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임시정부와 한양의 점령군 임금에다 의주로 도망간 진짜 임금 선조까지 합하면 임진왜란 때에 실질적으로 조선을 통치하는 통치자는 모두 세 명이었다고 한다.

선조가 겁먹고 압록강 넘어가겠다는 걸 겨우 만류하여 의주에다 거처를 마련해 주기는 했지만, 임금 업무를 그만 두겠다는 것까지는 완전히 말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세자였던 광해군에게 많은 분야의 결재권을 이양해 주었으므로 업무에 따라서는 광해군이 임금 업무를 대행했던 부분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족이 버리고 떠난 한양성에는 19세의 우끼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평양 이남의 조선 땅을 다스리는 새로운 임금으로 등장하였다. 새로운 왕비로 간택된 여인은 경상도 창녕에서 데리고 온 성씨(成氏) 처녀였다.

이 우끼다 히데이에 신임 조선국왕은 일본의 최고 권력자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양자였다. 어차피 일본의 천황이란 사람도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으니, 조선에 허수아비 하나 더 둔다고 해서 별로 대단할 것도 문제될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참,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성씨가 다른 것이 이상하다 할 수 있으나, 성씨에 대한 관념이 일본과 조선이 서로 달라 일본에서는 아무 이상할 것도 없는 평범한 풍습의 하나일 따름이다.

임진년 1592년 4월에 부산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켰을 때 총사령관이 19세의 우끼다였으니, 일본측에서 볼 때에 이 우끼다가 점령지 한양성의 새 임금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중에 한양성이 수복되고, 광해군에게 주었던 결재권까지 선조가 도로 가져 와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부분을 가볍게 다루려 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사실 대단히 큰 사건이었다. 이 부분을 세세히 다루는 것 자체가 선조 임금의 권위를 크게 떨어트리는 일이 될 수 있기에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은 언제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때의 수많은 사건들 중에는 우리가 그냥 대충 넘어가고 끝낸 상황들이 제법 많다.

우선 임진왜란과 천주교 문제가 그렇다.
그 때 가장 많은 병력을 데리고 온 제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아고스띠뉴"라는 세례명을 가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그의 딸 "마리아"는 대마도 도주의 며느리였다. 그리고 제1군 소속 규슈 지방 출신의 사병들의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였으며, 이들은 조선을 천주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적어도 이들에게는 이 전쟁이 "조선침략"이 아니라 천주교 영역 확장을 위한 "성전(聖戰)"으로 간주되었다.

일본의 최고 권력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 지방을 연전에 정복하긴 했지만, 포르투갈 신부들의 꼬임에 넘어간 규슈 지방 주민들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들었다. 육식을 잘 않는 일본 땅에서 포르투갈 신부들이 무지막지하게 소를 잡아다가 먹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일본의 사찰이나 신사(神社)를 "사탄" 어쩌고 하면서 마구 부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들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제1군 선봉으로 내세운 것에는 조선에 가서 죽든지 살든지 그것은 알아서 할 일이고 일본 땅에서 좀 안 보였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바탕에 깊이 깔려 있었다.

당시 토요토미가 얻은 첩보 중에는 포르투갈 군대가 일본으로 쳐들어 와서 일본을 점령한다는 것도 있었다. 사실 그럴 수도 있었다. 조선의 이순신 장군 덕분에 일본의 천주교도가 엄청나게 많이 죽어 주었고, 포르투갈 신부님을 도와 주는 내부 세력들이 힘을 잃었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시기를 놓쳤으면 일본도 브라질이나 필리핀, 말레이지아처럼 포르투갈 상인들과 군인들에게 점령 당했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컬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국왕과 로마 교황이 짜고 대서양 어느 한 지점을 중심으로 동쪽은 포르투갈이 다 먹고, 서쪽은 스페인이 다 먹기로 한 조약이 있었다. 그래서 브라질을 제외한 남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이 다 먹었고, 이들은 아직도 다들 스페인어를 국어로 쓰고 있으며, 여기에서 나오는 모든 헌금은 로마 교황에게로 바쳐졌다. 로마 교황은 이들의 점령을 인정해 주는 대신에 천주교 포교권도 함께 주었고, 헌금 납부의 의무도 이행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15세기에 유럽에서 만든 지도를 보면 아프리카와 인도,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우리 조선까지도 포르투갈령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 있다.

그러나 로마 교황과의 불화로 헌금을 교황에게 내지 않는 영국은 이 지도가 마음에 안 들었고, 대서양 해적과 협조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나눠먹기식 계획을 자꾸 방해하곤 하였다. 나중에는 네덜란드, 프랑스까지 합세하여 그 방해전술에 동참하였는데, 덕분에 신대륙을 비롯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 정복의 군웅할거 시대가 오게 된다.

어쨌든 임진왜란의 실패로 세력이 크게 위축된 일본 천주교도들은 나중에 일본 내전에서도 크게 패하여 포르투갈의 상선을 타고 중국의 마카오로 망명하게 된다.

그래서 지금의 마카오 주민들은 원래 중국의 원주민들과 포르투갈인, 그리고 포르투갈 사람들이 데리고 온 말레이인과 일본인까지 합쳐져서 4개 종족의 혼혈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전세계 어느 나라 사람과도 닮지 않은 독특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각종 미인대회에서 입상하는 일이 거의 없다.

어쨌든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들 중 천주교도들이 주축이었던 제1군 소속 사병들은 나름대로 군기를 엄정히 하여 조선 백성들에게 인심을 사려고 했던 노력도 있었다. 점령지에서 유부녀 겁탈은 재판 없이 바로 사형을 시킨다는 등의 엄한 규율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당시에 북쪽에서 내려왔던 명나라 군인들은 유부녀 겁탈을 하고서도 오히려 더 큰소리를 쳤다는데, 제1군의 이러한 점은 임진왜란 중에서도 불행중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일본군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고, 제1군만 그랬다.

이 때 이순신 장군 덕분에 일본군이 졌길래 망정이지,
일본이 그 때 이겼다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포르투갈 꼬엘류 신부의 약속대로 조선은 천주교의 나라가 되고 브라질처럼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럼 축구 실력은 지금보다 좀 나아질 수 있으려나?

어쨌든 임진왜란 실패 이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소원대로 일본에서 그 많던 천주교 세력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40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의 예수교 세력은 우리나라의 10%도 안 된다.

임진왜란 때 조선 상륙에 실패한 천주교는 그로부터 약 200년 뒤에 신부님, 목사님, 장사꾼에다 군대까지  합세하여 기어코 다시 들어와서는 드디어 소원성취를 하게 되었고, 임진왜란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포르투갈 꼬엘류 신부에게 한 "천주교 조선진출" 약속이 뒤늦게 실현된 셈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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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임진왜란 중 바로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주기생 논개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래 논개는 전라도 여자인데,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재혼하여 가면서 논개를 외삼촌에게 맡겼는데...
외삼촌이 논개를 장성의 어떤 집 민며느리로 보내 버렸고..(민며느리는 처음에 일만 시킨다)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남편이라는 아이가 물놀이 갔다가 죽어 버렸는데, 그 집에서 계속 붙들어두고 일만 시키자, 나중에 친엄마가 알고 논개를 도망시켰고, 남자 집에서는 장성 사또에게 고발을 하게 된다.

장성 사또가 보니 사정이 딱하여 논개를 무죄 방면하자, 논개 엄마는 장성 사또에게 첩으로라도 데려가 달라고 간청하여 논개는 사또의 첩이 되는데...

임진왜란 막판에 진주성으로 전근 간 남편이 진주성 마지막 전투에서 그만 전사하고 만다. 20세를 갓 넘은 나이에 벌써 남편을 둘이나 잃은 논개는 "에라 죽자, 근데 그냥 죽을 수야 없지" 하고 일본군 접대 만찬에 참가할 기생 명부에 이름을 올려 놓고는 바로 그 날 술 취한 일본군 장수를 껴안고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때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그 장소는 강물 깊이가 1 미터 안팎에 불과하다. 그 물에 빠져 죽었으니 그 때 그 일본 장수가 술을 좀 많이 먹긴 먹은 모양이다.

논개의 성씨는 "신안 주씨(朱氏)"였다.
논개는 처음부터 기생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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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그 때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젠 이걸로 전투는 끝이고, 바로 내일이면 토사구팽 당할 것이 뻔한데...

마침 조총도 한 방 맞았겠다, 아들과 조카에게 "야, 나 죽었다 그래..." 하며 죽은 척 했고..
한참 지나서 전투가 끝난 뒤에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그러셔서 발표를 안했다" 는 등 아들과 조카가 둘러 댔다는 것이다. 아들 쪽에서 "우리 아버님 돌아가셨다"는데 누가 진짜냐 정말이냐 따질 수 있었겠는가?

이순신 장군이 조총을 그 때 처음 맞아 본 것도 아니고, 당시 조총의 위력으로 보아 바다 전투에서는 조총 따위로 죽기까지 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는 것이 사실이고.. 여하튼 당시에 의문 사항이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다고 발표가 되고... 산소를 만든지 15년 뒤에 장군의 산소를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는 기록이 덕수 이씨 족보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처음에 장례를 지내고 그 때 묘를 만든 것은 가짜이고... 15년 뒤 장례를 지내고 묘를 쓴 때가  정말로 장군이 돌아가신 날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말이 상당히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하는데.... 정말로 어느 것이 진실인지 현재로서는 참으로 알기 어려운 노릇이다.

하여튼 이순신 장군이 기막히게 좋은 시기에 전사 발표가 되는 통에 이순신 장군의 후손들은 1등공신의 후예라는 명예와 함께 백 년 가까이 벼슬 걱정은 않고 지냈다고 한다. 까딱 잘못했으면 전쟁 후 이 핑계 저 핑계로 역모로 몰려서 떼죽음 당할 수도 있었는데... 참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과거사 밝히기 차원에서 정말 그 때 전사했는지 아닌지를  제대로 밝혀 주어야 하는 건지 아닌지 심히 혼란스럽다. 인간만사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말 미묘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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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후 벌써 400년....

강한 자만 숭배하는 일본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을 엄청나게 숭배하여 한류 바람을 일으켰고.
그걸 본 따서 이순신 장군을 숭배하여 현충사를 복원한 박정희 대통령은 친일파가 확실하니..
현충사는 물론이고 여기저기 남긴 박대통령 글씨도 모두모두 마음에 안 드니 없애 버리자...

하는 논리가 도처에서 들리고 있는 이 현실이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다.

과거사를 파헤쳐서 덕을 본 사람도 가끔 있기는 있다.

임진왜란 첫날 아침에 전사한 부산첨사 "정 발"이라는 분은 당시에 잽싸게 도망간 어느 잘난 부사님의 보고서 한 장 때문에 10년 가까이 "싸우지도 않고 바로 성을 내준 역적"으로 되어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일본측 사절단으로 온 승려 겐소[玄蘇] 대사의 "가장 힘든 전투가 부산 전투였다"라는 과거사 밝히기 증언 한 마디로 순식간에 "공신"으로 둔갑한 일이 있었다.

이렇게 "과거사 밝히기"가 억울한 사람 구명하여 주는 데에 더많이 활용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한번 해 본다... 친일파 중에서도 "토지"의 "서희"처럼 독립군의 자금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 사람도 엄청 많기 때문이다.... 옛날 삼국지의 조조는 내부 첩자의 기록들을 한꺼번에 다 불태워 버리기도 하였다는데, 조조가 과연 멍청해서 그랬을까? 살다 보면 정말 모를 일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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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등학교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