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오늘은 전태일 열사의 33주기 추모일입니다.
'전태일평전’이 없었던 시절, 우리들은 전태일 열사가 대학노트에 적은 육필일기를 복사해서 몰래 돌려가며 읽었습니다.
이른 새벽에 막일을 나가기 위해 신발을 신는 전태일 열사에게 이소선 어머니가 “어디 가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옵니다. 낮에 공사장에서 삽질을 하다가 문득 깨닫습니다. “아, 나는 오늘 새벽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반항한 것이었다.” 자책하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삽질을 했다는 그의 진솔한 모습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살랐다는 행위가 그의 인생에 없었다 해도 정말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일기와 동료들의 추억 곳곳에 그의 훌륭한 모습이 살아있습니다. 다른 열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들 역시 평소의 삶이 남달리 성실하고 인생에 대한 성찰이 깊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온 몸에 불이 붙은 채, 쓰러졌다 일어나고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 뜨거운 연기를 마시며 마지막까지 외쳤던 구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유치한 구호입니까?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전태일 열사의 목숨과 맞바꾼 마지막 구호가 유치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져야 할 최저 기준입니다. 그 법이 켜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시대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절박한 구호로부터 출발한 것이 70년대 노동운동이었고, 그 토대 위에서 아직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다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가능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성장한 우리의 노동운동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33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우리 노동자들의 현실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가, 우리의 노동현장은 얼마나 많이 인간적으로 바뀌었는가, 생각해 보면, 부끄럽습니다. 33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노동자들이 계속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만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서럽고 눈물납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가압류와 손해배상 청구는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것보다 더욱 노동자들을 가혹한 현실로 몰아내는 일입니다.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2년 전 겨울, 이소선 어머니를 만났을 때 저는 오래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습니다.
"어머니, 전태일 열사의 임종순간을 설명해주세요. 전태일 열사가 숨이 넘어가던 바로 그 순간이 저는 정말 궁금했어요."
이소선 어머니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 얘기를 내가 지금 다시 하면,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구정물을 다 헤집어서 퍼내야 해. 그러면 나는 또 며칠 동안 잠을 못 잘 텐데, 그래도 해주랴?."
나는 뻔뻔스럽게 아무 말 않은 채 기다렸고 이소선 어머니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말을 꺼내셨습니다.
"태일이가 '어머니, 나는 아마 살아날 수는 없을 거에요. 내가 3분 있다 죽을지, 5분 있다 죽을지 모르니, 어머니, 내 말 잘 들으세요. 노동자들은 지금 캄캄한 암흑에서 살고 있어요. 내가 죽으면서 그 암흑 세상에 작은 구멍을 하나 뚫는 거에요. 어머니가 다른 노동자들과, 학생들과 함께 그 구멍을 조금만 더 넓혀주세요...' 태일이 목에 피가 고여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거야. 의사가 칼로 목 아래를 따니까 피가 풍풍 나왔지. '어머니, 꼭 그렇게 사셔야 해요.' 태일이가 ‘꼭’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피가 분수처럼 뿜었어."
어머니는 그 아들의 마지막 부탁을 정말 훌륭하게 들어주셨습니다. 10년 전쯤에 내가 본 통계만으로도 이소선 어머니가 수사기관에 잡혀가거나, 구류를 살거나, 구속된 횟수는 무려 250회가 넘었습니다. 이 땅에서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눈물겨운 일이었습니다.
이소선 어머니의 삶을 감히 “가치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수십년 세월 동안 그렇게 존경받아 마땅한 삶을 살아오실 수 있었던 작은 원칙 - “태일이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자.” 어찌 보면 그 부채감이 어머니 수십 년 삶의 기둥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분신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칩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우리 모두 그 부채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 열사의 마지막 외침에 답하는 길일 것입니다.
CBS 시사자키 칼럼 하종강이었습니다.
김종욱 PD : 칼럼 들으며 숨막혀 죽는 줄 알았슴다. 2003/11/14
하종강 : 원고가 좀 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녹음 끝내고 서둘러 나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좀 빨리 읽었습니다. 호흡 조절, 어려워... 그래도 옛날 정태인 속도 절반 정도밖에 안 될껄요... ㅋㅋ 2003/11/15
김종욱 PD : 속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그 내용 때문에 숨이 막혔다는 뜻입니다. 가슴 어딘가가 뭉클해 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2003/11/15
'전태일평전’이 없었던 시절, 우리들은 전태일 열사가 대학노트에 적은 육필일기를 복사해서 몰래 돌려가며 읽었습니다.
이른 새벽에 막일을 나가기 위해 신발을 신는 전태일 열사에게 이소선 어머니가 “어디 가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옵니다. 낮에 공사장에서 삽질을 하다가 문득 깨닫습니다. “아, 나는 오늘 새벽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반항한 것이었다.” 자책하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삽질을 했다는 그의 진솔한 모습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살랐다는 행위가 그의 인생에 없었다 해도 정말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일기와 동료들의 추억 곳곳에 그의 훌륭한 모습이 살아있습니다. 다른 열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들 역시 평소의 삶이 남달리 성실하고 인생에 대한 성찰이 깊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온 몸에 불이 붙은 채, 쓰러졌다 일어나고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 뜨거운 연기를 마시며 마지막까지 외쳤던 구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유치한 구호입니까?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전태일 열사의 목숨과 맞바꾼 마지막 구호가 유치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져야 할 최저 기준입니다. 그 법이 켜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시대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절박한 구호로부터 출발한 것이 70년대 노동운동이었고, 그 토대 위에서 아직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다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가능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성장한 우리의 노동운동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33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우리 노동자들의 현실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가, 우리의 노동현장은 얼마나 많이 인간적으로 바뀌었는가, 생각해 보면, 부끄럽습니다. 33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노동자들이 계속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만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서럽고 눈물납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가압류와 손해배상 청구는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것보다 더욱 노동자들을 가혹한 현실로 몰아내는 일입니다.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2년 전 겨울, 이소선 어머니를 만났을 때 저는 오래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습니다.
"어머니, 전태일 열사의 임종순간을 설명해주세요. 전태일 열사가 숨이 넘어가던 바로 그 순간이 저는 정말 궁금했어요."
이소선 어머니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 얘기를 내가 지금 다시 하면,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구정물을 다 헤집어서 퍼내야 해. 그러면 나는 또 며칠 동안 잠을 못 잘 텐데, 그래도 해주랴?."
나는 뻔뻔스럽게 아무 말 않은 채 기다렸고 이소선 어머니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말을 꺼내셨습니다.
"태일이가 '어머니, 나는 아마 살아날 수는 없을 거에요. 내가 3분 있다 죽을지, 5분 있다 죽을지 모르니, 어머니, 내 말 잘 들으세요. 노동자들은 지금 캄캄한 암흑에서 살고 있어요. 내가 죽으면서 그 암흑 세상에 작은 구멍을 하나 뚫는 거에요. 어머니가 다른 노동자들과, 학생들과 함께 그 구멍을 조금만 더 넓혀주세요...' 태일이 목에 피가 고여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거야. 의사가 칼로 목 아래를 따니까 피가 풍풍 나왔지. '어머니, 꼭 그렇게 사셔야 해요.' 태일이가 ‘꼭’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피가 분수처럼 뿜었어."
어머니는 그 아들의 마지막 부탁을 정말 훌륭하게 들어주셨습니다. 10년 전쯤에 내가 본 통계만으로도 이소선 어머니가 수사기관에 잡혀가거나, 구류를 살거나, 구속된 횟수는 무려 250회가 넘었습니다. 이 땅에서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눈물겨운 일이었습니다.
이소선 어머니의 삶을 감히 “가치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수십년 세월 동안 그렇게 존경받아 마땅한 삶을 살아오실 수 있었던 작은 원칙 - “태일이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자.” 어찌 보면 그 부채감이 어머니 수십 년 삶의 기둥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분신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칩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우리 모두 그 부채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 열사의 마지막 외침에 답하는 길일 것입니다.
CBS 시사자키 칼럼 하종강이었습니다.
김종욱 PD : 칼럼 들으며 숨막혀 죽는 줄 알았슴다. 2003/11/14
하종강 : 원고가 좀 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녹음 끝내고 서둘러 나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좀 빨리 읽었습니다. 호흡 조절, 어려워... 그래도 옛날 정태인 속도 절반 정도밖에 안 될껄요... ㅋㅋ 2003/11/15
김종욱 PD : 속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그 내용 때문에 숨이 막혔다는 뜻입니다. 가슴 어딘가가 뭉클해 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2003/11/15
2003.11.15 21:50:47
그때 우린 한창 천방지축 아무것도 모르고 시험 걱정만 했었던것 같은데요.
한쪽에선 암울한 시대를 지내고 있던 나이 어린 사람들이 있었다는걸
전혀 의식을 못했습니다. 배불리 먹고 별 걱정없이 지냈던 시절이
죄스럽기만 합니다.
하종강이라면 우리 초등 동창인것 같은데요?
예문이도 알지? 아니면 동명 이인?
한쪽에선 암울한 시대를 지내고 있던 나이 어린 사람들이 있었다는걸
전혀 의식을 못했습니다. 배불리 먹고 별 걱정없이 지냈던 시절이
죄스럽기만 합니다.
하종강이라면 우리 초등 동창인것 같은데요?
예문이도 알지? 아니면 동명 이인?
2003.11.15 22:06:48
댓글 달았다 실수할까봐 얼른 내리고 종강이한테 정확히 확인후(와이프,최XX 그리고 CBS고정컬럼기고자등) 댓글 다시올림. 종강인 틀림없이 우리 동창이자 친구임다.(x12)
2003.11.16 00:05:48
맞습니다,맞고요.하종강씨는 교대부국,제고18회출신 맞고요
인일10회 유명선의 부군이십니다.
그리하여
하종강씨는 여편친구 교대부국출신 인일10회들에게는 "선배님"이라 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인일10회 유명선의 부군이십니다.
그리하여
하종강씨는 여편친구 교대부국출신 인일10회들에게는 "선배님"이라 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2003.11.16 00:47:12
그런데 뜻밖이었어요.인일10회분이 와이프라는 사실이...
그리고 이명희님 반갑습니다.진작에 안광희님글.카툰에서 뵌적이 있어 서먹하진않군요.
그리하여...........꾸벅 요로시구~(x18)
그리고 이명희님 반갑습니다.진작에 안광희님글.카툰에서 뵌적이 있어 서먹하진않군요.
그리하여...........꾸벅 요로시구~(x18)
2003.11.16 16:26:13
이흥복님!! 저도 반갑습니다.
제고18.이흥복님도 눈에 익어 저 또한 낯설지는 않아요.
인터넷의 대단한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합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어도 모두 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것 같쟎아요^*^
자주 뵈어요,그리고 반가워요......................(x1)
제고18.이흥복님도 눈에 익어 저 또한 낯설지는 않아요.
인터넷의 대단한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합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어도 모두 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것 같쟎아요^*^
자주 뵈어요,그리고 반가워요......................(x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