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인천공항에서 오후 2시 20분발 대한항공 여객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오랫동안 벼르고 별러서 러시아와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를 돌아오는 여행을 떠나는 길.
막연히 상상만 해 오던 러시아 대륙과 북구의 풍광을 볼 생각에 가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꿈은 이루어지기 위헤 꾸는 것인 모양이다.
가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세 편 보았다.
< 우리 생애 최고의 날 >과 < 버킷 리스트 >와 < 천일의 스캔들 >을 보았는데
그 중에도 버킷리스트가 제일 마음에 남았다.
버킷 리스트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을 생각이 날 때마다 적어서 버킷(깡통?)에 담아 두었다가
리스트로 만들어서 시행 가능한 일부터 하나씩 행하고 지워가는 것을 뜻하는데
이번 여행이 내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밤과
광활한 러시아 대륙을 뒤덮고 있는 자작나무 숲과
러시아 제국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숱한 유적들과
대문호 톨스토이가 보고 느꼈을 모든 풍광들을
나도 죽기 전에 꼭 한번 가서 내 눈으로 보고 느끼고 싶었으니 말이다.
- 그래, 이번 여행길에 내 생애 최고의 날을 만들어 보자꾸나.
이번 길에 내 버킷 리스트에 쓰인 것 중 여러개를 지울 수 있게 되면 더없이 좋은 일이고....
드디어 비행기가 모스크바에 내렸다.
도시 규모에 걸맞지 않게 작고 초라한 공항을 빠져 나오는데 수속이 복잡했다.
마치 우리나라 간이역 같은 분위기에 공안경찰 같은 직원들의 무표정한 손놀림이 무척 더디다.
공산주의 사회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수동적인 모습이라고나 할까.
떠날 때 한국의 날씨는 연일 30도를 웃돌며 열대야 현상까지 겹쳐서
찜통 더위라고 했는데 모스크바는 쾌적하게 서늘하다.
도무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흐린 날씨에 낯 선 문자들이 빼곡한 간판들.
여기가 내 상상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그려보던 동토의 나라, 러시아가 분명하다.
자 ~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이다.
열심히 보고, 느끼고, 기억하고, 매 순간을 맘껏 즐기자.
우리의 모스크바 관광 첫날 일정은 버스로 두시간 거리에 있는
세르게이예프 수도원을 찾아가는 일로 시작하였다.
세르게이예프 빠사드는 지금도 300여명의 수도사들이 수도를 하고 있는 수도원으로
14세기 때 유명한 대주교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상징인 성경을 그림으로 풀어 놓은 이콘이 300여년의 세월 속에서도
덧칠 하나 하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이 되어 있기도 했다.
이콘이란 작은 창이라는 뜻으로 나무에다 프레스코화를 그려 넣은 것을 말한다.
그 중에 제일로 치는 것이 400년 된 성모자상을 그린 이콘인데
이콘을 찍어 가는 것은 허락하지만 이콘과 함께 자기 얼굴을 촬영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신과 인간은 결코 동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란다.
특히 사원 안에 있는 우스펜스키 성당에는
1684년에 구약 성경을 러시아어로 번역을 한 것이 지금껏 지하에 보관되어 있다고도 했다.
당시 35명의 학자들이 함께 모여서100일 동안 번역을 했단다.
성당 안에는 수많은 그림(이콘)들이 황금색으로 번쩍거리고 있고
촛불로만 조명을 해 놓아서인지 묘한 음침함이 가득 메워져 있는 건물의 천장이 아득하게 높고,
가운데는 둥그런 돔으로 되어 있어 소리의 공명이 아주 잘 되었다.
러시아 정교는 의자 없이 모두들 기립을 한 채로 예배를 드리고
반주할 악기도 거부한채 오로지 육성으로만 단조로운 음율의 찬양을 읊조리듯이 부르는데
공명이 잘 되는 건축물 덕분인지 그 소리가 아주 오묘하고 신비스러웠다.
건물 안의 모든 프레스코화와 기둥의 모든 금색은 진짜 황금을 얇게 펴서 입힌 것이란다.
황금을 좋아한 것은 동서고금 어느 대륙을 막론하고 다 똑같다.
황금의 변하지 않는 속성 때문에 영원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모두들 그렇게 열광을 하는 모양이다.
변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변하지않는 것에 기대고 싶어서....
세르게이예프 수도원은 황금색 지붕과 코발트색 지붕이 아름다운 건물이었고
낡은 담을 따라 걸어 들어가는 길이 고즈넉해서 한나절 소풍하기는 좋았다. (계속)
우리나라의 명동 같은 도심 한복판에 상가와 노점들이 즐비하였다.
러시아 전통의 마쥬스카 인형 (일명 알까기 인형)들이 알록달록한 모양으로 진열되어 있고
닥터 지바고에서 보았던 털모자들과 털목도리도 사람들 왕래가 많은 곳에 걸려 있었다.
서너집 건너 하나 꼴로 동상이 서 있기에 저들이 다 누구냐고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이 동네에서 힘깨나 쓰던 사람들이긴 한데 자기도 잘 모른단다.
워낙 많은 동상들이 있어서 그걸 다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란다. 내 원 참....
마치 우리 나라에서 마을마다 수많은 송덕비를 세웠던 것처럼 그들은 동상을 세운 모양이다.
그것 역시 부질없이 허망한 일인 줄도 모르고....
그래서 동상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는데
길 한복판에 잘 다듬어진 정원수에 둘러싸인 젊은 남녀의 다정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걸을듯이 말을 할듯이 서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저절로 발길이 멈췄다.
- 저 사람들은 왕과 왕비인가요?
- 아니요, 저들은 푸쉬킨과 그의 아내 나타샤예요.
지금 서 계신 곳에서 바로 뒤를 돌아 보세요.
저 집에 쓰여진 작은 현판이 보이시나요?
저기가 푸쉬킨이 3개월 동안 신혼생활을 했던 집이랍니다.
- 푸쉬킨이라고요?
우리 어렸을 적에 이발소에 가면 꼭 걸려 있던 <삶>이라는 시를 쓴 작가 말예요?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 맞습니다.
푸쉬킨은 러시아 사람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국민시인이고 동화작가이며 소설가지요.
안타깝게 32세의 나이로 요절을 한 비운의 사나이였고요.
가이드가 들려 준 푸쉬킨의 이야기는 내 상상력에 걷잡을 수 없는 불을 지폈다.
아주 간단하게 사건의 전모를 간추려서 들려주었는데
그 간단한 이야기가 내 마음 속에서는 파노라마 같은 이야기로 되살아났다.
나는 더 자세한 내용이 알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인 중에 영어가 통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금껏 간직하고 있는 푸쉬킨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말이다.
내가 찾던 사람은 고급 기념품 가게에 있었다.
우리는 아주 섬세하고 색이 고운 알까기 인형의 배 부분에 그려진 동화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푸쉬킨 이야기로 옯겨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되었다.
너무나 어이없는 이유로 요절을 한 불운한 사내, 푸쉬킨의 이야기.
내가 모스크바에 오지 않았으면 영원히 모르고 지나칠 뻔 한 어처구니 없이 슬픈 사연이었다. (계속)
그는 나타사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였는데 그녀는 아름답지만 끼가 많고 음란한 여인이었다.
결혼을 하고 이 집에서 3개월간의 신혼생활을 마치고 St. 페테스부르크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단테스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러시아에 내려오는 여자 이름에 대한 속설이 있는데
이름에 따라서 그 성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 나타샤 >라는 이름은 예쁘지만 바람기가 많은 여자,
< 스베따 >란 이름은 착하고 순종적인 여자,
< 올가 > 는 지적이고 똑똑한 총명한 여자 이름이고
< 따띠아나 >는 깍쟁이에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여자의 이름이라고 했다.
그 이름 값을 하느라 그랬는지
나타샤는 자기 남편의 친구인 단테스와 눈이 맞아 버렸다.
두 사람은 전형적인 잘못된 만남, 부적절한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계속)
.
급기야는 푸쉬킨의 귀에도 들어가고 말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와 바람이 난 아내의 일을 알게 된 푸쉬킨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두 사람 다 푸쉬킨이 버리고 싶지 않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 더욱 그를 괴롭게 했다.
아름다운 동화를 쓰고 시를 즐겨 쓰는 문학 청년의 감수성 예민한 여린 마음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이걸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가야 하나...
당시 풍습으로는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것을 알게 되면
그 남편은 반드시 정부에게 결투를 신청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 모르는 체 묵인을 하고 넘어가면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못난 놈이라는 낙인이 찍혀 버리게 되어
살아도 죽은 목숨이 되고 말았다.
명예를 잃는 것이 목숩을 잃는 것보다 더 가혹한 형벌이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푸쉬킨은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기로 했다.
하얀 손수건을 정적 앞에 떨어뜨렸을 때
상대방이 그걸 주워 들면 결투를 해야 하지만
상대가 주워들지 않으면 결투는 없던 일로 된다.
푸쉬킨은 결국 단테스 앞에다 하얀 손수건을 던졌다. (계속)
문제의 그여성의 초상화 가져와 보았읍니다요.
황제의 마음까지도 빼앗았던
아름다운 아내 나탈리아.
그녀의 이름 표기가 어느곳엔 나턀랴라고하기도하고
나탸샤라고도하네요.
여튼 유명세로인해 초상화도 여러점있더라구요
그중에서도 가장 젊고 예쁠때 초상화 두점 입니다.
자신의 미모를 뽐내기를 좋아했던 나탈리아는
언제나 러시아 사교계에서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유명한 여자였고
마침내 여동생의 남편인 단테스 남작까지 유혹하기에 이른다
............
이만하면 춘선이의 글에 추임새로 쓸만한지....
전 흐름이 끊길까봐 댓글도 못 달았는데 은희언니 덕분에 숨좀 돌리고 가게 됬어요.
화림아!
춘선이가 여행기 써야한다는 책임감에 쉬지도 못하는 것 같애.
어쩌겠니? 우린 재미있게 앍어야지~~~~ㅎㅎㅎ
은희언니가 올린 사진을 보니
그 여자가 정말 요염하게 생겼네요.
내 생각에 저런 여자들 때문에
나타샤라는 이름에 대학 속설이 그렇게 붙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암튼...
여행기를 여행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에 맞춰서 써 보려고 해요.
푸쉬킨 다음에 쓸 러시아 여제 예까레나 2세 이야기도 기대해 주세용 ~
푸쉬킨이 던진 손수건을 탄테스는 집어 들었다.
사내이기 때문에 더 이상은 비껴갈 수 없는 운명의 힘을 느끼면서.
결투는 서부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치루어졌다.
서로 뒤돌아 서서 세 발자국을 걸어간 후에 총을 쏘아 승부를 내기로 했는데
결과는 푸쉬킨이 단테스의 총에 맞아서 죽게 되었다.
그 때 푸쉬킨의 나이 32세.
한창 일을 할 나이였다.
- 푸쉬킨이 죽은 후에 단테스는 나타샤랑 결혼을 했나요?
내가 기념품 가게 지배인에게 물었다.
- 아니요, 나타샤는 그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몰라요.
아마 혼자 살았을겁니다.
단테스는 아주 윤리적인 남자였기 때문에 과부랑 결혼을 할 수가 없었지요.
- 단테스가 윤리적인 남자였다고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가 마치 탄테스인양 마구 닦아 세웠다.
- 아니, 그렇게 윤리적인 남자가 남의 여자랑 바람을 피워요?
그게 진짜 사랑이었으면 과부로 만들었으니 더더욱 끝까지 같이 가야지요.
알고 보니 나타샤릉 절절하게 사랑한 것도 아니었구만...
그런 주제에 왜 푸쉬킨을 죽였대요?
정말 나쁜 인간이네.
단테스도 일찍 죽었나요?
- 아니요, 단테스는 결혼생활도 잘하고 할아버지가 될때까지 살았대요.
지금도 그의 후손들은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고 하네요.
- 대체 단테스는 왜 러시아인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작가를 죽인거예요?
결투에 응하지 않았으면 둘 다 살 수 있었을텐데요.
- 남자이기 때문에 단테스도 어쩔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푸쉬킨이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았어요.
죽고 난 후에 그가 쓴 작품들이 더 사랑을 받기 시작을 한 것이지요.
예술가들은 죽어야 이름이 나고 빛도 나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나 보다.
화가들도 죽어야 그림값이 오른다고 하더니만 푸쉬킨도 그런 작가였던 모양인가?
푸쉬킨은 무얼 지키려고 목숨을 건 결투를 했던 걸까?
사랑을 지키기 위함도 아니요 그저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운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정말 어이없이 요절을 한, 지지리도 운이 없는 가여운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살면서 좋은작품을 많이 써서 남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쩌면 그가 아쉽게 떠났기에 그의 작품들이 더욱 인구에 회자되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야 막연한 환상을 덧입혀 영웅으로 떠받들기를 좋아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계속)
죙일 열어놓고 소설을 읽었지.
난 잠시 <올가>가 된듯.
싱긋 미소지으며~
계속 흥미진진....Please~!
푸쉬킨 이야기에 빠져 있다 보니 가이드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었다.
나는 부랴부랴 상점을 뛰어 나오느라 눈여겨 보아 두었던 예쁜 마뜨로슈카 인형은 사지도 못했다.
마뜨로슈카 인형 (일명 알까기 인형)은 자작나무로 만드는데
새로 며느리를 보게 되는 시어머니가 다산을 기원하며 만들어 주는 것이었단다.
큰 인형 속에 작은 것들이 보통은 5개, 많으면 15개 정도 들어 있는데
모두가 수작업으로 그린 것이어서 표정과 색감이 다 달랐다.
비싼 가격에 나와 있는 것에는 인형의 배 부분에 동화 그림이 그려진 것이 많은데
주로 푸쉬킨이 지은 이야기라고 했다. (계속)
가령 모스크바에서 레닌그라드로 가는 역은 레닌그라드역,
페테스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역은 모스크바역이라고 부른단다.
그래서 언젠가 모스크바역에서 한인 학생이 피살 당하는 사건이 났을 때
기자들이 취재하러 모스크바에 와서 우왕좌왕 할 수 밖에 없었단다.
모스크바에는 아무리 뒤져보아도 모스크바 역이 없으니 말이다.
우리는 경사가 아주 급하고 깊게 판 모스크바 지하철 탑승체험까지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계속)
크레믈 궁에는 황제의 종과 황제의 대포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특히 황제의 종은 무게가 202톤에 달하는 세계에서 제일 큰 종으로서 금 70톤, 은 100톤으로 만들었단다.
가이드 말이 러시아 사람들은 작고 섬세한 것은 못 만들지만
크고 우람한 것은 아주 잘 만드는 민족이란다.
러시아인들은 동쪽은 해가 뜨는 곳이라고 신의 방향으로 여겼고
서쪽은 해가 지는 곳이라 해서 인간과 사탄의 방향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우스펜스키 사원>의 동쪽 문은 황제의 문, 혹은 신의 문이라 하였고
서쪽 문은 사람의 문이라 하였다.
1712년에 수도가 페테스부르크로 옮겨간 후에도 대관식은 여전히 우스펜스키 사원에서 치렀는데
황제의 문으로는 오직 황제와 주교만이 다닐 수가 있었다.
크레믈의 <대천사 사원>은 일명 <무덤의 성당>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황제들의 무덤이 이 곳에 있었다.
단 한사람, <세르게이예프>로 추벙을 당한 보리스만 제외하고....
이곳은 우리나라의 종묘와도 같은 곳이었다.
사방의 모든 벽에 성화가 그려진 이콘들이 즐비했는데 뱀이나 사탄의 그림은 모두 서쪽벽에 있었다.
우리는 북쪽을 임금이 계시는 곳이라 하여 먼 곳에서도 북향사배를 올리고
븍극성, 북두칠성등을 신성하게 여긴 것과 비교가 되어 흥미롭다.
톨스토이 기념관은 톨스토이가 말년에 20여년간 살며 집필을 했던 곳으로
모스크바 시내 복판에 있었다.
진노랑색 페인트로 단장을 한 나무집이 꽤나 규모가 크고 정원이 아름다웠다.
특히 정원을 내다보며 집필할 수 있는 창가에 바짝 붙여 놓은 책상과
정원에 따로 마련해 둔 작은 응접실 내지는 집필실이 마음에 들었다.
마당 뒤켠에 아트막한 동산을 만들어 정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게 한 것도 여유로웠고....
그는 이 집에서 <부활>을 썼다고 했다.
집 안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따로 돈을 내야 한다고 하며 사진 촬영권을 팔았다.
그래서 안에서는 총무만 대표로 찍고 밖에 나와서는 미친듯이 셔터를 눌러댔다.
톨스토이가 느꼈던 정원의 운치를 렌즈를 통해서나마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싶어서....
마침 간간히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여서 마음이 더없이 차분하고 좋았다.
마음으로 늘 흠모하던 대문호의 숨결이 배어있는 집 안팎의 모든 풍광이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계속)
( 정원에 따로 있는 작은 응접실 겸 집필실. 안에는 탁자와 의자 몇 개, 페치카만 있었다.)
굼 백화점도 내가 상상했던 초대형 맘모스 백화점이 아니었다.
요즘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 온 명품 아울렛 매장 같은 형태의 작은 가게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내일 오페라에 갈 것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정장에 맞출 작은 핸드백도 고르고 반액 세일하는 귀걸이도 구경하면서 돌아다녔다.
세일하는 물건을 찾아 다니며 쇼핑하고
예쁘게 치장을 하기 위해 이것 저것을 대어 보며 즐거워하는 것은
여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자 특권이고 아직 젊었음을 웅변하는 일이 분명하다.
우리 일행 중에 이미 여성성을 상실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들 가이드가 정해 준 시간이 짧다고 아우성치며 이것 저것을 구경하고 만지작거리기도 하며
굼백화점을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즐거워한 것을 보면....
저녁을 먹고 우리는 1인당 60유로씩 하는 러시아 서커스를 보러 갔다.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새로 지은 서커스 전용극장으로 갔는데
출입구 안쪽에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수 천벌은 족히 걸 수 있는 외투 걸이가 인상적이었다.
두꺼운 옷은 입구에다 맡기고 가벼운 차림으로 공연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
러시아인들의 이 여유로운 풍습은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은 아닐게다.
그들이 축적해 놓은 문화의 내공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엿볼 수가 있었다.
러시아 서커스는 화려한 레이저 쇼와 코믹한 이야기가 담긴 가족 오락관 같은 것이었다.
외줄타기, 물개, 말, 새, 사자가 등장하는 동물 서커스, 지하에서 떠오르는 수영장,
천장 끝까지 올라가는 곡예사등의 묘기가 흥미진진하게 이어졌다.
그 중에도 내 맘에 제일 든 것은 새털처럼 가벼운 몸놀림의 흑인 비보이 팀의 재주였다.
사람이 어쩌면 저리도 가볍게 몸을 놀릴 수가 있을까 감탄하며
그들의 유쾌한 표정 덕분에 내 기분까지도 덩달아 좋았다.
공연은 장장 130분이나 이어졌다.
우리는 가이드의 신호에 따라 무대에 불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극장을 빠져 나왔다.
사람이 한꺼번에 몰릴 때 나오려면 나오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까봐.....
이것도 우리의 습성 중 하나가 분명하다.
길게 여운을 느끼는 것 보다는 후다닥 빨리 군중 속을 빠져 나오는 것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습성.
바깥에선 여전히 비가 오락가락 하고 있고
밤 11시가 가까운 시간인데도 아직 초저녁같은 어스름만 내려 있었다.
백야를 다시금 실감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계속)
그녀는 모스크바에 사는 사람이고
우리는 단지 사흘밤만 자고 가는 나그네에 불과한데
왜 그렇게 내 마음이 안쓰러운지 모르겠다.
낯선 곳에 그녀 혼자 떨어뜨리고 가는 것 같은 애처로운 마음이 들어
그녀를 태운 차가 안 보일 때까지 멍하니 서서 바라 보려니 어느새 눈물이 주루룩.....
먼 땅에 살기에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마음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
이렇게 먼 곳에서 우리가 해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꿈 같기도 하고 영화 같기도 했다.
친구 덕분에 시차로 인한 여행의 피로도 느낄 새 없이 정말로 즐겁게 보낸 하루였다.
내일은 비행기를 타고 St. 페테스부르크로 간다.
피터(표토르) 대제가 도시계획을 하고 예까쩨리나 2세 여제가 완성을 했다는 아름다운 그 곳에서는
지금 백야축제가 한창이라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된다.
예쁘게 차려 입고 꽃다발을 든 그녀가 우리가 탄 버스에 오르자
너무나 반가워서 눈물이 다 핑 돌았다.
이게 정녕 꿈은 아니겠지.
지구촌 한가족이라는 말은 늘상 하고 살았지만 이렇게 먼 곳에서 가까운 친구를 만나다니 꿈만 같다.
육이오 때 헤어졌던 이산가족을 다시 만난듯이 우리는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놓지 못했다.
다들 모스크바에 오면 세번은 깜짝 놀란다고 한다.
하나는 너무 심한 교통체증에 놀라고
둘은 너무 비싼 물가에 놀라고
셋은 너무나도 예쁜 아가씨들에 놀란다나....
아직 둘, 셋은 실감을 못하지만 교통체증이 심하다는 것은 바로 시인을 하게 되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길이 마치 추석 때 귀성차량이 몰린 경부고속도로 같다.
30분이면 너끈히 갈 수 있는 거리를 2시간이 넘게 걸려서 갔다.
- 길이 밀린다고 짜증을 내면 모스크바에서 못 살아.
그러려니 하고 차 안에서 할 일과 즐길 것을 가지고 타는 게 상책이야.
은혜 말이 맞다.
차가 밀리면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즐기면 되고
차 안의 사람들과 수다도 떨면서 놀면 되고....
이번 여행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긍정의 힘>임을 다시금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며 심호흡을 했다.
그래.
긍정의 힘을 발휘해서 긍정의 눈으로 매사를 보고 느껴 보는거야.
즐거움은 긍정적인 마음에서 싹이 트고 뿌리를 내려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과실이지.
이왕이면 내가 거둔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노력해 보는거야.
이 또한 내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임을 잊지 말아야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