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가 서동에게 속은 게 아니라 사실은 속은 척만 한 것이었고 결국에는 서동이 선화공주에게 당하여... 그 아들인 의자왕 때에 백제는 망하고 말았다...

<삼국유사>에 보면...

백제의 서동이 신라로 들어와 "서동요"와 같은 고약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신라의 여론을 조작하여 선화공주가 아바마마의 노여움을 사게 하고... 또 신라 궁중에서 억울하게 쫓겨나게 하고서는...

갈 데 없어 방황하는 선화공주를 스토킹하여 도와 주는 척 접근하여 백제 땅으로 유인해서는... 결국 본색을 드러내어 선화공주를 취하여 결혼에 성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백제 서동의 기상천외한 "구애작전"이 대단히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작가 "일연" 스님이 신라 출신인데, 이 이야기를 쓰면서 "신라의 공주가 백제의 서동에게 희롱을 당했다"는 방향으로 글을 쓸 리가 없고....

사실 이 이야기를 끝까지 곰곰이 잘 읽어보면 여자가 당한 이야기인지 남자가 당한 이야기인지 금방 알 수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의 첫머리만 잠깐 보고서는 이 이야기가 "백제 서동의 기발한 승리담"이라고 말한다.

성질 급하게 앞 부분만 읽지 말고, 중간 부분과 뒷 부분까지 읽어 보고 다시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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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30대 무왕 그의 이름은 장이다.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였다. 그녀는 백제 서울 남쪽의 연못 가에 집을 짓고 홀로 살던 중 그 못의 용과 관계하여 무왕 장을 낳았다. 그는 재능도 비상하였고 도량도 넓고 깊어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 생활했는데. 사람들이 거기에 착안하여 그의 이름을 서동이라고 불렀다.

서동은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왔다. 서울의 마을 아이들에게 그는 마를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호감을 가지고 그를 따랐다. 서동은 마침내 한 편의 동요를 지었다. 그리고는 마을의 그 아이들을 꾀어, 자기가 지은 동요를 무르고 다니게 했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을 몰래 밤에 안고 간다."

동요는 서울의 거리에서 거리로 마을 아이들의 입으로 번져나가 드디어는 대궐까지 알려졌다. 백관들은 동요의 내용을 사실로 믿고서 선화공주의 부정한 행실을 극력 탄핵하여 공주를 먼 시골로 유배시키도록 했다. 누명을 쓰고 공주가 유배의 길을 떠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선화공주가 유배지로 가는 길, 서동이 도중에 나타나 공주를 맞았다. 그리고는 앞으로 공주를 모시어 호위해 가겠다고 나섰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어떤 정체의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어쩐지 미덥고 즐거웠다. 이리하여 서동은 공주를 수행하게 되었고, 그리고 둘은 몰래 통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공주는 서동이란 이름을 알고서 그 동요시가 사실로 실현되어 나타남을 알았다. 그리고 함께 백제로 왔다.

선화공주가 그 모후가 주던 금을 꺼내어 놓고 생활을 계획하려 하자 서동은 큰소리로 웃어젖히며 물었다.

"이게 무슨 물건이오?"
"이건 황금입니다. 평생 동안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공주의 대답을 듣고 서동은 말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 이런 것들이 흙처럼 쌓여 있소."

공주는 듣고서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세상에서 지극히 귀중한 보물입니다. 그대가 지금 금의 소재를 아신다면 그 보물을 우리 부모님 계시는 신라 궁전으로 실어 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서동은 까짓거 그러자고 했다.

이래서 그 황금을 모아서 둔덕만큼이나 쌓아 두고 서동과 공주는 용화산(지금의 익산 미륵산)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에게로 가서 황금 수송의 방법을 여쭈어 보았다.

지명법사는 "내가 신통력으로 보낼 수 있다. 금을 가져 오너라" 라 하니, 선화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지명법사에게 맡겼다. 법사는 신통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그 황금과 그리고 공주의 편지를 신라의 궁중에 옮겨다 놓았다.

갑자기 엄청난 황금을 선물 받은 진평왕은 그 신묘한 변통이 경이로와, 무척 존경하게 되어 항상 글을 띄워 안부를 묻곤 했다.

서동은 이 황금으로 말미암아 신라와 백제의 인심을 잡게 되어 결국에는 백제 왕의 아들로 들어가서 나중에는 왕위를 물려받아 백제의 "무왕"이 되었다.

하루는 서동, 즉 무왕이 왕비 선화와 함께 사자사로 거동하는 길에 용화산 아래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불상 셋이 못 속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했다.
왕비 선화는 무왕에게 말하였다. "그곳에다 큰 가람을 세우는 것이 진실로 소원이라"고.

무왕은 왕비 선화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지명법사에게 그 못을 메울 일을 여쭈었다. 신통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서 평지로 만들어 주니 그 곳에다 미륵불상 셋과 그것에 부수되는 회전. 탑. 낭무 들을 각각 세우고 이름하여 "미륵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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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는 백제로 가자마자 서동을 꼬여서 백제의 황금을 신라로 빼돌렸고....
백제 왕비가 되어서는 백제 한 복판에 "미래의 소원을 들어주는" 미륵사를 만들도록 했다.
원래 불교에서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은 현재불이지만, 미륵불은 미래불에 속한다는데...
사람들은 먼 미래의 소원을 빌 때에는 언제나 미륵불을 찾곤 한다.

신라 공주 출신인 백제 왕비가 발원하여 만든 이 미륵사에서 "신라의 미래"를 기원했는지, "백제의 미래"를 빌었는지 정확히 기록하여 놓은 곳은 없으나....

무왕과 선화의 아들인 의자왕 때에 황산벌에서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계백 장군이 대패한 후에, 의자왕이 당나라의 측천무후 앞에 끌려 가서 무릎을 꿇는 것으로 백제란 나라는 지구상에 사라지고 마는데....

연약해 보이기만 했던 신라의 선화공주가 백제로 들어가서 신라를 위해서 얼마나 큰 공을 세운 것인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명색이 신라의 공주인데 그리 쉽게 호락호락 당했겠는가 하는 것이.... <삼국유사> 작가였던 신라출신 "일연" 스님의 집필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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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백제 무왕과 신라 공주 사이에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을까.... >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보건대, 정답은 거의 "아니다" 쪽으로 나온다.
왜냐 하면 어느 기록에도 신라 진평왕에게 셋째 딸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옛날에 백제 동성왕이 신라 왕족의 딸과 결혼한 사실을 두고,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의 부모, 즉 무왕과 연결시켜서 <삼국유사> 작가가 신라의 최종 승리를 찬양하고자 꾸민 <전설> 또는 <동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백제 무왕 때 신라와 사이는 좋았을까...>

정말로 백제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사위였다면 <삼국유사>의 서동요 이야기처럼 황금도 가져다 주고 그랬을텐데, 실제는 신라와 전쟁을 할 때마다 연전연승을 거두어서 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너무 신라를 골탕 먹여서 나중에 신라에서 선화공주를 아예 호적에서 삭제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사실 그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사실이야 어쨌든 간에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은 신라의 승리를 위하여 신라의 공주가 무슨 일이든 했을 것이라는 하나의 희망 사항을 마치 전설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로 꾸몄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보다 확실한 것은 나중에 저승에서 만나서 찬찬히 여쭈어 보고 사실 규명을 해 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백제 무왕이 되는 서동 즉 장이는 누구의 아들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모두 부여선, 즉 법왕의 아들이라 되어 있으나 전후 상황으로 보면 위덕왕의 아들일 가능성도 만만치 않다.

위덕왕이 죽은 후에 그 동생이 왕위에 올라 만 1년만에 죽었고(혜왕), 그 혜왕의 아들 부여선이 왕위에 올랐으나 또 1년만에 죽고(법왕), 그 뒤에 무왕이 즉위했는데, 그 재위 기간이 무려 41년이었다.

위덕왕의 장남 아좌태자 -- 그는 중간에 어찌 되었을까? 일본 쇼토쿠[聖德] 태자의 과외 교사가 필요하다고 하여 백제 조정에서는 아좌태자를 추천하여 보냈는데, 그 사이에 위덕왕이 죽고, 귀국하는 아좌태자를 사촌동생 부여선이 죽이고서는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1년만에 죽어 버려 부여선이 임금이 되었으나 그 역시 1년만에 죽어 버렸으니....
--- 참, 아좌태자가 그려 준 일본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는 1300년 이상 일본의 국보로 특별관리되어 오다가 1949년 호류사의 화재로 불타고 말았다고 한다.---

위덕왕 죽은 후 매년 임금이 죽고 또 죽고 한 것으로 보아 엄청 내부의 전쟁이 치열했던 것 같으며... 무왕 때부터 안정을 되찾은 것으로 보면...

서동, 즉 장이가 원래부터 위덕왕의 자식이었거나, 아니면 정치세력들의 상호협상과정에서 부여선(법왕)의 양자로 입적시켰는지..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장이 즉 무왕의 진짜 아버지는 위덕왕이며, 일본 갔다 오다 죽은 아좌태자의 막내 동생일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

원래 핏줄이 그러니까 "힘을 다시 회복한 위덕왕 진영"이 2년간의 깜짝쇼로 부여선 부자의 세력이 다 죽고 난 뒤, 더 이상의 반대세력 없이 41년 간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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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실제 사실이야 어떻게 되었건 간에...

백제 무왕을 농락한 신라 선화공주의 무용담은 비록 꾸민 이야기라 하더라도...
당시의 여자들 힘은 사실 그 이상으로 강하였으며, 거의 천하무적 수준이었다r 한다.

일단 신라 최초의 화랑이 여자였다는 사실은 별로 놀랄 만한 일도 아니고,

진평왕의 둘째 딸 선덕여왕이 처녀의 몸으로 그 이름을 국제적으로 드날린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당 태종이 신라 선덕여왕이 아직 미혼인 걸 알고 모란 그림으로 놀리는 걸 보고 신라 선덕여왕의 존재를 알고서 엄청 부러워 했던 당 태종의 어린 애첩이, 당 태종이 죽자 그 아들인 고종을 유혹하여 왕후가 되는가 했더니....

신라 선덕여왕이 죽고 또 다른 여자 진덕여왕이 신라의 임금이 되는 것을 보고서는 같은 여자로서 당나라의 왕후 자리가 그저 창피하고 창피할 뿐이라는 무(武)씨 성의 한 여인이 있었는데...

기어코 고종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이 통반장 노릇 다 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황제 소리는 못 듣는 처지라 불평을 하더니...

"신라는 여자가 진짜로 왕 자리에 올랐는데, 나라고 못할 것인가" 어쩌고 하다가 자기 아들까지 죽여 버리고 진짜 황제인 "성신황제 측천무후(聖神皇帝 則天武侯)"의 자리에 올라 16년 동안이나 중국을 주물렀다. 황제 즉위 전의 통반장 노릇 다 한 기간까지 합하면 무려 50년이 된다.

그러니까 결국 따지고 보면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의 여자 임금들, 즉 선덕여왕, 진덕여왕 그리고 측천무후의 연합전선을 이기지 못하고 멸망한 셈이다. 선덕여왕의 사촌동생 진덕여왕 때에 신라는 당나라의 연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여 당나라와 완전히 코드를 맞추었다.

우리 나라 삼국 시대의 종말은 백제 의자왕이 당나라 측천무후 앞에 끌려 가서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리며 조그만 땅 하나를 하사 받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아! 불쌍한 의자왕이여! 그 당시 신라 임금은 선덕여왕 언니 천명공주의 아들인 무열왕 김춘추였다.
--- <삼국유사>에는 진평왕 딸에 선덕여왕이 언니로 되어 있으나,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가 언니로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선덕여왕이 임금이 되었으니까 이름을 먼저 올리지 않았는가 짐작된다.---

사실 백제 의자왕은 그리 부패한 임금이 아니었는데, 신라 사람들이 나중에 의자왕을 나쁜 임금이라고 기록했다고 하는 학설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삼국시대 종말의 마무리는.... 당 태종이 죽으면서 "고구려는 절대 치지 마라. 나처럼 다친다" 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측천무후가 그 유언을 무시하고 신라의 여왕들과 어쩌고 하더니 그냥 고구려를 쳐 버렸다. 실제 고구려가 망한 것은 신라의 여왕들이 죽고 난 뒤였으나,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 편성은 그 전부터 준비되어 왔으니...

그러니까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 두 나라의 치맛바람 태풍에 사라진 나라들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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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이 이와 같이 여자들이 더 힘을 쓰는 때였으니....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쓸 때, 선덕여왕의 동생 선화공주를 만들어서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의 어머니로 설정해 놓은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을 것 같다.

이 선화공주 이야기가... 신라의 승리 찬양을 위한 작품일까...여자의 승리 찬양을 위한 작품일까...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역시 역사책이든 창작설화이든 그것은 모두 "이긴 나라, 이긴 사람들의 낙서장"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웬지 조금은 씁쓸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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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