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달 동안 아침 9시면 습관처럼 그 집에 갔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훌륭한 아들 셋을 슬하에 두고 있었다.
그는 환갑이 넘었지만 깨끗하고 하얀 피부 때문에
나이에 비해 10년은 젊어 보인다.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그는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시샘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남편이 죽은 후 친구처럼 의지하여 살아 온
큰 딸이 간경화증으로 죽고 난 후에 그 우울증은 더욱 심해만 갔다.
매일 9시에 그 집에 가서 그의 말을 들어주고
같이 음식도 먹으며 그의 곁에 있어 주는 것으로
나의 하루 일과는 시작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가는 동안
그와 함께 슬픔을 나누고 그와 같이 울어주던 나의 모습은
매일 반복되는 그의 넋두리에 식상이 되었고
그저 습관적으로 빠짐없이 그 집에 간다는 명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아침 8시면 여지없이 전화를 한다.
“사모님! 오늘 우리집에 오시지요?
지금 오시면 안되요?
9시까지 나는 못 기다려요!”
그가 아무리 엄살을 부려도 나는 9시까지 갔고
그 시간 맞추기도 숨이 가빴다.

그 날도 여전히 그에게서 8시에 전화가 왔고
9시까지 못 기다린다고 보챘다.
나는 오늘은 9시가 아니라 11시쯤 가게 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백병원 중환자실에서 말기 암으로 투병하던
성도가 곧 임종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전화가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반쯤은 울먹이며 어린아이처럼 지금 오라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울음을 간과해 버렸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만  매달릴 수 있는가?
그것도 생사를 오고가는 병도 아니고
그저 매일 그의 푸념이나 듣는 것으로 너무 시간을 빼앗기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바로 임종을 앞 둔 성도가 중환자실에서 부르고 있지 않은가?
그 암 환자에 비하면 그는 너무 건강한 데도 말이다.”
내가 그에게 먼저 가지 말아야 할 당위성이 한없이 나열될 것 같았다.

당연히 우리는 백병원 중환자실의 암 환자에게 먼저 달려갔다.
그러나 그 환자는 그 날 임종을 맞이하지는 않았다.
병원에서 나와서 이젠 빠른 걸음으로 그의 집을 찾아 갔다.
그런데 109동 아파트 앞에 119 구급차가 와 있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이상한 조짐이 왠지 나를 불안에 휩싸이게 했다.
구급차에 실려 옮겨지는 사람은 매일 아침에 내가 만나는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시간은 오전 10시경 이었다.
내가 조금만 빠른 걸음으로 달려 왔어도...
내가 그의 집에 먼저 들렀다가 백 병원으로 갔어도...
가슴이 찢어진다는 표현을 이럴 때 하는 것인가?

나는 그가 안치된 백 병원 영안실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다.
그녀의 아들들은 자신의 어머니를 매일 만나던 정으로 저렇게 울고 있나 하고
나를 오히려 위로하려고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그는 나를 그토록 붙잡고 싶어 했을까?
이 황량한 세상에서 지푸라기라도 붙들 듯
나를 붙드는 그의 손을
나는 단 번에 뿌리친 것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서 있을 자신이 없어 자신을  부추겨 달라고
나에게 기대었으나 내가 밀어내 버린 것이다.”

내가 그와의 약속을 어기고 달려갔던 암 환자는
그 이후에 열흘을 더 살고 임종을 맞았다.

그 충격의 날이 지난 지 십년이 되어온다.
그러나 그 날의 나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제는 겉만 보는 세상에서
속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렸을 뿐이다.
겉보다 속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뼈 속 깊이 인 박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누가 더 아픈지
누가 더 절박한지
그들의 울음소리를 정확히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10년 동안 내 가슴에서
아무에게도 외치지 못하고 아직도 울고 있는
뼈아픈 후회요, 허물이요, 회개의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