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장승(1903년) 장승은 마을 어귀에 세워놓고 수호신으로 삼았으며
동시에 이정표 역할을 했다.
또한 장승 앞에서 병의 치유를 빌던 풍습이 있었다.
장승이 7개 사람도 7명으로 각자 기원하고 있다.
간절한 소망과 소원을 얻기 위해선 굽어진 소나무로 된 것이 효험이 있다고 한다

신행길(1890년) 방금 시집으로 가려는 가마를 잡고
친정어머니는 딸에게 무엇인가 자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여자궁도대회(1910)

기생 소릿꾼(1900년) 지금의 가수

기생의 나들이 (1903년) 전속 가마꾼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신랑 신부의 상면(1903) 신랑의 가족들이 호기심으로 신부를 보고 있으나
신부의 가족들은 근심이 가득하다.

시집으로 가는 신부(1903) 가마를 탄 신부가 신랑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구한말 결혼식(1903) 떠구지머리를 얹고 큰머리를 튼 후,
떠구지 댕기를 드리우고 큰 비녀를 꽂은 다음,
원삼을 받쳐 입고 혼례를 올리고 있다.
이 부부는 자식을 낳은 후 미국 선교사에 의해 결혼식을 거행하고 있다.

마을 장승(1900) 장승은 2개 세우는 법인데
마을 입구에 장승하나가 외로이 서있고 마을로 통과하는 전신주가 보인다.

다리미질(1900) 다리미질하는 이 여인은 의도적으로 젖가슴을 내놓고 있다.
이는 아들을 낳은 것을 자랑하기 위한 풍속이다.

다듬이질 하는 여인.

키질과 체질(1890) 우리여인들의 생활은 노동에 시달렸으며
곡식을 찧고 키로 까부리며 체질하여 밥과 죽을 쑤었다.

연자매(1900) 연자매는 맷돌을 소가 끌어 돌리게 하는 정미시설이다.

맷돌(1904) 콩이나 메밀등을 넣어 갈아주는 수동식 믹서기다.

돗자리 짜는 노인(1900) 돗자리 짜기란 많은 고르랫돌을 매달아 한 가닥씩 엮어 나가는 작업이다

기녀위문(1905) 노일전쟁 당시 기녀들이 일본군 막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뒤쪽 천막에 일장기와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토담쌓기(1905) 나무틀에 돌과 진흙을 혼합해서 쌓고, 사진촬영을 위해 잠시 휴식하고 있다

김개남(1894)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을 이끌고 봉기했다

기중기 도구(1900) 무거운 물체를 끌어올리기 위한 도구로 성벽을 쌓는 돌 운반 역시 이런 방식으로 작업했다

여인의 가리개(1900) 여인이 왕골로 짠 가리개를 쓰고 나들이하다가 양손으로 가리개를 받쳐 외면하고 있다.

널뛰기(1920) 한말 때 여자가 바깥구경을 할 때에는 널을 뛰어 담장밖 세상을 구경했다.

장기(1890) 어린 소년처럼 보이나 초립을 쓴 것으로 보아 이미 장가든 모습이다.

한강여객선(1910)

남대문 전차 대기소(1919) 서울에 전차가 들어오면서
단발령 시행에 실패한 일본은 전차회사 직원들에게 상투를 자르게 했다
서양식 모자를 쓰게 하므로서 전차가 몰고 온 개혁 바람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바꾸어 놓고,
운전수는 강제로 일본식 제복을 입혔다. 백립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순헌(엄비)왕비 국상 시기이다.

서울의 전차(1903)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워크의 한성전기회사에 의해
1898년 12월 전기궤도 부설공사가 완공되었다.
준공 직후 소아 사고로 전차를 불태운 사건이 있었지만
각지로부터 전차를 타보기위해 서울로 몰려왔다.
정원은 40명이고, 중앙에는 양반이 이용하던 특실이 있었다.

마님 나들이(1907) 가마꾼이 마님을 태우고 포목점 거리를 지나고 있다

마포 나루터(1910) 많은 새우젖 장수가 있고 상권이 모여있는 선착장 주변이다.
서울도성까지 얼마 안떨어져 항상 많은 물량이 거래되고 인천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용산-인천 배삯은 상등은 2원 하등은 70전이며 증기선이 운항되었다.

경인선 기차(1910) 기차를 타보기 위해 승객들이 객차에 오르느라 소란을 빚고 있다.
기차를 처음타본 승객들은 기차가 정지하기 전 뛰어내려 사고가 많았다.

소방대 발족(1920) 왼쪽 높은 망루에 서울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긴급을 알리는 종이 매달려 있다.

1904년 개화기의 졸업식 도포를 입고 갓을 쓴 두 훈장(선생님)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서있다
언더우드가 설립한 서당.

서당 풍경(1900) 장죽(긴 담뱃대)을 문 근엄한 훈장이 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 왼쪽에 공부를 못해 광에 갇힌 한 학생을 친구가 돌아앉아 위로하고 있다

인천 일어학교(1894) 한국인 교사와 도포입은 학생중앙에 일본인 교사도 보인다.

학동들의 야외학습(1904) 서당밖에 나와 야외학습을 하고 있는 광경.

서당풍경(1909) 훈장이 회초리를 들고 청마루에서 붓글씨를 감독하고 있다.

북간도 서당(1905) 어두운 방에서 플레쉬 없이 촬영한 것이 신기하고
모두 한결같이 눈을 크게 뜨고 있다.

이화학당(1910) 이화학당을 설립한 '서클랜드 부인'은 오른쪽에서 가사실습을 감독하고 있다.
앞줄에 신발이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이 특색

여학교 실습(1910) 대구동산언덕에 있는 선교사 저택에서 실습 나온 신명여학생들이
소년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주고 있다.

초등학교 운동부(1930) 대구 덕산초등학교 학생들이
일본식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뒤 기념 촬영중
2006.03.01 19:39:53
성현님 ~~~
잘 감상 했습니다
제가 5학년때에 외가를 갔는데 그곳에 사는 내 나이 또래
친척 들은 저와 놀다가도 서당엘 가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따라 갔던 생각이 나는군요
그때가 1958년 쯤이였죠 자유당이 힘줄때이니깐~~~
그곳이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 신곡동 이란곳이였죠
그땐 그 동래는 모두 버들 유씨댁이 옹기 종기 살고 계셔서 무척 그 시골이
제 어린 나이엔 환상이였습니다 그 때쯤 친척 오빠 결혼식에 가게 되었죠
그당시 족두리 쓰고 시집온 친척 올케 신혼밤을 차릴 그방에서
우리 또래는 민화투를 치고 즐거워 했는데 그때 신부는 내내 족두리 쓰고
연지 곤지 찍은 아주 얌전한 모습으로 신랑을 기다리지만 그때 신랑은 마루에서 매달리고
잔치는 마지막을 한없이 흥겹게 친척들에 웃음 소리로 온 시골 동래를 덮었고
덩달아 철없는 우리들도 술취한 분위기에 젖었는데
우리 이종사촌이 저랑 동갑인데 [인고 65 ] 소변이 보고 싶다고 하면서
같이 측간에 가 달라는것이였죠 그당시 그 시골은 전기가 없었기에 도시에 우리들은
시골에 가면 밤에 화장실 볼일이 큰 문제 였죠 허나 여러명중에서 아무도
측간에 동행하여주질 않으니깐 신부가 해온 요강에다 볼일을 보라고 철부지들이
말을하기도 했고 한쪽에선 않된다고 하고 하다가 싸기 직전에 그 인고 출신
이종 사촌이 족두리 쓴 신부에게 물었더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부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면서 허락을 했습죠 또래가 5명쯤 같이 화토를
치고 음식이 귀하던 시절 먹거리 10000고 정말 신나는 축제였죠 나중에 그 이종 사촌은
어른들께 구중을 들었지만 50여년전에 그추억을 상기케 하는 즐거운 사진을 감상
잘했습니다 우리 그 이종 사촌도 인일 6회와 결혼을 했고 현제 광운 전자대학 교수이자
박사님 이시죠 지금도 기끔 그 야기를 해서 옛날을 즐겁게 회상하죠 그런데 그날 야밤이
더 즐거웠습니다 어른들이 그 방을 몰래 훔쳐보는 그 모습들을 우리들도 따라 했으니깐요
제가 한국을 방문 했을때 그 이종 사촌이 저를 그 시골 안내를 해주어 갔었습니다
허나 ~~~그때 그 10000던 유씨 일가는 도시로 다 떠나고 두가정 만 남았는데 바로
1958년도에 결혼했다던 오빠 내외는 돌아 가시고 그 분에 노 어머님이 그래도 건강하게
90이 너무셨으나 우리들을 모두 기억 하셔서 부둥켜 않고 울었습죠
그 잔치때 인절미는 뜨거운 찹쌀을 절구에다 쪄 만드는 과정을 서서 구경하던 흥미로움
그땐 힘이 좋은 남자분들이 그일을 했고 광에서 연실 신기한 음식들이 나오고~~~
아! 옛날이여 눈 감았다 뜨니 50여년이 휘 갔네요 그때 잔치가 끝나고 인천으로 돌아
오는길에 시골에서 문산까지 버스를 탓는데 아 !글쎄 그 버스에다 주신 각종 귀한
음식 보다리를 제가 두고 내려서 또래 아이들 하고 다시 시골을 들어가서 울면서 말씀
드렸더니 다시 싸주셧으나 먼저것 보다는 훨신 못했지만 그래도 저희 친정 할머님께서
그 음식을 받으시곤 감사하다 감사하다 갖고 오느라고 수고했다 칭찬이 하늘에 닿았던
추억에~~~ 맘이 흥건한 밤 지금 여기는 삼일절 새벽 2시 반경이네요
내일을 위하여 안녕~~~ 인고인 담에 들러 볼께요 ~~~
잘 감상 했습니다
제가 5학년때에 외가를 갔는데 그곳에 사는 내 나이 또래
친척 들은 저와 놀다가도 서당엘 가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따라 갔던 생각이 나는군요
그때가 1958년 쯤이였죠 자유당이 힘줄때이니깐~~~
그곳이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 신곡동 이란곳이였죠
그땐 그 동래는 모두 버들 유씨댁이 옹기 종기 살고 계셔서 무척 그 시골이
제 어린 나이엔 환상이였습니다 그 때쯤 친척 오빠 결혼식에 가게 되었죠
그당시 족두리 쓰고 시집온 친척 올케 신혼밤을 차릴 그방에서
우리 또래는 민화투를 치고 즐거워 했는데 그때 신부는 내내 족두리 쓰고
연지 곤지 찍은 아주 얌전한 모습으로 신랑을 기다리지만 그때 신랑은 마루에서 매달리고
잔치는 마지막을 한없이 흥겹게 친척들에 웃음 소리로 온 시골 동래를 덮었고
덩달아 철없는 우리들도 술취한 분위기에 젖었는데
우리 이종사촌이 저랑 동갑인데 [인고 65 ] 소변이 보고 싶다고 하면서
같이 측간에 가 달라는것이였죠 그당시 그 시골은 전기가 없었기에 도시에 우리들은
시골에 가면 밤에 화장실 볼일이 큰 문제 였죠 허나 여러명중에서 아무도
측간에 동행하여주질 않으니깐 신부가 해온 요강에다 볼일을 보라고 철부지들이
말을하기도 했고 한쪽에선 않된다고 하고 하다가 싸기 직전에 그 인고 출신
이종 사촌이 족두리 쓴 신부에게 물었더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부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면서 허락을 했습죠 또래가 5명쯤 같이 화토를
치고 음식이 귀하던 시절 먹거리 10000고 정말 신나는 축제였죠 나중에 그 이종 사촌은
어른들께 구중을 들었지만 50여년전에 그추억을 상기케 하는 즐거운 사진을 감상
잘했습니다 우리 그 이종 사촌도 인일 6회와 결혼을 했고 현제 광운 전자대학 교수이자
박사님 이시죠 지금도 기끔 그 야기를 해서 옛날을 즐겁게 회상하죠 그런데 그날 야밤이
더 즐거웠습니다 어른들이 그 방을 몰래 훔쳐보는 그 모습들을 우리들도 따라 했으니깐요
제가 한국을 방문 했을때 그 이종 사촌이 저를 그 시골 안내를 해주어 갔었습니다
허나 ~~~그때 그 10000던 유씨 일가는 도시로 다 떠나고 두가정 만 남았는데 바로
1958년도에 결혼했다던 오빠 내외는 돌아 가시고 그 분에 노 어머님이 그래도 건강하게
90이 너무셨으나 우리들을 모두 기억 하셔서 부둥켜 않고 울었습죠
그 잔치때 인절미는 뜨거운 찹쌀을 절구에다 쪄 만드는 과정을 서서 구경하던 흥미로움
그땐 힘이 좋은 남자분들이 그일을 했고 광에서 연실 신기한 음식들이 나오고~~~
아! 옛날이여 눈 감았다 뜨니 50여년이 휘 갔네요 그때 잔치가 끝나고 인천으로 돌아
오는길에 시골에서 문산까지 버스를 탓는데 아 !글쎄 그 버스에다 주신 각종 귀한
음식 보다리를 제가 두고 내려서 또래 아이들 하고 다시 시골을 들어가서 울면서 말씀
드렸더니 다시 싸주셧으나 먼저것 보다는 훨신 못했지만 그래도 저희 친정 할머님께서
그 음식을 받으시곤 감사하다 감사하다 갖고 오느라고 수고했다 칭찬이 하늘에 닿았던
추억에~~~ 맘이 흥건한 밤 지금 여기는 삼일절 새벽 2시 반경이네요
내일을 위하여 안녕~~~ 인고인 담에 들러 볼께요 ~~~
2006.03.01 21:11:02
선배님 역시!
저도 향수에 젖어드네요.글을 참 맜있게 쓰시네요..이런글들은 나중 책을 엮을 때 좋겠어요.
엊그제 인고홈 좀 살리자고 외쳤드니 .오늘 65회 정영구님이 출석까지 부르셨어요.
궁여지책으로 출석부까지 만들었습니다.글 중에 인고 인일커플이 발견되니 기분 좋네요.홈만 활발해지면
많이 찾을 수 있을거 같아요. 71회도 인일 13회와 커플인걸 며칠전 알았구요.
미국에 사시는 동문님들도 들어오기두 하네요.
인고통신이었습니다.
이뻐해주세용::p
저도 향수에 젖어드네요.글을 참 맜있게 쓰시네요..이런글들은 나중 책을 엮을 때 좋겠어요.
엊그제 인고홈 좀 살리자고 외쳤드니 .오늘 65회 정영구님이 출석까지 부르셨어요.
궁여지책으로 출석부까지 만들었습니다.글 중에 인고 인일커플이 발견되니 기분 좋네요.홈만 활발해지면
많이 찾을 수 있을거 같아요. 71회도 인일 13회와 커플인걸 며칠전 알았구요.
미국에 사시는 동문님들도 들어오기두 하네요.
인고통신이었습니다.
이뻐해주세용::p
2006.03.02 17:37:47
아마도 심심치 않게 있을께요
혹시 시애틀에 동문은? 사실 사이 사이 계시다는 소문은 들었죠~~~
맛 있으면 드시기 바람 ㅎㅎㅎ
내가 요즘 엄청 바쁘니 시간 나면 나에 이종 사촌한테 멜 보내서
인고인에 들어 가도록 노력 해 드립죠 안녕
혹시 시애틀에 동문은? 사실 사이 사이 계시다는 소문은 들었죠~~~
맛 있으면 드시기 바람 ㅎㅎㅎ
내가 요즘 엄청 바쁘니 시간 나면 나에 이종 사촌한테 멜 보내서
인고인에 들어 가도록 노력 해 드립죠 안녕
2006.03.02 19:57:40
이성현님~ 귀중한 사진들이에요. 백년 전이라는데...똘망똘망, 모두 잘 생긴 모습들입니다.
백년전...우린 얼마나 세계에서 외진 나라였습니까? 수탈당하고...겁먹고...
요즘 동계오림픽 7위 후.... 참 이 나라 대단한 나라다는 생각이 더해집니다. 그 큰 중국, 그 오랜 투자와 교육이 있는 일본... 그 사이의 이 조그만 나라가!! 아마 우리가 노인이 되었을 땐 대한민국은 정말 세계에 우뚝 서있을 거라고 생각되고 인일인도 인고인도 물론 제고인도....모두 다 큰 역활을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전 대전의 배재대학교 교수로 산학연 컨소시엄 전국 부회장을 했습니다. 작년 산학연 대통령상을 받은 분이....인고인으로 대덕 기계연구소에 계시는 최박사님이셨습니다)::) 저희 총동피에 귀중한 자료를 올려주셔서...고맙습니다.
백년전...우린 얼마나 세계에서 외진 나라였습니까? 수탈당하고...겁먹고...
요즘 동계오림픽 7위 후.... 참 이 나라 대단한 나라다는 생각이 더해집니다. 그 큰 중국, 그 오랜 투자와 교육이 있는 일본... 그 사이의 이 조그만 나라가!! 아마 우리가 노인이 되었을 땐 대한민국은 정말 세계에 우뚝 서있을 거라고 생각되고 인일인도 인고인도 물론 제고인도....모두 다 큰 역활을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전 대전의 배재대학교 교수로 산학연 컨소시엄 전국 부회장을 했습니다. 작년 산학연 대통령상을 받은 분이....인고인으로 대덕 기계연구소에 계시는 최박사님이셨습니다)::) 저희 총동피에 귀중한 자료를 올려주셔서...고맙습니다.
2006.03.04 16:42:20
이성현님~
여기 들어와서 저 할아버지의 너무도 선한 웃음을 보고 그냥 나가는 사람은 어지간히 강심장일것 같으네요.
좋은 취미가 많으신것 같아요.
어릴적 시골에서 고모의 결혼식날 창호지 뚫고 첫날밤 구경했던 기억~
방아로 쌀 찧는것 구경하던 기억~
뒷간에 종이가 귀해서 지프라기가 놓여있어 어떻하나 한숨짓던 기억~
술래잡기 할때 볏집 속에 숨었다가 쥐가 나와 혼비백산 했던 기억~
오랫만에 아주 어릴적 추억을 떠올려 보았네요.
귀한 사진 잘 봤읍니다.
여기 들어와서 저 할아버지의 너무도 선한 웃음을 보고 그냥 나가는 사람은 어지간히 강심장일것 같으네요.
좋은 취미가 많으신것 같아요.
어릴적 시골에서 고모의 결혼식날 창호지 뚫고 첫날밤 구경했던 기억~
방아로 쌀 찧는것 구경하던 기억~
뒷간에 종이가 귀해서 지프라기가 놓여있어 어떻하나 한숨짓던 기억~
술래잡기 할때 볏집 속에 숨었다가 쥐가 나와 혼비백산 했던 기억~
오랫만에 아주 어릴적 추억을 떠올려 보았네요.
귀한 사진 잘 봤읍니다.
2006.03.04 17:51:23
박화림 선배님 감사합니다.역시 선배님들이 포용력이 크시니까요....인일로 환산하면 8회입니다.
언제쯤 인고에도 놀러들 오실까.희망을 갖고 살지요(:y)(:f)
언제쯤 인고에도 놀러들 오실까.희망을 갖고 살지요(:y)(:f)
2006.03.05 08:44:21
이래저래 이 성현님과는 인연이 있나보네요.
저희집 돌림자가 명자여서 제이름이 명희가 될건데, 사연이 있어서 바뀌었죠.
(이름탓에 좀 힘들게 살았다면 뻥친다 소리 들을래나?)
지금 제 사촌이 명희죠.
귀한사진 모으시느라 시간품 파셨겠네요.
앉아서 편히 감상하고 아련히 옛 추억도 떠올려 봅니다.
초등때 신흥동에 살았는데 외가쪽 친척 할아버지댁이 개건너(지금 가좌동 근처인가?)
였었는데, 방학이면 거기도 시골이라고 여행(?)을 가죠.
밤에 뒷간에 갈생각에 겁이나 물먹기가 망설이던일,
멍석에 누워 쑥연기맡으며 할머니, 아주머니들의 구수한 이야기속에 잠들던 기억,
길에 다니는 소달구지의 소만 보았던 내가 친척집 소이기에 관심갖고 보니,
소의 눈이 얼마나 순하고 이쁘던지요.
어려서 이기도 했지만 도시에서 낳고 자라 벼와 보리를 구별 못 하는 우리들에게
" 밥이 어떻게 해서 목구멍에 넘어 가는지 알아야 한다" 고 엄하게 말씀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
밥상에 한알의 밥알도 흘리는 것을 용납안하셨죠.
주일 아침에 귀하고 소중한 시간 나누어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꾸뻑.
저희집 돌림자가 명자여서 제이름이 명희가 될건데, 사연이 있어서 바뀌었죠.
(이름탓에 좀 힘들게 살았다면 뻥친다 소리 들을래나?)
지금 제 사촌이 명희죠.
귀한사진 모으시느라 시간품 파셨겠네요.
앉아서 편히 감상하고 아련히 옛 추억도 떠올려 봅니다.
초등때 신흥동에 살았는데 외가쪽 친척 할아버지댁이 개건너(지금 가좌동 근처인가?)
였었는데, 방학이면 거기도 시골이라고 여행(?)을 가죠.
밤에 뒷간에 갈생각에 겁이나 물먹기가 망설이던일,
멍석에 누워 쑥연기맡으며 할머니, 아주머니들의 구수한 이야기속에 잠들던 기억,
길에 다니는 소달구지의 소만 보았던 내가 친척집 소이기에 관심갖고 보니,
소의 눈이 얼마나 순하고 이쁘던지요.
어려서 이기도 했지만 도시에서 낳고 자라 벼와 보리를 구별 못 하는 우리들에게
" 밥이 어떻게 해서 목구멍에 넘어 가는지 알아야 한다" 고 엄하게 말씀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
밥상에 한알의 밥알도 흘리는 것을 용납안하셨죠.
주일 아침에 귀하고 소중한 시간 나누어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꾸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