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미술을 통하여 정치의식과 도덕심을 소통하는 것은 얼만큼 가능할까. 순수를 표방하는 현대미술에서는 미술 외적인 요소를 거부하고 있으나 18-19세기의 ‘역사화’에서는 새로운 정치의식을 예견하고 전달하는 데 미술이 큰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의 화가 쟈크 루이스 다비드(Jacques-Louis David : 1748-1825)의 작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로마에 체류하고 있던 다비드가 1784년 자신의 화실에서 그림을 공개하였을 때부터 이 그림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아들, 아버지, 여인들로 구분된 엄격한 구도, 인물들의 분명한 윤곽선과 장식이 없는 단순한 배경은 당시 유행하던 로코코양식의 그림들에 비하면 너무나 숭고한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왕정의 귀족들이 호화로운 레이스 옷을 입고 숲을 산책하는 종류의 로코코 그림들이 허영의 과시라면 신고전주의의 서두를 알린 이 그림은 엄격함과 절제를 호소하는 공공의 도덕성을 불러일으킨다.

   몇 개월 후 1785년 9월 파리의 살롱전(당시의 관전)에 이 그림이 다시 전시되었을 때는 또 다른 의미로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주위의 다른 작품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다비드의 그림만이 전 살롱을 압도하는 듯했다”고 전한다. 엄격한 양식과 함께 주제의 비장함이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인 요구와 맞았기 때문에 그림을 본 시민들의 반응이 강했던 것이다.

   그림의 이야기는 17-18세기에 널리 읽힌 극작가 코르네유의 비극 <호라티우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대는 초기 로마시대, 인접한 알바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로마는 많은 희생자를 줄이기 위하여 두 나라에서 한 가문씩을 선택하여 결투로 승패를 가르기로 하였다.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아들이, 알바에서는 쿠리아티 가문의 세 아들이 싸우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두 가문은 서로 혼인관계에 있었다. 호라티우스 세 아들 중 한명의 아내는 쿠리아티 가의 딸이었으며, 호라티우스가의 딸은 쿠리아티가 아들의 약혼자였다. 여섯 명 중 호라티우스 가의 한 아들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서 결투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 온 승리자는 약혼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동생을 보자 애국적인 의분에 동생을 칼로 찔러 죽이고 만다. 법정에 선 아들에 대해 아버지가 변호하고 아들은 면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화가 다비드는 비극적인 종말보다 출전하기 전 결의에 찬 맹세의 순간을 선택하였으며 복잡한 이야기를 걷어내고 인상적인 한 장면으로 나타내고 있다. 나라를 위해 싸우는 남자들과 남편이나 약혼자의 출전을 슬퍼하는 여인들의 대조를 통해 개인의 사랑과 행복보다는 애국적인 의무를 칭송하는 주제로 바꾼 것이다.

   누구나 자유로이 관람할 수 있었던 살롱전에 걸린 이 생생한 이미지는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공화정의 정치의식을 여론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초기 로마시대의 덕목은 현재 왕정의 타락을 다시금 인식시키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구에 서서히 불을 댕긴 것이다.

   개인의 행복추구가 미덕인 우리 시대에 애국과 희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도 공감하기 어려운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절대왕정의 권력과 귀족의 사치가 극한상황에 달했던 18세기 후반의 사회에서 ‘애국’과 ‘공공의 도덕’은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가치관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는 현재의 다소 국수적인 의미의 애국과는 사뭇 다른, 오히려 가장 진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던 덕목이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다비드가 이 그림을 그린 지 5년 후, 프랑스의 살롱전에 그림이 공개된 지 4년 후인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터졌다. 미술사가들은 다비드의 예견에 주목한다. 당시 화가들이 귀족의 궁전을 장식하기 위하여 흐드러진 사랑주제나 미화시킨 귀족의 초상화를 공급하고 있었던 시대에 다비드는 앞으로 닥아 올 시대의 도덕적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가는 더 이상 왕이나 교회의 충실한 종이 아니고 프랑스의 공화혁명을 이끌어가는 숭고한 소명을 실천하는 지식인이 되었다. 그의 스투디오는 어둡고 좁은 예술가의 화실이기보다 지적인 토론과 당면한 정치도덕을 논하는 현장이 되었으며 이러한 의식은 역사주제를 선택하고 절제된 고전양식의 미술을 낳는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화가 다비드의 이름은 反왕정, 즉 프랑스 혁명과 동일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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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크 루이스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

캔버스에 유화, 330 x 425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