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시간은 다 되어 가는 데 남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새벽길을 나섰다.
겨울 새벽길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여 어두움을 드리운다.

지하철 7호선을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3호선으로 갈아탔다.
남부 터미널에서 내려 양지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배차 시간이 15분 간격이라더니
오늘은 한 시간도 더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8시에 도착하기는 역부족일듯 싶다.

게으름을 부리고 오지 않던 버스가 미끄러져 들어오고
버스에 탄 채로 또 얼마를 기다렸다.
초조한 내 마음과는 달리 버스는 제 시간을 다 채운 후에 출발했다.

양지에 도착한 시간은 정각 8시 였다.
그러나 그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시험장에 들어가자마자 받은 논제는
머리 속이 까맣고 논문의 구성이 잘 되지 않았다.
진정이 안되어 글씨 쓰는 손도 달달 떨렸다.
본론 중간 부분 밖에 쓰지 못했는데
시험 시간이 끝났다.
둘째 시험인 철학 논술은
첫 시간의 실수를 거울 삼아 시간 배정을 잘 해서
마음에 흡족하게 잘 썼다.
그러나 논문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주님! 논문을 다시 쓰면 잘 쓸 것 같아요."
이렇게 빈 말을 날리며
"아마 그토록 공부하고 싶어 했더니
주님이 내가 불쌍해서 시험만 치뤄 보라고 했나보다" 하고
마음을 비웠다.

마음을 비웠어도  합격자 발표가 나는 날은
나도 모르게 안절 부절하게 되었다.
그런데 발표 대신 논문 출제에 문제가 생겼다는 공지와 함께
이틀 후에 논문 시험을 재 시험 본다는 것이다.
이번 재 시험 장소는 양지가 아닌 사당동 대학 캠퍼스에서 란다.
이게 웬일인고?
주님이 이렇게 까지 나에게 배려해 주시다니!

재 시험 논문 제목을 보는 나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왔다.
그것은 나의 대학 졸업 논문 제목과 동일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까탈스런 교수님에게 수없이 교정 당한 덕을 톡톡히 볼 수 있었다.

시험지 앞 뒷장에 빼곡히 써내려간 답안지를 내 놓고 시험장을 나오며
주님이 나를 반드시 대학원에 진학하게 해 줄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의 합격소식은 남편이 먼저 알게 되었다.
기독 신문에 발표된 것을 시누이의 남편인
박 목사님이 발견하고 우리 집에 전화를 건 것이었다.

남편은 목회와 가정과 아이들에게
티끌만큼의 소홀함이 없게 하고 공부 할 것을
나에게 다짐 받고 진학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입학한 2001년 3월 부터
나는 기숙사에 있지 못하고 매일 서울에서 양지까지 오고 가야 했던 것이다.
신체적으로나 여건적인 면에서
열악하고 힘든 상태에서 공부하게 되었지만
그럴수록 나는 신학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고
강의를 받는 태도는 진지하였다.
내가 공부 하는 것 때문에 불편한 모든 것을 감내하는
남편과 아이들과 성도들에게 너무 고마와서
단 일분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강의 시간에 받는 감동으로 나는 매시간 울면서 강의를 받았다.
그렇게 거의 밤을 새우며 공부하는 3년이 흘러 올해 2월에
남편과 아이들과 성도들의 축하를 받으며 감격의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 날 졸업식장에서 나에게 남은 한 가지 바람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제까지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와 기적과 사랑을 글로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날밤 부터 컴퓨터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4년 전 입시 준비를 할 때 같이
불기 없는 추운 서재에서 밤을 새우기 시작한 것이다.
읽는 이는 고작 3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분량의 글을 쓰는데
서투른 나의 걸음은 매일 온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 된다면
글을 쓰다가 쓰다가 죽어도 좋으리라.