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내가 처음 죽변에 도착을 하던 날은 이른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결혼을 한지 채 1년도 안된 새댁이 남편을 찾아 허위허위 달려오는 길이었다. 결혼 후 남편은 광주 보병학교를 거쳐 영양에서 내륙 중대장을 하고 있었는데 같은 연대에 속해 있던 해안중대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그 중대의 후임 중대장으로 가게 되었다. 가방 한 개만 달랑 들고 떠난 남편을 찾아 임신 7개월의 몸으로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타고 죽변에 왔을 때 그는 나를 맞아 반길 겨를도 없었다.
갑작스레 부임을 한 남편으로서는 사고로 온통 쑥밭이 되어 술렁이는 중대원들의 마음을 수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남편은 홀몸도 아닌 내가 이사를 하고 짐 정리를 혼자서 힘겹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밤낮으로 부대 일에만 매달렸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나는 그런 남편을 야속해 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바쁘고 힘든 남편이 나 때문에 신경 쓰지 않게 해야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그저 말없이 그의 곁을 지키며 해안 중대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해안 중대는 교대로 예비대에서 휴식과 정비를 하고 다시 해안으로 배치가 되는 법인데 사고를 낸 우리 중대는 다른 부대보다 몇 개월을 더 예비대에 머무르며 정비를 하였다.
예비대에 있는 동안 남편은 같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내게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어쩌다 잠깐씩 집에 들어 와서도 신경은 온통 부대 쪽에다 곤두세우고 있었으므로 곁에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대장 관사는 부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부대와는 또 하나의 담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밖에서 보면 그곳에 집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지어져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고 오직 바다와 백사장과 키 작은 해송만 빼곡이 둘러 서 있을 뿐인 외딴집. 종일토록 말 한마디 건네 줄 사람 하나 없는 그 집은 저 푸른 초원 위에 세워진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게다가 마을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시내버스도 그리로는 다니질 않아서 시장을 가려면 족히 5리나 되는 길을 남산만한 배를 안고 걸어가든지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뚫고 국도로 올라가서 무작정 지나가는 아무 차라도 세워서 태워 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대위 봉급에 매 번 읍내로 전화를 해서 택시를 불러 타고 다닐 수도 없고 남편의 중대장 오토바이 뒤에 마누라가 매달려 타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남편은 거의 매일 저녁마다 중대원들을 번갈아 가며 중대장 관사에서 식사를 하자고 초대하는 바람에 나는 배를 쑥 내밀고 뒤뚱거리며 열심히 시장을 보러 다녔다. 시장에서 오는 길엔 운이 좋으면 그 쪽 방향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타기도 하고 완행 버스를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장을 보아다가 매일 장정들 저녁을 해대느라 부엌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도 난 한번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이심전심으로 남편의 의중을 헤아려 짐작을 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남편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몇 달 동안 거의 모든 중대원들을 중대장 관사로 불러다 개별적으로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하고 나자 뒤숭숭하던 중대 분위기가 많이 정돈이 되고 사고의 악몽에 시달리던 중대원들 모두가 다시금 씩씩하고 믿음직한 패기를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