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기도를 마치자마자 길을 떠났다.
차가 미끌어져 나가는 만큼의 속도로 아침이 오고  있었다.
어젯밤 전화에서 떨리던 아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엄마! 저는 군악대 바로 옆에 서게 되는 3중대 예요.
우리 중대는 옆으로 9줄 앞 뒤로 16줄로 서는데
저는 옆으로 5줄, 길이로 9번째 이니까
가장 정 가운데에 서 있어요.
저를 찾아오실 수 있겠어요?”

“웅아! 엄마는 네가 너무 자랑스럽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그 어렵도 힘든 훈련을 무사히 잘 마쳤구나!
걱정마라! 아무려면 내 아들을  못 찾겠니?
오늘밤 잘 자고 내일 만나자!

막내 아들은
지난 7월 5일 학사 장교에 합격하여 입대하였다.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훈련을 받는 아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메이어 오던 16주 동안
여름은 가고 가을이 왔다.
아들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모진 그리움은
아들의 어깨에 소위라는 계급장을 달아줄 수 있는
기쁨의 열매로 맺혀진 것이다.

경상도 합천으로 가는 길 휴게소에는  
우리처럼 일찍 길을 떠난 부모님들이
때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옥천 휴게소에서 우리처럼 아들을 찾아가는
부모님 일행을 만났다.
그 집은 바리바리 챙겨 온 음식뿐 만 아니라
입대한 아들의 애인까지 예비 며느리처럼 거느리고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을 보고 아들을 위해서
아무 것도 준비한 것이 없는 나의 빈손이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5시 50분에 출발하여 영천에 도착한 시간은
11시30분이었다.
아들이 임관식은 아직 2시간이 남아 있는 이른 시간이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장미꽃으로 꽃다발을 준비하고
꽃다발을 자리에 내려놓으면 혹시 꽃이 일그러질까봐 계속 들고 있었다.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아들은 16주 동안 두 번의 외박을 나올 수 있었다.
1박 2일의 외박이여서 다른 친구들은 집에 오지 않고
포항이나 사관학교 근처에서 쉼을 갖는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들은 두 번의 외출을 다 서울에 올라 왔었다.

첫 외출은 입대한 지 두 달 만인 지난 8월 25일 이었다.
토요일 저녁에 도착 했다가
그 이튿날 오후 1시경에 다시 귀대해야 하는 짧은 만남이었다.
보고 싶었던 아들을 만나는 기쁨이 있었지만
그 먼 거리를 달려 오자마자 떠나야 했다.

아들은 서울과 합천으로 오고 가는 데
시간이 다 들어가는 외출이었지만
자신이 건강하게 잘 있는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여드려
우리 부부를 안심시켜 드리고 싶었다고 그 첫 번째 이유를 말했다.
또 우리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싶어서 였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첫 번째 타게 된  아들의 월급 때문이었는데
그 월급을 주님께 첫 열매로 드리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첫 번째 월급은 흰 봉투에 주님께 감사한다는 글과 함께
헌금으로 드려졌다.

아들의 두 번째 외출은 추석 때였다.
햇빛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체중이 10 킬로그램 이상 빠진 손자의 모습을 보고
울먹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아들이 받아온 두 번째 월급이 드려졌다.
그리고 한사코 거절하는 외할머니의 앙상한 손에도
아들의 두 번째 월급은 나누어졌다.

축구장이 족히 세 개는 들어 갈만한
충성대 연병장에서 임관식이 거행되었다.
천 여명의 아들들이 마치 자로 그은 듯
줄을 맞추어 서 있었다.
모두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한 지
다 내 아들처럼 사랑스러웠다.
줄 지어 서 있는 아들에게 가서
계급장을 달아 주는 순서가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왕좌왕 헤메는 일도 없이
이미 끈으로 아들과 연결하고 팽팽히 당기고 있었던 것처럼
한 발걸음에 뛰어가 아들들을 찾아낸다.

우리도 단 번에 아들을 찾았다.
내 앞에 서 있는 아들이
너무 늠름하고 믿음직스러워 가슴에서 울컥 눈물이 솟는다.
“충성! 소위 이 성웅!”
아들의 절도 있는 경례를 받았다.
“장하다! 내 아들!”
“하나님과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아들의 어깨에 계급장을 달아 주는 남편의 손이 떨고 있었다.
남편도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임관식이 다 끝나자
아들은 소지품 중에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두 개의 반지를 꺼냈다.
자신의 학사 장교 기념 반지를 하지 않고
남편과 나의 반지를 마련한 것이었다.

“엄마! 엄마에게 반지가 없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어요
셋째 달, 넷째 달 월급에서 한 푼도 안 쓰고 마련한 거예요.
기쁘게 받아주세요.
우리 엄마 손은 이 반지 끼면
너무 이쁠거예요.”  

우리 부부는 아들이 선물한 커플 반지를 끼고
서로 코를 훌쩍거리기 바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아들은 내 귀가에 대고 잔잔히 말했다.
“엄마! 오늘로 임관이 되었기 때문에
다음 달 부터는 엄마에게 조금 보탬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그토록 힘든 훈련을 마쳤고
또 16주의 연이은 훈련을 광주에서 치러야 하는 아들은
엄마인 나에게 무언가 줄 수 있다는 기쁨이 있어서  
조금도 훈련이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다른 학사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워 적금도 들고
평소 갖고 싶었던 물건도 샀지만
아들은 엄마 생각만 했다고 한다.

“아들아! 엄마가 아무리 힘들어도
너의 다섯 번째 월급부터는
오직 너를 위해,
너의 앞날을 위해 한 푼도 쓰지 않고 다 저축해 주마!
그 돈으로 유학도 가고...

긴장과 피로로 깊이 잠든 아들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차는 서울을 향해 달렸고
나는 아들의 밝은 미래를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