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날개위에 품바 그 셋째 마당>
{청소년 전기(前期)} 하(下)

1: <DAVID에게 참패>
다시 중2 시절
덩치 크고 힘도 엄청 장사인 선배와 둘이 설악산에 갔다.
지금은 웬만한 산에 가면 사람단풍까지 더해서 온통 시장바닥
같아졌지만,  그래서 그저 앞사람 꽁무니만 따라가는 산행이 되고
말았지만 45~46년 전 그 때는 설악산에 들어가는 버스도 하루에
한두 대 꼴로 다니던,  옛날 삼국시대와 같은 때였다.
그 쉬운 코스인 비선대(飛仙臺)를 찾아가려해도 어쩌다 드물게
눈에 띄는 촌로에게 길을 물으면 저 너머로 조금만 가면 된다고
심드렁하게 손짓하던 때다.
그래서 기껏 한 20분 정도만 가면 되나보다 하고 가면,
가도 가도 끝이 없던 바로 그런 시절이다.
어쨌든 비선대를 향해 땀을 쏟아낸다.  숨이 턱에 찬다.
그러면서도 한참 젊은(?) 아니 한참 어린 나이인 나는
온몸이 근질거린다.  <오 솔 레 미오>를 뽑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나두쏘~하는 그 고음을 질러대는 소절에서
불쑥 돼지가 한 마리 비명을 질러댄다.  멱따는 덧에 걸린 것이다.
이런~!
다시 질러댄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돼지 멱을 딴다.
그 깊은 산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염치 좋게 계속 돼지를 잡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몇 번을 시도해도
돼지는 잡히지 않고 도망 다니며 멱따는 비명만 숨 가쁘다.
그 때 어디선가 힘차고도 시원한 고음의 목소리로
떨어지려는 <태양>을 가볍게 들어 올리는 소리가...!!
소리를 쫓아 숲을 헤치고 고개 내밀어보니
저 아래 계곡에서 벌거벗은 군인 아저씨 온몸에 비누질을 한 채
<오 솔 레 미오>를 뽑아댄다.
마침 멀리서 건너보는 나에게 씨~익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손까지
흔들며 노래하는 게 아닌 가?!!   비록 산길을 오르느라고 숨이 턱에 찬
탓이라고 스스로 변명해보았지만 솔직히 그 벌거벗은 <DAVID> 에게
완전한 한판 패였다.  (=완존?)


2: <육담폭포의 나무꾼과 선녀>
계곡 아래 펀펀한 모래사장을 찾아 텐트를 치고 우리는 설악의
첫 밤을 지낸다.  버너에 밥과 찌개까지 잘 끓여먹고
계곡 나무 늘어진 넓은 소(沼)에서 목욕까지 하고
별을 보고 누워 밤새도록
서울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한 엄청 큰 모기들에게 육 보시(肉布施))
하느라 한 잠도 자지 못했다.  다음 날 일찍 새벽 답에 울산바위 밑
계조암을 다녀오고 아직 한낮도 한참이나 먼 시간에 다시
토왕성 폭포를 향한다.
그 때는 정말 두어 시간을 산길을 가도
사람 하나 구경하지 못할 때였다.  비룡폭포를 지나 토왕성 폭포 바로 밑에서
그 장관을 올려다보고는 서서히 내려오는 데 다시 DAVID에
참패한 기억이 새로워 목을 가다듬었다.
아, 아, 하며... 막 태양을 품으려 치고 나가려는 데
선배가 갑자기 쉬~ㅅ하며 엎드리라고 한다.
저 아래에 무슨 짐승이 있는 것 같다며...   겁 많은 나는 그 소리에 기겁을 해서
납작 엎드려 숨도 크게 못 쉬고 쥐 죽은 듯 있고...
선배는 겁도 없는지(?)  저 아래 짐승 쪽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고...!!
그렇게 한 10 분이나 지났을까?  이윽고 선배   “자 이제 일어나
내려가도 되겠다.” 하며 다시 길을 재촉한다.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육담폭포에
웬 총각 하나와 처녀 하나가 방금 목욕을 마친,  아직 물도 덜 마른
얼굴로 우리를 보더니 그야말로 새빨간 능금이 얼굴에
열리는 게 아닌 가?  난 아무 영문도 모르고   “아 저 여자 증말 무지
이쁘네,  마치 양귀비가 하강한 듯싶네.”
그렇게 속으로 몇 번인가 주워 삼키며 내려왔다.
그런데 나중 선배 말이 내가 소리를 질러대려는 순간 저 아래를 보니
그 남녀가 막 옷을 벗고 담(潭)에 몸을 담그길 레 그이들이
무안해할 까봐 조용히 엎드려 있으라 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선배는 왜 우거진 나무 사이로 고개 내밀고 그 아래쪽을
열심히 보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칠 때 그 여자만큼이나 얼굴이
빨개지던 것은 웬 일인지...   또 저녁에는 계속 입맛 다시며
이번 설악산 여행에서 기필코 끊겠다던 담배는
왜 그리도 뻔질나게 피워댔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어쨌든 설악산에서는 끝내 태양을 내 가슴에 품지는 못했다.
 
3: <4人의 가수들>

다시 고(高) 1 시절
하필 우리 담임선생이 노래라면 뒤집어지는 분이라,
하루 수업시간이 끝나면 반드시 반 전체 합창과
독창 3~5곡쯤 듣고야 파하는 괴짜였다.
나와 許모,  金모,  3人은 당연직으로 매일 저녁 독창을 했다.
許모君은 뽕짝의 대가였다.  ‘백년설’  ‘남인수’  ‘한복남’  ‘명국환’ 등
짜~식 정말 잘 불렀다.  金모君은
<가고파>등 한국가곡과 뽕짝일부에 주특기,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녀석이 침착하고 무게 있게 잘 불렀다.
나는 이태리 가곡과 가끔
<산들바람>  <이별의 노래>등 한국가곡을 섞어 불렀다.
담임선생은  <먼  산타 루치아>를 특히 좋아해
본인도 매일 한 번씩 독창을 했다.
그때 나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2층과 3층 사이 계단에서 때로는 혼자,  때로는
지금 아산 사는 내 잊지 못할 친구와 거의 매일 노래를 불렀다.
거기는 목욕탕처럼 공명(共鳴)이 알맞게(?)되어
그럴듯한 소리가 났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나는 수학 시험 때는
일찌감치 만점 답안지 내고 나가서 신나게 불러 제쳤다.
가끔 수학문제가 잘 안 풀리는 녀석들이 시끄럽다고
불평을 했지만 그래도 단지 구시렁대는 차원으로
나는 아예 제쳐 논 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내가 그런 짓을 했는지
내게도 남의 얘기만 같다.
아마 그 업보로 나중 바로 그 수학으로 인해
대학시험에서 두 번이나 바나나 껍질을 밟은 듯싶다.


4: <완죤히 꼬리 내린 ‘마리오 용’>

고1 때 인천 5개 남녀고등학생 20 여명이 독서클럽을 결성했는데
거기서 첫날 상견례 겸 특기나 노래자랑이 있었다.
인천고 학생 하나가 기타까지 갖고 와서
일본노래와 불란서 샹송을 해대는 모습에
서울 길목 과천에서부터 완죤히 기가 질려버린 나는
우리학교 대표선수로 출전한 기대를 무참히 깨고
연거푸 두 번이나 돼지 멱딸 때 숨 줄 끊어지는 소리로 스타일 구기고
결국 선배가 멋진 바리톤으로 대신 커버 해주었지만
그때 이미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가수수업을 받고 있다는,
마스크도 훤칠한,  그 인천고 미남 때문에
한 달 만에 독서 클럽은 슬그머니 중도하차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나중 가수가 됐다는 소식은 과문한 탓인지 여태 못 들었다.


5: <통과의례>

서울로 전학한 후 슬슬 내 주위에
동물원에 갓 들어온 신입에 대한 호기심으로
몇 몇 녀석들이 모였다.
걔들은 우선 반에서 제일 팔 힘이 센
역도(力道)반에 소속된 양키처럼 생긴 친구와 팔씨름을
자꾸 부추겼다.  지금에야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지만
그 때만 해도 팔씨름은 전교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던 나는
처음 잠시 꼬리를 내리며 사양을 하는 척 했다.
“체격으로 보나 뭐로 보나 밥살인 내가 상대가 되겠느냐?” 고
손사래 질을 하며 능청을 떨었다.  당시 나는 첫눈에 상대방
팔뚝의 굵기나 형태만 봐도 거의 감이 왔다.
결국 그 친구의 팔을 잡아보니 그 감은 더 확신으로 다가왔고
나는 무지 용을 쓰는 척 하면서 무난히 이겼다.
물론 3판 양승제로...  첫판은 무지 힘든 척,
두 판째는 좀 더 여유 있게...
그럼으로써 뒷전 왕따 신세를 일찌감치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점심시간에 상급생 두 명이 들이닥치더니
나를 호명(呼名)해서 3층 자기네 교실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잔뜩 쫄아서 따라가고...
“야 너 노래하나 불러봐라”
이건 또 무슨 짓거리인지?
하여튼 난 음모를 꾸민 그들의 예상(?)을 깨고
멋들어지게 뽑아댔고 우렁찬 박수를 받으며 돌아왔다.
나중 들어보니
상급생들이 심심하면 후배교실에 와서
한 놈을 임의동행으로 데리고 가서 노래를 시키고
못하는 경우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몽둥이찜질을 하는
고약한 전통이 있는데
요넘들이 나를 슬그머니 그 함정으로 밀어 넣은 것이었다.
나를 뒤에서 살그머니 따라왔던 넘의 중계방송 덕에
나는 그 후 무슨 행사가 있으면 의례 노래 한두 곡 뽑아야 했다.


6: <예정된 이별>

우리 집 근처에 눈이 왕방울만하고 키와 덩치가
나이보다 몇 살은 더 들어 보이고 치렁치렁 길게 딴 머리채가 허리
아래 엉덩이까지 늘어진 아주 예쁜 소녀가 자주 지나다녔다.

그런데 어느 겨울 밤 명동거리를 걷는데 그 소녀가 저 만치 앞에서
걸어가는 게 눈에 띄어 호기심이 동한 나는 슬그머니 뒤를
따라 가보았다.  소녀는 명동 성당으로 올라가더니 성모마리아 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무엇인지 기도를 하는 게 아닌가?
함박눈은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데 한참이나 그렇게 기도에 빠져 있는
그 소녀의 모습은 때마침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소녀를 여러 날 작업 끝에
어찌 어찌 친구로 만들어 (=꼬셔서) 집에 데리고 온 날
나는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뽑아댔다.
그랬더니
이 소녀  “실력이 보통이 아니네,
우리 오빠에 지지 않겠네요.”  하더니
저도 즉석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화답(和答)을 한다.
그런데 하필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오직 내 집 뿐이리.” 라는
‘Bishop’의  <즐거운 나의 집>이었다.
그러니 이별은 이미 예정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노래하는데
소녀는 자기 집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노래로 받으니...
드라마센터에서 연극을 보거나,
남산오솔길을 걸으며 몇 번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영화 필름은 거기까지였다.

참 인연이란 것이 묘해서 20년이 지나
소녀의 오빠와 나는
진검승부(眞劍勝負)는 아니지만
간접승부를 몇 번 한다.
서울음대 성악과를 나온 프로 테너가수로서
나와 동(同) 업종의 사업체 사장이 된 그 오빠는
술자리에서는 의례 겉옷을 걷어 부치고 아리아를 뽑아댔고
나 역시 비슷한 취향을 가진 바
나와 그 오빠를 둘 다 잘 아는 한 지인이 간접비교를 해주더라.
내 노래가 더 속 시원하다고...
그리고 저음이나 고음이나 항상 맑은 목소리의
진짜 프로 성악가인 그 사람보다는 저음에서는
완전 허스키가 돼 버리는 품바 쪼의
내 노래는 오히려 더 특이한 매력이 있다고...
특히  ‘자니 리’가 부르던   “또 다시 말해주오
사랑하고 있다고 남자답게 말하리라...” 로 시작되는
<뜨거운 안녕>은
내 쉬어 꼬부라진 목소리라야 진짜 맛이 난다나!!!
미안 하네 들!
자네들 앞에서나 이렇게
거짓(?)으로라도 허풍떨지 내가 어디서 이럴 수 있겠나!
친구 좋다는 게 다 뭔가?!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네만
부처님도 급하면 가끔 거짓말을 한다지 않는가?  하하하.

0O1-Bohem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