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이 그림을 처음 보고 감격했던 기억이 난다.
피카소(Pablo Picasso : 1881-1973)는 큐비즘을 이끌고, 전 생애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변화시키고, 그럴 때 마다 부인도 바꾸었으니, 그는 도덕이나 사회정의보다 예술이 우선인 사람인줄 알았다.
  예술가는 사회와 서로 대치관계에 있어서 사회적인 도덕심을 갖은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내게 훌륭한 예술이면서 동시에 사회정의에 충실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준 첫 번째 증거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37년 초 스페인 공화정은 그 해 여름 개최예정인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을 위해 피카소에게 작품을 의뢰하였다. 이미 <프랑코의 꿈과 거짓>이라는 일련의 판화를 제작한 바 있는 피카소이니 스페인 공화정의 이념을 전 유럽에 알리기 위해서 피카소 만큼 적절한 화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파리에 있던 피카소는 몇 개월이 지나도록 주제를 정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4월26일에 일어난 게르니카의 폭격 소식을 신문에서 접하고야 비로서 이를 주제로 삼아 5월1일부터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6월 4일에 완성하였다. 이 대작을 위하여 쏟아낸 드로잉이 수 백 장에 달하니 이 한 달간의 몰입은 피카소에게 가히 창의력의 폭발이라 하겠다.   

게르니카(Guernica)는 스페인의 북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 이름이다. 공화정의 세력이 커지자 기존의 왕당과 프랑코 군부가 반란을 일으킨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군부는 독일에게 군사 요청을 하고, 1937년 4월 26일 히틀러는 공화세력의 근거지인 게르니카에 폭격을 가했다. 폭격은 서 너 시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불길은 사흘이나 지속되었고, 이 작은 도시 인구의 1/3인 16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시의 70% 가량이 파괴되었다.

이제 이 사건이 촉발시킨 피카소의 그림을 보자. 분절된 신체들이지만 우리는 이 속에서 격노한 황소와 말, 죽은 아기를 무릎에 놓은 채 절규하는 엄마, 횃불을 들고 진실을 밝히려는 듯 한 혁명적인 젊은 여인, 부러진 칼을 손에 쥔 채 죽어있는 군인들을 찾아 낼 수 있다. 만국박람회에 이 그림이 걸림으로써 스페인의 우익 군부는 다시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피카소가 말 한 대로 “예술은 집의 벽을 장식하는 그림이 아니다. 공격적이고 또 방어적인 무기”역할을 한 것이다. 1940년 파리에서 독일 장교가 <게르니카>를 보면서 피카소에게 “당신이 그렸소?”하고 물으니 피카소는 “아니, 내가 아니라 당신이 그렸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자기의 손을 빌었으되 분노를 촉발시킨 이는 독일군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피카소가 이 그림에 폭격기나 파괴된 마을을 그리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애초부터 게르니카의 폭격사건을 그대로 그리기 보다는 이를 통해 인간의 동물적인 공격성과 힘이 없는 약자들의 절규에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피카소는 이전부터 얼굴은 황소에 몸은 사람인 반인반수의 미노타우로스를 많이 그려왔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람을 먹고 사는 이 동물을 화가 자신으로 그리고 모델은 수세에 몰려 꼼짝 못하고 침대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로 그리기도 하였다. 이점과 연관시켜보면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단순히 1937년 게르니카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보다, 폭력적인 야수성과 힘없는 이의 절규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과 파괴, 폭력과 피해자, 동물과 인간, 남자와 여자, 이 세상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힘 센 자의 폭력과 힘없는 자의 울분의 관계로 말이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 폭력성은 피카소 자신에게도 있었던 감정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1935년 올가와 이혼하고 마리 테레즈를 만났으며, 36년엔 마리 테레즈가 아기를 낳았음에도 새 연인 도라를 끌어들이고, 이 둘의 싸움을 가학적으로 즐겼다는 피카소, 그리고 도라로 하여금 그토록 우는 여인으로 만든 피카소이기 때문이다. 공격적인 야수성과 분노, 울분, 이 모든 감정이 자신에게 친숙했기에 사회적인 분노로 표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다시 그림을 마주하였을 때 신기한 점은 싸우고, 쓰러지고, 절규하는 극도의 표현성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이 우리를 흥분 상태로 몰아넣지만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피카소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색과 구도 덕분일 것이다. 그가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쏟아낸 수많은 습작들은 원색의 울분과 짐승의 포효를 표현한데 반해, 이 거대한 대작에서는 거의 흑백의 무채색으로 처리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그림을 차분하게 바라보게 한다. 이와 더불어 화폭의 양쪽 아래에서 중앙으로 향한 거대한 삼각형의 구도는 화면을 안정되게 한다. 분노와 절규는 절제를 찾고 커다란 역사의 틀에 들어선다.



작품설명

피카소, <게르니카>, 1937, 캔버스에 유채, 782 x 351cm,

마드리드, 국립 레이나 소피아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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