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날개위에 其 08

1: OOO PD
“나 OOO이외다.  반갑소.  용형,  말씀은 M을 통해 많이 들었소.”
“반갑습니다.  나도 O형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대충 말 놓읍시다.  자 용형 내 잔 먼저 받으소.” 
그렇게 처음 대면한 사이인데 그는 술잔부터 내밀었다.

친구 M은,  만나자 해서 나가보면 아무 사전 귀띔도 없이,  처음 보는
이들을 대동하고 나타나곤 하는 악습이 하나 있었다.  그 인사 중에는
자기 고교친구,  스님,  불교여신도회장,  수녀,  애인(?),  시인(詩人),
그 범위도 다양했다.
난 그 악습에 가끔 멋모르고 당해 진땀을 빼곤 했다.

그날은  KBS방송국 大 PD라는 자기 경북고 동창과
우리가 늘 만나던 음식점에 아예 미리 들어 앉아 나를 부른 것이었다.
 
그는 시원하게 벗겨진 반(半) 대머리에 기골이 장대했다.
또한 울림통(=체격)이 큰 탓인지 목소리가 엄청 크고 쩌렁쩌렁
고막이 흔들렸다.   내가 술잔을 받으면 그는
잠시 상에 술잔을 내려놓는 걸 참지 못했다.
주면서 동시에 빈 잔을 되 달란다.  그렇게 술잔이 상에 엉덩이 붙일
사이도 없이 부지런히 핑퐁을 치니
술이 별로 세지 못한 나는 서서히 몸이 흔들린다. 

참 그는 大 PD에 걸맞게 문학에 조예가
무궁무진하다.  오늘 내가  임자 잘못 만난 거다.  하지만 그럴 때면
난 늘 열심히 들어주는 것으로 상황을 이겨낸다.  재미있다는
표정을 담뿍 짓고 바짝 당겨 앉아,  가끔 추임새를 넣어주면서...

“전주(前週)에 방영된 TV문학관 보았어?”
“아 그거 참 감명 깊게 보았지.”
“그게 바로 이 친구가 연출한 거야.”  옆에서 M이 거든다.
“그래? 그거 참 영상도 좋고 캐스팅도 잘 했더라.
김윤경이 여자의 정염(情炎)을 참 밀도 있게 표현하더군.”
“그래 바로 그거야.  나도 그래서 김윤경을 찍어 붙인 거지.”

“그런데 거기 보니 임원 역(驛)이라 해서 바로 엊그제 나 강원도로
나간 김에 찾아 헤맸는데 임원 역(驛)은 이미 없다고 하더군,  혹시
별어곡 간이역(簡易驛) 아닌가?  그리고 거기에 나온 호텔은
정선의 호텔이고...”
“와 역시 M,   자네,   용형이 대단하다더니 말이 통하는군.
우리 오늘 신나게 취하고 법 거량 해 보세나 그려.”
“내가 어찌 감히 O형과 법 거량을...  그저 오늘 한 수 배워봅시다.”
“이 친구 러브스토리를 자네 언제 각색해서 TV 문학관에 올려보게.
그거 한권의 소설이네.”  M이 거든다.
“또 앞서가는구먼.  소설은 무슨...”

2: 노래방에서
그렇게 쓰러지지 않고 가까스로 저녁 술자리를 지킨 끝에
우리는 2차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첫 곡으로 그가 <한계령>을 뽑는다.   그의 음성은 쩌렁쩌렁하고 힘차기에
난 고음대신 바리톤으로 나올 줄 짐작했는데 그 우렁찬
목소리로 고음도 가볍게 타고 앉는다.  난 초장에 벌써 기가 죽는다.

“자  용형 어서 받아.”
<칠갑산>으로 받아보지만 <한계령>의 거대한 품에 비해 山도 작고
내 음성도 그의 목소리에 비하면 가늘기만 하다.  그의 심후(深厚)한
내공(內功)에 나는 약간 내상(內傷)을 입는다.
다시 그는 <새타령>을 부른다.   저 확성기와 같은 음성에 새가
날아올지...  참으로 천둥이 치는 <새타령>이다.

“자 용형 어서 받게나.”
새라?  새라?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로 받는다.  이 노래는
첫 음을 잘못 잡으면 뒤에 고음처리가 안 되던 경험이 있어
조심조심 참새를 불러 모으고 허수아비 한숨을 토해낸다.  겨우 받아냈다. 

그는 이번엔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홍난파의 <뱃노래>에 얹혀 바다로 나가잔다.
변훈 작곡의 <떠나가는 배>로 나도 바다로 나간다.
그의 음성에 맞추어 나도 최대한 목소리를 굵게 쥐어짜서 부른다.
굵으면서 동시에 고음으로 내지르려니 공력(功力)이 부친다.
어쨌든 가까스로 3합을 버텨냈다.

3: 不計敗
바깥으로 나오니 술기운에 겨울의 밤공기(空氣)가 따뜻하다.

“정원庭園의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질 때,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그가
그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난 몇 줄 읊다 말겠지 했는데 그의 암송(暗誦)은 계속된다.

“달리는 기차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이 되려고 할 즈음에
불을 밝힌 창들이 유령의 무리같이 시끄럽게 지나가고
어떤 어여쁜 여자의 얼굴이 창가에서 은은히 웃고 있을 때,
화려하고도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아니 그 긴 수필을 다 외운단 말인가?

“사무실에서 때 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보름밤의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장 안에 보이는 죄인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이 모든 것이 또한 우리 마음을 슬프게 한다.”

그렇게 끝까지 암송을 모두 마치고 그가 또 내게 한마디 던진다.
“자 용형도 하나 읊어봐.”
큰일 났다.  나 끝까지 외우는 것 하나도 없는데...

“어머니 오늘 아침에 고의적삼 차입해주신 것을 받고서야
제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을 집에서도 아신 줄 알았습니다.
잠시도 엄마의 곁을 떠나지 않던 막내둥이의 생사를
한 달 동안이나 아득히 아실길 없으셨으니 그동안 오죽이나 애를 태우셨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저는 이곳까지 굴러 오는 동안에 꿈에도 겪지 못했던 고생을 겪었건만
그래도 몸 성히 배포 유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잠시 외웠던 심훈의 부모님 전상서(前上書)를
나는 술이 취한 것을 빙자하여 최대한 느리게 읊조린다.

그런데...  정말 천만다행으로,
“용형.  여기서 그만 작별해야겠네.   막차 탈 전철역이 바로 저기니...”
하며 그는 그 때까지도 술에서 덜 깬 M의 팔짱을 끼고 뛰어간다.

“휴 겨우 살았네.   나는 바로 거기까지만 외우는 형편이니...
전철역(電鐵驛)아 거기 있어주어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