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다 끝나면 잔잔한 배경 음악과 함께 그 영화 제작에 관련되었던 내용들이 조용히 화면을 타고 흘러 내려간다.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하고 끝이 나면 그 영화 끝자락을 더 봐 줄 여유도 없이 자리를 일어서게 된다. 그러다 가끔은 그 나머지 화면이 다 할 때까지 그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 영화가 주는 슬픔에 절로 흘렸던 눈물을 감추는데 시간이 필요해서 앉아있기도 하고, 때로는 영화에 너무 감동이 된 나머지 그 여운을 금새 걷어 드리기 아까워서 그냥 자리를 지키기도 한다.

미국 소울(Seoul) 음악계의 거성 흑인 가수 레이 찰스(Ray Charles) 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레이(Ray)를 보고난 후 필자는 방금 설명한 두가지 설명중 후자의 이유로 그 곳에 앉아 있었다. 암울한 시대에 맞선 한 시각 장애인 예술가의 정신과 혼이 응집된 결정체 같이 느껴지던 그 영화가 다가 와서는 물러설 줄 모른다. 잔잔히 이어지는 생전의 레이찰스 곡을 들으면서 그가 온 몸을 적시며 불러대는 열정의 영화 장면들, 그리고 그 이면에 깔린 흑인들의 어두운 슬픈 그림자들이 다시 재생되면서 필자의 가슴속을 파고 들어오고 있었다.

현재 필자가 살고있는 지역에서 동북쪽으로 90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린빌’ (Greenville)은 인구가 천 명이 채 안되는 조용한 플로리다 흑인 마을이다. 바로 레이 찰스가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던 동네이기도 하다. 그 마을에서 레이는 바람이 달고다니는 소리의 색갈을 느끼는 가운데 피아노 조율사 피트맨 (Pitman)아저씨 무릎위에서 3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며 그의 음악적 재능을 키워갔었다.

그에게 찾아온 녹내장으로 시각 장애가 시작되는 불운을 겪던 ‘그린빌’ 마을은 그의 앞에 펼쳐진 파란 만장한 삶을 알리는 전주곡이 시작되는 지역이기도 했다. 흑인이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받던 시절이 아니었던 1930년대에 시각 장애자로서 그가 겪었던 시련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 힘겨운 장면이 쉽게 그려진다. 그러나 그의 시각 장애는 그물에 걸리지 않고 지나는 바람소리 까지 읽어내는 음악적 감각을 키워주었다는 점에 있어 레이에게는 다소 운명적 성격을 띠고 있다.

<소울(Soul)은 흑인들의 한을 다 녹여내는 멜팅팟 장르..>

거의 신적인 음악성을 보이는 그의 음악 뒷켠에는 쟂빛 색갈의 우울한 과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 자신의 부주의로 생명을 잃었던 동생 죠지에 대한 죄 의식이자 연민이었다. 그로 인해 레이는 이겨낼 수 없는 아픔에서 해방코자 평생을 마약과 여자 그리고 자기를 불태우는 음악과 함께 살아갔다. 매 장면마다 녹아내리고 있는 레이의 정열과 영혼이 2시간 반동안 그 영화를 내내 받쳐주고 있었지만, 감독은 레이의 흑인 민권 운동정신이 그의 음악과 함께 하였다는 점과 그가 평생 흑인 교육을 위해 2,000 만불 이상을 기금하였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화면에 옮겨 놓으며 맥을 이어갔다.

60년대는 흑인의 재즈 음악이 급격한 물쌀을 타면서 리듬&부르스에서 소울로 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레이찰스 음악이 태생하였지만 그러한 새로운 장르 중심에는 당시 흑인의 공민권 운동이 있었다. 오랜 세월 받아왔던 멸시와 푸대접의 굴레를 벗고 자신들의 권리회복에 나섰던 흑인들의 인권에 대한 열망은 백인 지배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이어졌으며 마침내 도시 흑인 빈민가의 대규모 연쇄 폭동으로 번져갔다. 소울은 바로 흑인들의 이런 분노, 울분, 그리고 몇 代를 걸쳐 내려온 한을 다 녹여내는 하나의 멜팅팟 (melting Pot) 같은 장르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한 소울 음악의 대부격인 레이찰스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재정 후원자로서 그와 함께 흑인 인권 운동에 중심에 있다는 것은 필연적인 숙명이었다. 조지아주 아트란타에서 흑인 인권 운동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음악 활동에 채웠던 족쇄를 풀어주는 의회의 장면을 끝으로 그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 영화가 끈적하게 주는 여운에 젖어들면서… 오랜 시간동안 기억 저편으로 밀어 놓고 있었던 흑인 문제가 다시 필자의 관심 속으로 밀치고 들어 오고 있다.


<아프리카 흑인과 미국 흑인과는 같지가 않다 >

90년대 초반 학위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필자의 가족은 게인스빌 (Gainesville) 탱글우드 (Tangle Wood)라는 학교 아파트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옆 집에는 아빠만 빼고 모두가 흑인인 다섯 식구의 가족이 우리보다 늦게 이사 들어왔다. 흑인 남자가 백인 여성과 사는 것은 자주 목격되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흔치 않아서 호기심이 가는 이웃이었다.

필자가 그 때까지 어렴풋이 갖고 있던 흑인들에 대한 역사 상식은 TV 드라마 ‘뿌리’가 전부였다. 아파트내에는 군데 군데 흑인 가족이 살고 있었다. 새로 이사온 옆집이 그들과 비교시 변별성을 보인 것으로 엄마의 극성스러운 교육열과 아침 일찌기 일어나 타운 하우스의 앞마당을 모두 말끔히 빗자루질 해 놓는 근면한 점 빼놀 수가 없었다. 다만 청소할 때 흑인 영가인지 뭔지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아침 잠이 늘 부족한 필자를 괴롭히기는 했지만 밉상은 아니었다.

300 여 세대가 몰려사는 학교 아파트에 세탁장이 두 군데 밖에 없어 주말에는 빨래 순서가 밀리기 마련이었다. 병원 근무하는 처를 돕는 일환으로 가사 일을 맡았던 필자 에게는 개구장이 두 아이들이 수시로 벗어대서 쌓이는 빨래감은 큰 심적 부담을 주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빨래를 매일 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서 사람이 뜸한 월요일 저녁 9시경에 그 지겹고 긴 작업을 시작하였다. 따뜻하게 말려진 빨래가 구겨지기 전에 펴야 했기 때문에 그 세탁장 안에 넓다랍게 갖추어진 테이블에서 빨래를 개는 마무리작업까지 하면 11시가 되어야 끝이 났다.

그 세탁장에는 자주 마주치는 별로 반갑지 않은 여인이 있었다. 바로 옆집으로 새로 이사온 흑인 ‘루씨’였다. 음성이 너무 커서 아파트가 떠나갈 정도로 시끄러웠었다. 자칭 고유 의상인 천 쪼각을 하나 걸쳐 입고 수선을 떠는 그녀가 필자를 즐겨 수다 상대로 선택하여 성가실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한 일로 루씨한테 제대로 결려 들어서 꼼짝없이 그녀의 수다를 밤 늦도록 다 들어 주어야만 했었다. 세탁을 위해서 동전을 준비한다는 것이 그만 깜박해서 루씨에게 부득히 신세를 지고 말았기 때문에.

기회를 포착한 루씨는 필자를 볼모로 잡아놓고 그녀 특유의 긴 수다 여행에 들어갔다. 사설을 늘어 놓고 좀 시간이 지나자 자기가 ‘미국 흑인’이 아니고 ‘아프리카 흑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희한한 질문을 던져댔다. ‘미국 흑인’ 이던 ‘아프리카 흑인’이던 필자에게는 모두 까맣게 보여서 그게 무슨 대수냐고 냉소적 반응을 보였더니 그녀는 더 열을 올려 그 긴 설명에 들어갔다. 자정이 올 때까지 그녀의 수다는 끝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두 주일이 더 계속되었다.

루씨는 당시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짐바브웨(Zimbabwe)라는 나라에서 온 토종 아프리카 인이었다. 평화 봉사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던 미국 선생을 만나 그녀는 고교 졸업 후 곧 그와 결혼하였다. 머지 않아 농학박사를 받을 남편과 조국으로 돌아 갈 계획에 대해서 적지 않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4세기 전 흑인들이 백인 사냥꾼들에게 잡혀 미국으로 끌려와서 노예로 비참한 삶을 살았던 그 암울한 역사 부분에서는 루씨는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노예사업이 극에 달하던 1770년대에 영국의 노예 무역선 수가 190척이나 되었고, 100 t의 노예선에 400명 이상 적재하여 항해 중에 1/6이 죽었고 노예로 길들이는 과정에서 1/3이 죽어갔다는 사실, 300년 동안 노예시장에서 거래된 흑인 수가 1500만 명에 이른다는 등의 정확한 근거를 줄줄이 대며 설명하였다.

미국 대륙에서 짐승같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던 노예생활을 거치면서 가족 문화가 말살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흑인이 그 노예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멍에의 근간이 되었다고 루씨는 주장한다. 미국 흑인들이 왜 저렇게 게을러지고 생산성이 저하된 인종이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 설명이기도 하였다. 루씨 자신은 얼이 망가진 ‘미국 흑인’과 선을 긋고 싶어했다. 좀 더 파고 든다면 아직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아프리카 국가도 많아서 이들과 미국 흑인을 비교하는 데는 논리의 모순이 따르기는 했다. 그러나 안정된 경제와 나름대로 문화를 갖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에서 온 사람이 하는 일갈이었기에 받아 줄 여지가 있었다.


<백인들의 이중구조속에서 망가져서 사는 흑인들>

루씨의 긴 강의를 계기로 필자는 흑인 생활들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마침 흑인 동네에세 가게를 하고 있는 교포 친구가 있어 자주 놀러 다니면서 흑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조금씩 파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흑인들을 대하다 보면 순진무구한 천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어쩌다가 미국 전역의 감옥을 거의 독차지하다 싶이하며, 사회의 파괴자로서 홀대 받아야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인 동네에 가보면 부모 없이 가장(家長)인 할머니와 지내는 아이들이 눈에 많이 띈다. 아직 십대인 소녀가 철 없는 성관계나 성 폭력으로 인해서 아이를 출산하고 바로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겨 놓고 가출하여 따로 사는 경우이다. 아버지도 없이 크는 그 아이들에게는 선생이 집안에 있을리가 만무하다. 그 흑인 아이들은 몰려 다니면서 작은 범죄를 배우고 실습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엄격한 가정 교육이 실종된 가운데서 어린 시절 부터 범죄를 배우고 그 정도를 점점 키워가는 것이다.

허술한 가정 교육에서 자란 흑인 아이들이 열살 정도를 넘어가면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은 백인 부모들 사이에서 정설화 되어있다. 학군제가 엄격히 적용되는 미국에서 능력있는 부모들은 학군이 좋은 동네로 이사가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비싼 학비 감수하며 사립학교를 보낸다. “흑인들 때문에 미국의 사립학교들이 먹고 산다” 고 주장한다 해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최근들어 백인들이 굳이 대 놓고 흑인을 차별하지 못하는 것은 ‘인종차별금지’ 라는 엄격한 법적 문제도 있지만, 지난 날 그 들 조상이 흑인들에게 회복이 안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주었다는 비인륜적 죄에 대해서 미안해 하는 최소한의 양심 때문이다. 허나 과거 조상이 한 잘못을 인정 하면서도 자기의 자녀들이 그 들과 어울린다는 것을 허용할 정도로 마음이 열려 있지 않다. 현실적으로 넘기 어려운 벽이 있는 것이다. 미국이 그렇게 자부심을 갖고 자랑하는 기독교 정신도 이를 넘지 못하고 있다.

소녀시절 강간 당하는 흑인 여성들의 약 40 %가 근친 상간이라는 사실은 그들 성장기의 열악한 여건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의 인권의 대모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도 십대 시절 사촌 오빠에게서 강간을 당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사건이었다. 차기 부시 정부의 미국 최초 여성 흑인 국무장관으로 지명을 받은 라이스 박사가 세계 이목을 끌고 있다. 대부분의 흑인들이 어떠한 환경에서 성장을 하고 교육을 받는지를 안다면 그녀가 쉽사리 나올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데 그렇게 어렵지가 않다. 흑인들의 민도가 나아지기는 하였어도 그 발전 속도가 다른 소수 민족에 비해서 느리다는 문제가 아직도 심각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검은 안경 넘어 흘렀던 레이찰스의 눈물…>

미래가 예견되지 않던 노예 생활속에서 그들은 어떤 이념지향적 문화를 가질 여유가 없었다. 노예해방이 된 후에도 흑인들은 사회에서 밀려나 대우 받지 못하며 살았기에 내일을 기약하는 생활은 그들에게 사치일 뿐이었다. 이로 인해 단지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편의주의적 상황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생활과 사고에는 늘 게으름이 따라다녔다. 그것이 모두 백인들 때문이라는 강변 한번 제대로 못하고 지금까지 왔다. 그러면서 미국 백인의 죄상은 자꾸 세월에 밀려 역사 속으로 더 깊게 묻히고 있다.

기독교즘을 토대로 살고 있는 미국인들이 과거 조상의 잘못을 속죄(贖罪)하는 차원에서 의외로 흑인들의 인권에 대해 동정하고 차별을 없애기 위해 협력적 운동을 하고 있다. 흑인 단체를 위한 자선 기금과 흑인 학교에 돈을 보내는 후원자도 적지 않다. 그러나 흑인을 도움을 줘야 할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나름대로 문화가 있고 자신들과 어깨를 같이 하며 동등하다고 보는 사람들의 수는 아직 턱 없이 적다.

1968년 흉탄에 맞아 39세 아까운 나이로 죽었던 흑인민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그는 흑백 문제로 흔들리는 나라의 균형을 바로 잡아준 사람으로 칭송되고 있다. 조상의 신분과 피부색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이 자유와 평등 속에 함께 사는 노력을 하였던 그가 한 말이 생각이 난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 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언젠가 살게 되는 꿈이 있습니다.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 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자기 아이들이 흑인아이에게 물 들기를 두려워하며 어릴 때 부터 격리 교육을 시키는 미국 백인 부모들을 보면서 마틴 루터 킹이 염원하던 그 날은 요원하다는 우울하다는 생각에 젖어 든다. 40 년전 레이 찰스가 했던 고뇌에 차서 불렀던 노래를 다시 들어본다. 그의 검은 안경 건너에 맺혀 있었을 눈물을 연상하며…


플로리다에서  이 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