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차는 어느새 죽변항을 지나 예비대로 들어가는 작은 오솔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도 멀리 돌아서 출발점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남편도 우리의 신혼시절을 고스란히 바쳤던 현장에 돌아오니 감회가 아주 새로운 모양이다.
“여기가 너희들이 태어난 집이란다. 저기 보이는 부대 뒤로 가면 아주 멋있는 집이 있 는데 너희 둘 다 그 집에서 태어났지.”
“그럼 여기가 우리 고향이예요?”
“고향? 글쎄......”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작은아이는 고포에서 생겨서 거의 만삭까지 있다가 마침 여기에 들어 왔을 때 낳기만 하고는 바로 중대장 임기를 마치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 바보야, 여기는 그저 출생지야. 고향이란 태어나서 자란 곳이야.”
큰애가 어느 틈에 동생을 윽박지르며 아는 체 하고 나섰다.
“그럼, 우리 고향은 울진, 인천, 서울, 캘리포니아 몬트레이, 플로리다 탈라하시, 대전 중 에 어디가 진짜야? 우린 고향이 너무 많네.”
작은아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결코 길지 않은 세월 동안에 우리는 기억해 내기도 숨가쁠 만치 너무도 많이 먼 곳에서 먼 곳으로 돌아 다녔다.
중대장을 마치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미 해군대학원으로 위탁교육을 받으러 떠났고, 석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해서 육본에 있다가 다시 박사 학위를 하러 미국으로 날아갔다.
되도록 쉽게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전공을 찾지 않고 굳이 어렵기로 유명한 핵물리학 이론을 택하여 거의 목숨을 걸어놓고 전투를 하다시피 공부를 하는 고지식한 남편을 옆에서 바라보는 것은 전방에서 근무를 하는 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돌아갈 날을 처음부터 정해놓고 시작한 유학생활.
자비로 공부하는 학생들은 언제까지 꼭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아무 때고 공부를 마치면 되는데 비해 국비로 위탁교육을 받으러 온 남편은 정해진 시간 안에 공부를 마치지 못하면 중간에 포기를 하고 그대로 돌아가야 할 형편이었다. 남편은 학위를 마치는 것이 마치 전쟁터에서 적을 물리치는 것이라도 되는 양 지도교수도 질릴 만치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파묻혀 지내는 바람에 이번에도 집안 일은 몽땅 내 차지였다.
전방에서 근무를 할 때나,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나 남편은 언제나 자기 일에 열심을 다하고 나는 그의 곁에서 뒷바라지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았다. 천생연분인지 나는 남편만 곁에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나 늘 당당했고 그는 나만 옆에 있으면 아무리 힘든 여건에서도 주어진 일을 꼭 해낼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덕분에 남편은 미국 학생도 평균 8년이 걸려야 끝내는 핵물리학 박사학위를 4년 반만에 거뜬히 마치고 귀국하여 지금은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한 자리에서 자기의 기량을 발휘하며 근무를 하게 되었다.
“여기가 너희들이 태어난 집이란다. 저기 보이는 부대 뒤로 가면 아주 멋있는 집이 있 는데 너희 둘 다 그 집에서 태어났지.”
“그럼 여기가 우리 고향이예요?”
“고향? 글쎄......”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작은아이는 고포에서 생겨서 거의 만삭까지 있다가 마침 여기에 들어 왔을 때 낳기만 하고는 바로 중대장 임기를 마치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 바보야, 여기는 그저 출생지야. 고향이란 태어나서 자란 곳이야.”
큰애가 어느 틈에 동생을 윽박지르며 아는 체 하고 나섰다.
“그럼, 우리 고향은 울진, 인천, 서울, 캘리포니아 몬트레이, 플로리다 탈라하시, 대전 중 에 어디가 진짜야? 우린 고향이 너무 많네.”
작은아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결코 길지 않은 세월 동안에 우리는 기억해 내기도 숨가쁠 만치 너무도 많이 먼 곳에서 먼 곳으로 돌아 다녔다.
중대장을 마치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미 해군대학원으로 위탁교육을 받으러 떠났고, 석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해서 육본에 있다가 다시 박사 학위를 하러 미국으로 날아갔다.
되도록 쉽게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전공을 찾지 않고 굳이 어렵기로 유명한 핵물리학 이론을 택하여 거의 목숨을 걸어놓고 전투를 하다시피 공부를 하는 고지식한 남편을 옆에서 바라보는 것은 전방에서 근무를 하는 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돌아갈 날을 처음부터 정해놓고 시작한 유학생활.
자비로 공부하는 학생들은 언제까지 꼭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아무 때고 공부를 마치면 되는데 비해 국비로 위탁교육을 받으러 온 남편은 정해진 시간 안에 공부를 마치지 못하면 중간에 포기를 하고 그대로 돌아가야 할 형편이었다. 남편은 학위를 마치는 것이 마치 전쟁터에서 적을 물리치는 것이라도 되는 양 지도교수도 질릴 만치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파묻혀 지내는 바람에 이번에도 집안 일은 몽땅 내 차지였다.
전방에서 근무를 할 때나,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나 남편은 언제나 자기 일에 열심을 다하고 나는 그의 곁에서 뒷바라지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았다. 천생연분인지 나는 남편만 곁에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나 늘 당당했고 그는 나만 옆에 있으면 아무리 힘든 여건에서도 주어진 일을 꼭 해낼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덕분에 남편은 미국 학생도 평균 8년이 걸려야 끝내는 핵물리학 박사학위를 4년 반만에 거뜬히 마치고 귀국하여 지금은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한 자리에서 자기의 기량을 발휘하며 근무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