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날

♬ 사랑하기 때문에




유재하를 말하는 것은 김광석을 말하는 것만큼이나 가슴 아픈 일이다.
유재하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올해로 16년이 되었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20년이 된다.
20년이란 세월도 누군가를 잊기에는 그리 충분하지 않은 시간인 모양이다.
그는 1987년 11월 1일, 친구 차를 타고 귀가하다가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다.
스물다섯 살, 죽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였다.

그를 처음 안 것은 겨울부터 시작된 추모 분위기가 커져가던 88년 봄 무렵이었다.
당시 라디오에서 그의 노래 ‘지난날’이 나오지 않는 날이 없었을 정도로 그의 노래는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지난날’은 음악에 문외한인 나로서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정도로 새롭고, 놀라운 음악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던 ‘사랑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가리워진 길’등은 한동안 내 가슴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정작 유재하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가지게 된 이면에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우연이 있다.

88년 겨울, 나는 온통 실패라는 짐을 진 채 혼자 여행을 떠났다.  무슨 일이 생기든 한강에
가서 그 시작과 끝을 정리하던 나는 당연하게도 동작교를 건너는 것으로 나의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의 변명으로 삼았던 실패의 정체들이 지금에 와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
테지만, 다시 그 나이를 살아낸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마 같은 무게로 그 힘겨움을 견뎌내고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동작교를 건너던 그때 바람에 날려와 내 다리에 휘감기던 유재하의 음악이 담긴
악보 한 장....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나는 감짝 놀랐지만 그 악보를 소중하게 접어 내
배낭에 집어넣은 채 바다로 떠났다. 어쩌면 진정으로 시작된 그와의 만남은 라디오에서
쉽게 들려오던 노래가 아니라 그 우연과도 같은 만남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동해의 한 백사장에서 그의 악보를 보며 나지막이 읊조리던 그의 노래들. 여행에서
돌아오던 밤에 그의 노래를 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그의 노래들을 모두 듣던 밤, 나는 애써 과장해두었던 내 스물한 살의 실패며,
우울들을 버릴 수 있었다. 터무니없이 쏟아내던 독설과 아집과 어둡게 채색되어만 가던
일기장도. 그리하여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높은 벽으로 쌓아올렸던 젊음의 오만까지도
잊을 수 있었다.



그것이 유재하의 음악들이 내게 준 선물이다. 처음 강바람에 날려 내게 왔던 악보에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나를 지켜주는 영원한 스물다섯 살 청년의 노래, 그리고 사랑.

*   *   *



6년 전쯤 그를 추모하는 음반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를 사랑하고 오래 기억하던 동료 가수들에 의해 그의 노래가 다시 불려졌지만 결코 그 음반을 살 수는 없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이제는 잡음으로 뒤덮여 있지만 내게는 꼼짝 못하고 듣게 만들던 그 처음의
음반이 있으니까. 그때 그의 목소리에 담겨 함께 흘러가던 내 젊은 날의 이야기는 새로
만들어진 음악 속에는 없을 테니까.

오늘은 내내, 그의 음악을 듣게 될 것 같다. 이제는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 비처럼 음악처럼

♬ 내 사랑 내 곁에




살아가다 보면 이래저래 자질구레한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기억이 되었든
책들이 되었든 혹은 버리지 못하고 서랍 한 구석에 쌓아두기 시작한 잡동사니들이 되었든.

서랍을 정리하다가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테이프들을 하나씩 듣고 있다.
그중 하나 도대체 언제 녹음을 했는지 기억에 없지만 이문세가 별밤을 진행할 때의
공개방송 중에 김현식과 신촌블루스가 나왔다.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낭랑하던 김현식의
목소리는 이미 병색이 짙어져 가고 있던 탓인지 생각과 달리 고음 부분에서 지나치게
갈라지고 탁한 음색으로 일관되어 있다. 아마 당시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일 뿐이겠지.

내가 김현식을 처음 안 것은 음악에 관한 한 늘 그렇듯 다른 사람들과 달리 조금 늦다.
군에서 막 병장을 달고 조금씩 편해지려고 하던 91년 중순이었던 것 같다. 그때
MBC에서는 <무동이네 집>이라는 드라마를 했었고, 이제는 라디오 DJ로 더 유명해진
최유라의 테마송으로 나왔던 노래가 바로 <내 사랑 내 곁에>였다. 참 묘한 노래였다.
최유라가 실연인지 이별인지로 거리를 방황하던 장면에서 곧잘 흘러나오던 그 노래의
처연한 음색은 스물세 살의 내 마음을 서성이게 만들곤 했다.

그가 간을 앓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에 없다. 그가 3년 후,
유재하와 같은 날 죽었다는 소식만 뒤에 알게 되었을 뿐이다. 다만 그가 죽은 후에
<내 사랑에 내 곁에>가 영화로 만들어졌다가 흥행에 참패했고, 그를 위해 동료들이 만든
유작 앨범도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다는 이러저러한 구설수들만 기억에 남았다.
왜 중요한 것은 쉽게 잊혀지면서 이런 사소한 기억들은 오래 살아 남는 것일까.

*   *   *



멘트 도중 크리스마스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그 녹음은 한참
겨울로 들어서던 때에 이루어진 것 같다. 하지만 이문세가 턱없이 건강한 목소리로 한껏
분위기를 잡아가던 것에 비해, 피아노에 맞춰 함께 실버벨을 부르는 김현식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져들 것처럼 애처롭다.

오늘은 날이 흐리고, 오늘은 날이 포근하고, 오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다. 그가
죽어 수줍은 한 평 땅이라도 소유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바람처럼 유골들이 날아가
버렸는지 알 수 없으나, 어디선가 또 비가 내리고 음악이 들리면 너무 서둘렀던 그의
죽음이 생각날 게다. 허나 그 비가 그를 위로할 수나 있을지....


- 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