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밤 마실

                                                                           농촌 진흥청에서 퍼온 사진

 

 

어제 밤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

엘에이 다니러 갔다가 너무 많이 사왔다는 콩나물과 오렌지를 들고 왔다.

이곳에 이사와 보니 가까이 사는 한국 분들이 제법 많아서

같이 교회도 다니고 목장도 함께 하면서 친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민 30여년동안 밤 마실은 자주 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풀타임 일을 하니까 주중에 밤 마실 다니는 것은 생각도 못하였었다.

더구나 새나라의 아이들처럼 일찍자고 일찍 일어나는 우리들로서는 일종의 금기 같은 것...

그러나 그 친구는 일을 안하고 집에서 지내니까 심심해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아들 집에서 은퇴하여 놀고 있는 그녀와 그 남편은 나이가 우리 부부와 똑 같다.

 

우리가 좋다면 자주 밤에 올텐데 우리가 피곤할까봐 못 오고

우리 동네 다른 집과는 자주 왕래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마침 그 집 부인이 한국에 다니러 가서 없으니까 내 차례가 온 것이다.

 

이왕 온 김에 과일을 깍아 먹으며 이야기 보따리를 푸는데

귀여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우고

부산 사투리로 이야기를 얼마나 구수하게 푸는지 한 시간이 후딱 갔다.

 

나는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이 그렇게 재미 있을 수가 없다.

어떻게 이민와서 살았는지? 혹은 어떻게 배우자를 만났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 세상 사는 이야기들은 어느하나 똑같은 것이 없이 독특하다.

 

사람들의 인생을 훔쳐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들 보다 잘난 것 처럼 느껴지고 

더 낫게 사는 방법들이 있는 것 같아

신기하고 존경심을 금할 수 없다.

모두들 영어에 하나도 자신이 없으면서도 남의 나라에 어찌 그리 용감하게 왔으며,

어떻게 문화의 차이를 이기고 본토인들 보다 그렇게 잘들 사는가?

한인 교포들 다들 너무나 훌륭하다.

그녀의 삶도 내가 흉내 낼수 없는 훌륭함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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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몇달 간의 사귐으로 얼핏얼핏 그녀의 입으로

세 명의 자식들이 아이들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들을 하고 있다는 것,

20 년의 이민 생활이 상당히 흡족하였다는 것 같은 느낌의 

이야기들을 흘리는 것을 가끔 들었었다.

그래도 어제 밤 같이 많은 이야기를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39 살에 미국에 왔다고 한다.

이민 올 당시 살고 있던 집을

집 없이 살던 여동생에게 내주면서 비행기 값만 마련해 주면 되겠다 하고

시어머님이 살아 계신 동안 용돈을 대신 드리는 것만 부탁했었다고 한다.

 

여동생은 기뻐서 그당시 천만원을 마련해 주었고

그 돈으로 비행기값 다섯 명분을 지불 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언니의 시어머님이 돌아가실 떄까지 한달에 십만원씩인가를 꼬박꼬박 드렸었다고 한다.

97 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10년간을 그리했다고..

그래서 시어머님은 말년에 용돈 궁하지 않고 재미나게 사셨다고 한다.

그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미국 이민와서 쉽게 돈을 벌어 부쳐드리기는 어려울것 같아서

그렇게 단도리를 하고 왔다는 그녀의 효심은 나중에 생각해보니 축복의 이유일것만 같단다.

모든 효자들이 잘 된다 하더니 그녀도 잘 되는 일만 만나면 그래서 잘되나..했었으니까...

 

뭘 그리 필요할 것라고 내복 나부랑들만 잔뜩 사가지고

한달 정도의 생활비만 손에 쥐고 미국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많은 내복은 하나도 못 입고 쓰레기 통에 들어갔다지.ㅎㅎㅎ

 

돈을 조금 밖에 안 가지고 온 것엔 뜻이 있었다.

그때 자기 생각으로 돈을 많이 챙겨가지고 오면

돈을 의지하여 개척하며 사는 정신이 흐려질까봐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남편은 빈털털이로 이민 오는 것에 한숨을 푹푹 쉬며 힘들어 했지만 자기는

"무얼 그리 생각해요? 나는 무엇이든지 할 것이니 걱정 말아요." 라고 위로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배짱이 대단히 멋지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엘에이에 도착해서 처음 잡은 일은  

남편은 한국에서 한던 일을 살려 페인트칠 하는 일을 청부 맡아 했고

부인은 한국에서도 해 보았던 음식점 쿡이었다.

급료를 얼마나 주어야 하느냐 하는 주인의 질문에

"내가 일 하는 것을 보고 정하세요. 나는 미국 사정을 모르니까요.."했단다.

그랬더니 금방 그 당시 쿡으로서의 최고 월급을 주었다는 것이다.

 

6 명의 쿡을 자기 밑에 두고 주방장 쿡으로 열심히 일을 하였는데

날마다 12시간의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장사가 잘되어 잠시도 쉴수가 없이 일을 하게 되었던 것.

몇 백명 음식을 줄줄이 늘어 놓고 해대는 솜씨는

아무도 따라 올수 없는 맛과 속력을 자랑 했단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일을 한 댓가로

주인은 자기의 일 솜씨에 너무나 만족하였고

한 성질하는 자기는 채소 씻는 일까지 빈틈없이 시키며

완벽하게 열심히 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년여의 중노동 끝에 몸은 꼬챙이 처럼 마르고 휘청 댈 지경이어서

점점 힘에 겨워 지더니 일이 괴롭기 짝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단다.

 

밤을 새면 오늘은 어떻게 견디나 하며 울기까지 시작했을 때

남편은 무조건 그만두라고 아우성을 쳐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우리 마누라 잡게 생겼다."고..

돈이 암만 좋아도 더 이상은 안된다며 고집을 피워 주었다고..

주인이 집도 사주고 차도 사줄테니 제발 계속 일하자고 빌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후에는 삼교대를 하는 음식점에서 오후 5시에서 밤 2시까지 일하는 것을 했는데

월급은 줄었지만 훨씬 할만 하더라고 한다.

그곳에서 한 일년을 일할 때 쯤에  

딸들이 스왑밑에 다니며 알바를 하고 있었는데 자기는 그것이 아주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너희들이 알바 안하려면 엄마가 무엇을 해주면 되겠냐?"고 사정을 했더니

자기들에게 스왑밋에 자리를 하나 얻어주면 남의 일을 안 하겠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양말 가게 하나를 인수하여 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그랬는지 처음엔 자기들이 돈을 번다고 좋아하더니

서로 네가 늦게 나왔느니 일을 적게 하느니 하며 싸우고

급기야 일을 안하겠다고 하더란다.

 

돈을 몇 만불 디리 민것도 있고 해서 스왑밑에서 낮에 일하고 밤에는 식당일을 하였는데

아마도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때였을 것이다.

밤에 일을 끝내고 집에 갈 시간에 운전을 하면

눈꺼풀이 내려 앉고 등에서는 식은 땀이 흘렀다고..

언제나 이고생을 마치고 제대로 살아볼까...한숨이 나오기를 그 얼마나 했을까?

 

그런데 정말 얼마 안되어 점차 해결되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밤일을 그만두고 스왑밑에 전폭적으로 들어 간것은 새로운 터닝 포인트였었는데

음식점 일은 영원히 굳바이가 되었고 집 사정은 점점 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장사가 제법 잘 되어 두세 달만 열심히 일하면 만불이 모이고

두세 달만 열심히 하면 또 만불이 모이는 식으로 점점 재미나게 살게 되었던 것이다.

 

한때는 십만불을 들고 중국에 가서 공장까지 차리려고 했었는데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꿈을 접었고...

 

그렇게 하여 엘에이 폭동도 겪으며 자리를 잡아 갔는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자기들이 변화를 가질 때 마다 좋은 쪽으로 되더라는 것이다.

그 장사를 최대한 잘 될 때는 하고,

그만 두니까 너무나 경쟁이 심해져 너도나도 그일들을 하고 있고

지금은 그 일로 그렇게 재미보는 사람이 없다 한다.

 

건물을 팔 때도 그랬다. 

자기들은 값도 모르고 싼 값에 멕시칸 테난트에게 팔려고 했더니

또 어떤 사람이 나서서 십만불이나 더주고 사기도 했단다.

어떤 사람은 돈을 짊어지고 돈을 버릴 데로 들어가는데

자기네는 점점 더 돈이 모이는 쪽으로 가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곳에 함께 사는 며느리도 피닉스 공항 매점 전체를 감독하면서 일을 잘하여 

월급 이외에도 이번에 삼만불이나 보너스를 타올 정도로 유능하고

아들도 여섯자리 숫자의 년봉을 받는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라 아들이 어머니를 얼마나 생각해 주는지
하나 있는 어린 손녀도 맡기지 않고 학교에 보낸다고 한다.

엘에이 사는 두 딸들은 신앙 좋은 집들에 시집가서 아주 대 만족으로 살고 있고

사위들도 하나같이 돈도 잘 벌고, 장인 장모에게 용돈까지 후히 주는 효심 좋은 사람들이어서

아무 근심 없이 노년을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제 오직 문제는 돈을 열심히 벌다가 집에 앉아 있으니 심심한 것과

건강 문제인데 젊을 때 너무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졸도도 몇번하며 앰블런스에 실려가서 응급실 신세를 지기도 했던 전력 때문에

조금도 과로하면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이 함께 교회를 같이 다니지 않는 것이 걱정이 된다고.

 

고집쟁이 남편이 교회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난리지만

다행인 것은 자기가 교회 다니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고.

사실은 미국에 갓 와서 아이들을 내 팽개치고 일 다닐때

남편의 생각에 교회에 아이들을 맡기면 탈선하지 않을 거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그 예상이 빗나가지 않고 아이들이 착하고 좋게 자라주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믿음 좋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고,

교회가 좋은 곳인줄 모르지 않는 남편이니

때가 되면 함께 신앙 생활 할것이라고 믿는다고.

안 나간다 고집을 피우는 사람 중에 나중에 잘 믿는 사람이 많다고 하지 않는가?  

 

이야기를 하다보니 많이 늦어서 그녀는 돌아갔는데

오랫동안 그녀의 독특한 인생 이야기가 귓가에 남아있다. 

오랜만에 밤 마실 다운 마실을 해준 정다운 친구 때문에 참 즐거운 밤이었다.

 

우리도 언젠가 밤에 그 집에 놀러 가서 가라오께로 노래도 하고 놀아야겠다.

마실은 먹어도 늘 배고픈 헛헛한 이민 인생을 따뜻함으로 채우는 것일 수도 있기에...

(2008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