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정말로 상당히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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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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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 진달래꽃 - 7.5조 - 민요조 전통시 ...........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종의 공식 같은 것이지요.
1924년에 지어져서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명시 중의 명시처럼 되어 있는 "진달래꽃"...

아직도 많은 국어 참고서나 자습서에 변함없이 기록되어 있는
"7.5조 = 민요조"라는 이 공식은 언제부터 쓰여진 것일까요?

우리 나라의 민요 가락이라면 신라, 고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조선 시대 정도는 7.5조로 된 전통시가가 몇 개 있어 주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나라 전통시가에는 7.5조로 된 노래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어찌하여 "7.5조 = 민요조"라는 말이 생겨 났냐구요?
글쎄요...
정말 모를 일이네요....

7.5조가 우리 나라에 최초로 선을 보인 것은
1908년 최남선이 단행본으로 낸 장편 창가집 "경부철도가"라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우리 나라 7.5조 역사는 아직도 100년이 안 된다는 이야기인데...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이길래 이 7.5조는 나오자 마자 민요조라는 말을 듣게 되었을까요?

네?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빨리 결론만 말하라구요?
답답해 죽겠다구요?

사실, 저도 빨리 말하고 싶지만
너무 빨리 말해 버리면 심장마비 걸릴 분 있을까 봐 걱정이 되어 그렇다구요.
요즈음 하도 놀랄 일이 많아서 무슨 소릴 들어도 끄떡 없다구요?
네, 그렇다면 말씀 드리지요. 저도 좀 안심이 되네요...

이 7.5조가 민요조가 맞기는 맞는데
문제는 그게 우리 나라 민요조가 아니라 일본의 전통민요조라는 점이지요.

일본의 전통 가락인 "와카[和歌]"의 율조가 "5-7-5-7-7"이고,
이보다 조금 단순한 형태인 "하이쿠[俳句]"가 "5-7-5"이니
일본 유학 갔다 온 최남선이 이것을 더 단순화하여 "7-5"라는 새 율조를 만든 게지요.

아..  역시..
별로 놀라지도 않는군요.
그러면 이게 그 동안 어떻게 우리 나라 민요조로 행세하게 되었냐구요?

그거야 뭐...
그로부터 2년 뒤 우리 나라는 완전히 일본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일본 민요는 그냥 "민요"라고 불렀고, 우리 민요는 "조선 민요"라고 부르는 시대가 됐지요.

그래서 "일본 민요"란 의미로 "민요"란 말이 쓰여진 책들이 많이 생겨 났는데..
나중에 해방이 되어서는 그 "민요"라는 말을 그냥 "우리 민요"라는 말로 잘못 알고
깊은 생각 없이 일제시대 시절 습관대로 그냥 계속 써 온 것이지요.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일제 시대 때 문인들이 "일본 민요"라는 의미로 "민요"라고 표현했던 것을
해방 후 우리 박사님들이 그것을 "우리 민요"라는 의미로 잘못 알고 써 왔다...
뭐, 대충 이렇게 정리가 될 수 있겠네요...

어째, 좀 찝찔하기는 하지만...
내친 김에 좀더 상세한 내막을 알아 보기로 합시다.

역관 계급의 돈많은 중인 출신이었던 최남선은 조상 대대로 이 빌어먹을 신분때문에
아무리 바보같고 무능한 사람이라도 양반이라면 그저 그 앞에서 굽신거려야 했는데
일본이 들어 와서는 하루 아침에 "양반"이라는 제도를 싸악 없애 버렸으니

일본이 그저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었지요...
물론 박경리 "토지"의 "최서희" 같은 양반들은 가슴이 아팠겠지만
양반들보다 훨씬 머리 수가 더 많은 소위 "쌍놈"들은 일본 땜에 살 판 났지요.

거기에다가 "호적법"인지 뭔지를 만들어서
그동안 성씨도 없이 이름만 갖고 살던 수많은 쌍놈들에게
아무 성씨나 갖고 와서 면사무소에 신고만 하면 모두 인정해 준다고 하니
성씨 없이 살던 54%의 백성들이 일제히 양반의 후손 성씨로 신고하니
이 때부터 우리는 "쌍놈은 없고 양반만 있는 나라"가 되어 버렸지요...

40년 뒤 일본식 창씨개명 소동이 지나가고 또 10년 뒤 인민군이 한번 지나가니 우리 집 과거사를 정확히 알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버리고...

그래서 현재 우리 나라는 전 국민이
무슨무슨 임금의 몇 대 손 아니면 무슨무슨 대감의 몇 대 손으로 자처하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품종의 종족이 되어 버렸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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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모처럼 사람 대우를 받게 된 최남선은
이 새로운 세상에서 자기 이름 석 자 알릴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했지요...
까짓거 정치 같은 거야 민씨네가 하든 일본놈이 하든 무슨 상관이 있었겠습니까?

우리도 빨리빨리 신문화를 받아들여 일본처럼 잘 살 수만 있다면..
그 위에 무엇이 부러우랴 하는 것이 최남선의 인생관이자 국가관이었지요...

그래서 일본 유학 갔다 오자 마자 즉시 "신문관"이라는 출판사를 만들어서는
홍명희, 이광수 등과 손잡고 1908년도에 "소년"이라는 잡지도 만들어 내고
또 같은 해에 서울-부산 간 철도 개통을 기념하여 "경부철도가"라는 창가책도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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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차게 토하는 기적 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같은 형세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우리네와 외국인 같이 탔으나
내외 친소(親疎) 다같이 익히 지내니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루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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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세상에....
양반, 쌍놈도 구분 없이 같은 칸에 탄다 이거지?
ㅎㅎㅎ.. 그래,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게 극락이냐, 천당이냐 정말 좋고 좋다...

참, 여기서 짚고 넘어 가야 할 것이 몇 가지 또 있는데....
당시에 널리 쓰인 "창가"라는 말도 일본에서 들여 온 것이었고,
"경부철도가"도 일본의 "철도가"라는 노래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최남선이 일방적으로 일본의 것만 취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1연에 4행씩, 총 67연에 268행의 장편 "경부철도가"의 첫 부분에 곡조를 붙여서 노래를 만들었는데... 그 곡조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Coming through the Rye(밀밭에서)"의 것이어서 최남선의 안목은 가히 세계적인 안목이었다.

당시 최남선의 생각은 정치의 주체가 누가 되든 관여할 바 아니고...
우리 백성들이 빨리 개화하여 좀더 잘 사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도시가 된 한양을 찬양하는 "한양가"도 만들고, 일본 와세다대학 지리역사학과 다닐 때 배웠던 교과서를 바탕으로 "세계일주가"라는 7-5조의 장편 창가책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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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아 잘잇거라 갓다오리라.
압길이 질펀하다 수륙십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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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편에서는 나라 주인을 다시 조선 사람으로 바꾸고자 수많은 사람이 독립운동, 의병운동을 일으키다 죽어 갔지만, 최남선으로서는 그래 봐야 썩어 빠진 옛날 양반 나부랭이들이 다시 등장하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하는 생각 뿐이어서 애시당초 국권회복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정말 최남선은 좋은 세상을 만나 자기 이름도 널리 알리고 책도 만들어 내는 등 하루하루가 모두 신나는 날이었다.

그러나 최남선의 무차별적인 "자기 이름 알리기" 사업도 한 번 고비가 있기는 있었다. 1919년 3월 조선의 모든 실력가들이 합세한 독립운동은 자세히는 몰라도 꼭 성공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자진해서 "독립선언서"라는 것을 부랴부랴 써서 갖다 주었는데, 이게 화근이 되어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이게 최남선 인생의 유일한 실수였다. 잘만 되었으면 또 이름을 알릴 기회였었는데, ㅉㅉㅉ...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금방이라도 전세계 각국이 우리 조선독립을 도와 줄 것 같은 이 시대착오적이고 과대망상적인 최남선의 "독립선언서" 내용 때문에...
당시 순진한 많은 학생들이 그 내용을 정말일 것이라 굳게 믿고서, 더없이 기쁜 마음에 더욱 큰 소리로 만세를 불러 대다가 더 많이, 더 많이 죽어 갔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국내 거점도 다들 들통이 나서 해외로 해외로 전전하는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다.

최남선 인생의 유일한 실수 "독립선언서"는 아직도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다. 물론 시험에도 출제된다.

최남선은 이후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조선총독부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그래서 나중에는 만주 관동군이 세운 만주의 건국대학교 교수로도 출강한다.

그 소식을 들은 만해 한용운이 자기 집에 친구들을 불러서 최남선의 장례식을 치러 준다.
몇 년 후 종로에서 최남선이 한용운을 보고서 반갑게 인사를 하자 한용운은 최남선을 봤는지 못 봤는지 그냥 지나친다. 최남선이 다시 가서 한용운을 붙들고 어째 최남선을 몰라 보냐 하니까 한용운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고 다시 유유히 사라졌다.

"아.. 육당? 그 사람 내 잘 알지... 근데 그 사람 죽었어... 장례도 치렀고.."

그래서 육당은 한동안 서서 한용운의 뒷모습만 바라 보았다고 한다. 최남선은 자신의 방법이야말로 조선의 백성을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고, 한용운 역시 자신의 방법이 조선의 백성을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으니... 약한 나라 약한 국민만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었다.

이 당시에 최남선, 최현배 등은 세계시민주의 등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독립 정도는 하찮은 일로 간주하였고, 박헌영, 여운형 등은 프로레타리아 무산자 계급의 해방이 더 중요했고, 김구, 이승만, 한용운 등은 우리 정치가들에 의한 조선통치가 더 중요한 것이라 했다.

최남선은 또 삼국유사 등을 뒤져서 우리 고유 문화에 대한 연구물도 엄청나게 많다. 스 업적은 아무도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연구 의도가 우리 전통문화 발굴에 있었는지, 아니면 일본문화의 뿌리 찾기 차원에서 그 연구가 시작됐는지... 그것만 영원한 수수께끼일 따름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 나라 민요와 전혀 상관도 없는 일본 민요 가락인 이 7-5조가 어찌 아무런 부작용 없이 순식간에 우리 나라 현대시에 합류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7-5조의 '7'이 우리 나라 전통 율조인 '3-4'로 쪼개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나라 전통시조의 기본 율조는 "3-4-3-4"이고
우리 나라 서민들의 전통민요 기본 율조는 "3-3-4"였다...

그래서 그 '7'이란 것이 우리 나라 전통 가락 '3-4'와 혼동되어 "7-5조"의 '5'까지 덤으로 우리 나라 전통율조에 쉽게 동화되어 버렸다. 너무나 쉽게 동화되어 버려서 나중에는 누군가가 "7-5조 = 우리 민요조"라고 해도 별 생각 없이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넘어 가곤 했다.

좀 다른 각도로 다시 말하자면...
우리나라 전통 가락은 점잖은 분들이나 불렀던 시조의 4마디 형식 가락(4음보율)과 서민들이 불렀던 3마디 형식 가락(3음보율), 이렇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청산리 - 벽계수야 - 수이 감을 - 자랑 마라
이고 진 - 저 늙은이 - 짐 벗어 - 나를  주오
(4마디 씩이 하나의 의미구조를 이룸)

아리랑 - 아리랑 - 아라리요
십 리도 - 못 가서 - 발병 난다
(3마디 씩이 하나의 의미 구조를 이룸)

최남선이 큰맘먹고 수입한 7-5조를...
많은 사람들이 3-3-4는 아니지만 3-4-5로 약간 변형된 3마디 노래 가락 우리 민요시가의 형식으로 받아 들이는 바람에...
정작 우리 백성들은 아무도 그것이 일본서 수입한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저 시대가 바뀌니까 3마디 형식 노래 가락도 3-3-4에서 3-4-5로 바뀌는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했지, '그것이 일본 민요 7-5조를 수입했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얘기다.

7-5조가 우리 민요 가락 3마디 형식 노래 가락에 흡수되었다고 하더라도 7-5조 그 자체를 우리 민요 형식이라고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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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조가 우리 나라 문화에 쉽게 동화된 것은 우리 나라 문화의 유연성 때문이라 봐야 한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유연한 것은 아니고 공통된 부분이 있을 때 특히 힘을 발휘한다.
7-5조 때문에 우리 문화가 망가진 것은 없고 6-5, 8-5로 변형 발전되었으니
우리 나라 문화가 이 때문에 우리의 민요 가락이 예전에 비하여 더욱 다양해졌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얼마나 정감 있는 노래인가.
7-5조는 일본의 5-7-5에서 왔지만 이제는 우리의 것으로 동화되었다.
더이상 일본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일본의 "와카" 5-7-5-7-7 도 좀더 심층분석으로 들어 가 보면 이것도 결국에는 우리 시조의 박자 5-8-5-8-8박의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

네? 우리나라 시조가 3-4-3-4이지 5-8-5-8-8은 또 뭐냐구요?
아, 그건요. 글자 수로만 따질 때에는 3-4-3-4글자이지만 노래로 부르는 창 박자는 5-8-5-8-8박이 기준이거든요.

처음 듣는 이야기라구요?
아마 그럴 겁니다. 우리 나라 학교에서 시조를 국어시간에만 가르치고 음악 시간에는 잘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아마 처음 듣는 분도 많을 겁니다. 그게 우리나라 초-중-고-대 음악과 교육과정의 문제점이기도 하지요.

덕분에 우리나라 시조를 비롯한 국악 애호가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지요. 하여튼 어쨌거나 일본 율조 7-5조의 원조는 우리 나라에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우리나라 시조 창의 5-8-5-8-8이 일본의 5-7-5-7-7 (와카) 또는 5-7-5(하이쿠)가 되고 그게 다시 국내로 역수입되어 최남선, 김소월의 7-5조가 되었다.... 뭐 이런 논리도 성립될 수 있다는 거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음악 전문가들이 더 조사해 봐야 되겠지만, 우리 음악가들이 어디 우리 시조에 신경이나 쓰나요?  제가 한 말이 틀리든 맞든 그냥 대충 넘어 가겠죠 뭐...
(사실 이 일본 와카 가락은 1000년 이상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시조 가락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더 많다... 상관이 있다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쪽일 것이다... 제 말을 틀렸다고 하는 사람이 없을까 봐 미리 자수를 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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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아저나...
요즈음에는 우리 전통 문화와 거의 공통점이 없는 외국 문화들이 마구 들어 와서는 우리 전통 문화의 뿌리를 흔들어 못 쓰게 해 놓고서는...
자신도 뿌리를 못 내린 채 그냥 없어지는 외래 문화들이 계속 몇 년 주기로 계속 들어 오는 것이 정말 걱정이다.

요즘, 우리 나라 아이들...
몇 년 몇 개월을 못 갈 국적 불명의 곡조만 금방 좋아 하다가 또 버리기를 반복한다.
우리 나라 국악이 방송에 나오면 3초를 못 견디고 채널을 돌려 버린다.
지금 7-5조의 국적이나 우아하게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
우리에게마저 철저히 외면 당하는 우리 국악의 신세...
7-5조 들여 올 때만 해도 이렇진 않았는데...

우리 가락 우리가 버리는 세태...
이게 아이들의 탓인가, 아니면
교육과정을 잘못 만든 어른들의 잘못인가
뭔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독도도 열심히 사랑해야 하겠지만
우리 가락도 열심히 사랑해 줘야 한다

이미 초읽기에 들어간 우리의 전통 가락..
앞으로 몇 년을 더 버틸 지 정말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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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등학교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