
그녀는 여자들끼리만 온 우리를 보고 화려한 싱글들 같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스웨덴 속담을 적절히 인용해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 남편하고 같이 여행을 가면 경비는 두배로 들고 재미는 반으로 줄어든다.
- 사랑은 늘 있다.
단지 목표물만 달라질 뿐이다.
그녀가 들려준 스웨덴 속담이다.
곱씹어 볼수록 일리가 있다.
스웨덴에서 노르웨이의 베르겐까지 비행시간은 1시간 10분이다.
우리는 10시 25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탔다.
단거리 노선이어서 그런지 비행기 안에서 음료수는 물론 물도 공짜로 주질 않았다.
잘 사는 나라 항공사들이 더 인색하게 구는 것 같아 조금 씁쓸했다.
참, 북구에 오니 러시아나 서유럽과는 달리 물이 아주 좋았다.
굳이 병에 든 물을 사 먹을 필요가 없다.
핀란드도 그렇고 스웨덴에서도 화장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그대로 받아 마셔도 되었다.
물 맛도 좋고 소독약 냄새도 거의 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핀란드에서부터는 각자 물병에다 알아서 물을 채워가지고 다녔다.
식당에서도 물값을 따로 받지 않아서 좋았다.
스톡홀름 공항의 화장실에는 종이컵까지 비치가 되어 있었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받아 마시라고....
화장실이 아주 께끗하고 좋아서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비행기는 순식간에 우리를 베르겐 공항에다 내려 놓았다.
공항에는 현지 가이드 장언미씨와 55인승 초대형 버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될 노르웨이 3박 4일 일정은 버스를 타고 장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버스가 새것인데다 자리가 널널하니 넓고 운전수도 마음이 좋아 보여 다행이다.
베르겐은 별칭이 < 비의 도시 >란다.
별칭값을 하느라 그러는지 우리가 버스에 오르자 이슬비가 오기 시작했다.
차 안에는 <솔베이지 노래>가 잔잔히 흐르고 차창엔 빗방울이 맺히는 것이 묘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버스는 우리를 싣고 이 곡의 작곡자인 <그리그 >가 살던 집을 향해 달렸다 . (끝)
다음 여정은 새로 방을 열고 쓸 예정입니다.
늘 격려해주시고 함께 동행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읽는 것도 바빠유.
정말 책한권 읽을 시간이 없다니까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