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는 시골사또라 하찮은 기생에게마저 외면 당하고...
허약한 변학도는 결국 새파란 애송이 세력가에게 쫓겨 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 나이에 시골 사또로 내려 온 것만 해도 속 상해 죽을 일인데...
하찮은 시골 기생마저도 서울에 든든한 애인 있다면서 상대도 안 하려 들고....

급기야는 그 애인이라는 서울 세도가의 새파란 아들놈 때문에
알량한 그 시골 사또마저도 내 놔야 했으니...
<춘향전>에서 변학도만큼 더 억울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역시 권력이란 게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그 아들마저도 아빠의 권력을 등에 업고
아무데서나 "암행어사 출도야"를 외쳐 대고 다니니...

어린 나이에 기생 꽁무니나 따라 다니는 녀석이
언제 공부하여 금방 장원급제까지 할 수 있었으며
이제 막 급제한 새파란 놈이 어떻게 암행어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따져 보면 볼수록 시골사또 변학도는 억울하고 억울하다.

"나도 좀더 좋은 핏줄 타고 고관 대작의 자손으로 태어날 걸..."
"그 기생년을 내가 정말 건드리기라도 했다면 나는 사형 당했을 지도 모르지..."
"이 정도로 끝내 준 것만 해도 정말 천만 다행이야... 그냥 똥 밟은 셈 치자.."
"정말 세상이 무서워... 시골 기생마저도 서울에 애인 있다고 더 큰소리 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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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은 보는 각도에 따라 그 색깔이 엄청나게 차이가 날 수 있다.
바로 그런 점이 춘향전의 매력이기도 하고, 우리 나라 고전의 매력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부터 금년까지 <춘향전>과 관련된 설화, 판소리,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의 종류는 100가지가 훨씬 넘는다.

러시아 타시켄트 지방 고려인 동네의 <춘향전> 연극은 마지막에 암행어사 출도 장면이 프로레타리아 노동자 농민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연결되면서 끝이 난다.

이 많은 종류의 <춘향전>의 원전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이 많은 주장들을 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춘향이의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건너 갈 때마다
이야기가 줄어 들기도 하고 늘어 나기도 했다.

이야기가 줄어 든 것은 중간에 까먹었기 때문이고..
이야기가 늘어난 것은 까먹은 부분을 만들어서 넣다 보니 너무 많이 넣어서 그런 것이다.

동쪽 동네로 이야기를 옮긴 사람의 춘향이 이야기가 조금 다르고
서쪽 동네로 옮겨 간 춘향이 이야기 또한 완전히 같지가 않다.

이야기를 가져가서 옮긴 사람의 기억력이 다르고, 중간에 다시 얽어 넣은 이야기 또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니는 "구전문학(口傳文學)"을 "살아 있는 문학"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야기가 옮겨지는 과정에서 중간에 자기 기억력에 대단히 자신 없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누군가 기록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이야기는 "기록문학"의 대열에 끼어 들게 되고 계속 변하고 변하던 그 이야기는 변화를 멈추게 된다. 이 때부터는 기록된 내용만 가지고 이게 맞느니 저게 맞느니 하는 논쟁이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곤 한다.

구전문학, 또는 그 구전문학을 기록한 기록문학들은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중간중간에 부분부분마다 끼어 넣은 사람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도령이 거지 행색으로 춘향의 집에 가는 장면에서...
분명히 월매가 향단이에게 "얘, 향단아, 물 한 그릇 떠 다오" 하는 소리를 이도령이 바깥에서 듣고 집 안으로 들어 갔는데.....

집 안으로 들어 가서는...
"밥 달라", "밥 없다"로 월매와 한참 실랑이를 벌이는 중에
-- 이 때 향단이가 춘향이 면회를 갔다 오는지라. 향단이 그 말 듣고, "아씨, 아씨 그리 마오, 아기씨가 아시며는 큰일나오" 향단이 부엌으로 들어가 얼른 밥을 내 오는디.. --
어쩌고 하면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여기에서 물론 아씨는 월매이고 아기씨는 춘향을 의미한다)

방금 전에 집 안에 있던 향단이가 금방 사라지고, 춘향에게 다녀 오는 향단이가 갑자기 어디선가 툭 튀어 나오는 결과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구전문학에서는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숱하게 많이 나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중들은 귀로만 듣기 때문에 방금 전에 들은 이야기라도 금방 잊어 버리고서는.. 그냥 대충대충 넘어간다.

이도령이 월매 집에 다시 왔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이고, 방금 전에 향단이가 집 안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아무도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좀 틀려도 아무도 문제삼지 않았다.

<춘향전>이 아무리 구전문학이라 해도 그렇지, 서울 지방에서 발견된 <춘향전>과 전라도 전주 지방에서 발견된 <열녀춘향수절가>의 내용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 두 기록은 한 150년 정도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이 도령과 춘향이가 서로 애인 관계였다는 사실만 빼고는 내용이 거의 다 바뀌었다

우선 주인공의 이름부터 다르다.
먼저 나온 서울판 <춘향전>에서는 "이 령"이라는 도련님과 "현직기생 안춘향"이 주인공인데, 전주판에서는 "이몽룡"과 "은퇴기생의 딸 성춘향"이 주인공이다.

당시 법도로 보면 기생은 엄마로부터 세습되는 직종이기 때문에 은퇴기생의 딸이라 해도 성춘향의 이름은 "기생명부"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고, 그래서 변 사또가 춘향이를 부를 수가 있었다.

서울판에서는 "안춘향"이 현직 기생이고 기생은 천민 신분이라 몸종이 없는데, 전주판에서는 "성춘향"이 대감의 딸이라 향단이라는 몸종까지 있는 고귀(?)한 신분인 것처럼 나온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무리 대감님이라도 어머니가 천민이면 그 자식도 천민이라야 하는데, 향단이라는 몸종이 있으니 많은 청중들은 순간적으로 성춘향을 양반집 보통 따님으로 착각을 하고 이야기를 듣곤 했다.

천하의 홍길동이도 어머니가 천민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안춘향이든, 성춘향이든 15세의 나이로 벌거벗고(?) 밤을 같이 보낸 상대가 벼슬도 없는 애송이 양반도령이었던 것으로 보아 고급 일류 기생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기생은 크게는 3패, 작게는 15가지의 등급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제1패는 왕족이나 중국 사신만을 상대하는 기생들이었는데, 여기에서도 1등급 최고 기생은 노래도 춤도 추지 않고 남자들에게 술도 따라 주지 않는 기생이었다. 이들은 오로지 중국 사신 또는 조선 왕족의 앞에 당당히 앉아서 어려운 한시(漢詩)를 즉석에서 만들어 주고 받는 일만 하였다. 이 기생들의 한시 짓는 실력은 과거에서 막 장원급제한 애송이 선비들보다도 몇 수 위에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급 기생들은 대부분 고위층의 첩으로 들어 앉기 때문에 그 이름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제2패는 관청 관리를 손님으로 모시는 기생인데, 이들은 등급에 따라 한시를 짓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춤도 추기도 하고 또 술도 따르기도 한다.

황진이의 한시 짓는 실력, 시조 만드는 실력이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황진이의 이름이 이미 집 바깥에 알려졌고, 그 대하는 상대가 왕족이 아닌 걸로 보아
황진이 역시 제1패 소속의 기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제3패 소속이 일반인 상대의 기생이었는데, 한시나 시조는 지을 형편이 못 되고 노래도 그저 잡가나 부르는 정도였다고 한다. 또 이들 중 일부는 돈 몇 푼만 쥐어주면 몸도 기꺼이 파는 기생도 있었다. 이들은 기생이라 하지 않고 "유녀(遊女)"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정식 관리도 아닌 오렌지족 이도령을 만나서 옷을 홀딱 벗어버린 안춘향인지 성춘향인지는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의 기생이었을까? 당연히 제3패 중에서도 등급이 그다지 높지 않은, 거의 유녀(遊女)에 가까운 하급 기생이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요즈음 자주 나오는 <춘향가> 중에서..
"이리 오너라 앞 태를 보자" 어쩌고 하는 노래는 이도령과 춘향이가 둘이서 벌거벗고 노는 부분에서 나오는 노래이다. 근데 요즘 청중들도 기억력이 약해져서, 방금 전에 얘들이 옷을 벗었다 그랬는지 입었다 그랬는지 금방 까먹었기 때문에 대부분 그냥 대충 넘어간다.

참, 그리고...
서울판 깍쟁이 현직기생 안춘향이는 첫날 밤 이도령이 그저 못 미더워서 "날 절대 버리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라. 그래야 놀아 주겠다"라고 하여 기어코 "불망기(不忘記)"인지 뭔지 받아 내고서야 놀아 주었고...

우리의 순진한 전주판 춘향이는 이런 거 저런 거 없이 그냥 화끈하게 둘이서 놀고 본다.

서울판에서는 벌거벗고 노는 첫날밤 장면이 불과 한 페이지 정도로 끝내는데, 전주판에서는 이 부분이 집중적으로 보강되어 무려 15페이지에 이른다. 국어 교과서의 춘향전은 전주판을 기준으로 했지만 첫날 밤 부분은 피하고 다른 부분만 나온다.

이 부분이 얼마나 찐했으면 <춘향전>을 "염정소설(艶情小說)"로 분류했을까..
참고로 염정소설의 "염(艶)"자의 뜻을 말할 것 같으면, 이 글자는 "풍성할 풍(豊)"과 "섹시할 색(色)"이 합쳐진 글자이다.

그리고 따지는 김에 한 가지만 더 따져 보면...
아무리 장원 급제를 했다 한들 그 첫 벼슬은 정5품, 요즈음으로 치면 5급 사무관 정도이고, 그것도 장원이 아니면 정6품, 요즈음으로 치면 6급 주사 정도인데...

당시의 암행어사는 최소한 정3품, 요즈음으로 치면 차관급 정도가 되어야 내보내는데, 이제 갓 과거에 급제한 애송이를 그냥 바로 암행어사로 내려 보내는 일은 없다. 언젠가 전쟁 때에 워낙 사람이 없어서 애송이를 내려 보낸 적이 있었다고도 하는데, 그건 아주 특수한 경우에 해당할 뿐이다.

그러니까 어린 나이에 그렇게 찐하게 놀았던 이도령이 과거에 장원으로 붙을 리도 없겠지만... (참, 그 때 자기 아빠가 과거 시험관이었다면 또 모르지... ㅎㅎㅎ...)
설사 급제했다 하더라도 경험도 없는 철부지 애송이를 암행어사로 내려보낼 리가 절대로 없었다.

또 만에 하나, 암행어사로 내려 갔다고 해도...
자기보다 직급상으로 상관이고 선배인 변 사또를 동헌 마당에 무릎 꿇리는 일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변사또가 지은 잘못이 많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상관이기 때문에...
변사또는 당연히 동헌 마루에 계속 앉아 있어야 하고 이도령은 그 밑 뜨락이나 섬돌 위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보고해야 한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사또께서는 제 애인을 건드리려고 마음을 크게 먹었다는 것이 명백하옵니다. 이것은 애인약탈미수죄에 해당하는 바, 저는 어사로서 이러한 사실을 상감마마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또께서는 이에 대한 반론 자료를 내 놓으시든지, 아니면 스스로 벼슬을 그만 두든지 알아서 처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또 다른 동네로 갑니다. 참, 그리고 요즘 내가 좀 바쁘니 저 춘향이는 조금만 더 맡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앗, 아니아니 제가 그냥 같이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러면서 물러나는 것이 관리 세계의 법도이다. 그러나 시장판에서 <춘향전> 이야기를 암기해서 옮겨 주는 서민들이 이렇게 복잡한 양반들의 법도를 어찌 세세히 다 알겠는가?

그저 재미 있고 유쾌, 상쾌, 통쾌하면 맡은 바 소임을 충분히 다하는 것일 게다.

변학도가 억울하다고 해서... 그것이 변학도가 잘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지은 죄에 비해서 그 판결 내용이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좀 들긴 한다 뭐 그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네요....

그래도 변학도는 무조건 나쁜 놈이라구요?

하기야 여자 다루는 솜씨를 보면 머리가 확실히 나쁜 것 같기는 하네요... 쩝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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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현대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은 향단이가 등장하는 완판본(전주판) 남원 광한루의 이몽룡과 성춘향 이야기이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부분부분에 서울판 깍쟁이 안춘향의 이야기도 조금씩 섞어서 나오기도 한다. 불망기를 쓴다거나...

참, 그리고...
1890년대에 누군가가 영어로 <춘향전>을 번역하여 유럽에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번역본의 원전은 향단이가 안 나오고 현직기생 안춘향이 등장하는 경판본(서울판)<춘향전>이었다.

서울판이 더 짧아서 선택이 되었는지, 더 먼저 만들어진 것이어서 선택이 되었는지, 지방이 아닌 서울에서 나온 것이라 선택이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110년 전 영어로 외국에 알려진 춘향의 이야기는 향단이가 안 나오는 서울 춘향이었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남자들은 향단이가 나오는 춘향전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춘향이는 임자가 있지만, 향단이는 끝까지 임자가 없으니깐두루... 이하 생략...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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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춘향전>은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변형될 수도 있고
얼마든지 다른 각도에서 재해석이 가능하다는 점.....

이 점이야말로 우리 나라 구전문학의 최대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흥부전>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아요
솔직히 "흥부"를 말하면요... 엄청 게을러 빠져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오로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아기 만드는 기술밖에 없고(자식이 25명) 정말 문제가 많은 아저씨거든요...

네?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요?
요즈음 우리나라 아기 출산율이 전세계에서 가장 바닥권인데,
아기 잘 낳는 흥부를 공연히 건드려서 국가 발전에 도움될 것 없다구요?

정말, 그렇네요...
흥부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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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등학교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